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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장보고의 魂을 이어 해상왕 꿈 다시 꾸다/ 유용원의 군사세계

鶴山 徐 仁 2013. 8. 1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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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장보고의 魂을 이어 해상왕 꿈 다시 꾸다
 
문근식의 SubmarineWorld<43> 한국 잠수함의 어제와 오늘 (2)
 
문근식 한국국방안보포럼 대외협력국장

한국 잠수함 1호 ‘장보고함’으로 간 까닭은  

성능 좋은 독일제 209급 선택한 혜안  우수한 잠수함·운용 능력 확보 큰 도움

 

1993년 대우조선소에서 열린 해군의 세 번째 잠수함인 최무선함진수식장면. 그해 후반기에는 해군의 네 번째 잠수함인 박위함까지 진수해 한 해 두척을 진수하는 기록을 세웠다.

독일 잠수함학교에 입교한 해군 최초의 해외 잠수함 인수 승조원들. 독일이 통일되던 해인1990년 54명이 파견돼 잠수함 기초교육부터 받기시작했다.

독일 잠수함학교에 입교한 해군 최초의 해외 잠수함 인수 승조원들. 독일이 통일되던 해인1990년 54명이 파견돼 잠수함 기초교육부터 받기시작했다.


 

 ▶ 한국은 왜 독일의 209급 잠수함을 선택했는가?

  ● 209급은 당시 11개국에 49척이나 판매된 성능이 잘 검증된 배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잠수함을 보유하는 모든 국가의 첫 번째 잠수함은 재앙(災殃)을 당했다는 말이 많았다. 이 소문은 잠수함 사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경고(警告)처럼 들리기도 했고, 이 소문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일종의 도전(挑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소문은 잠수함 사업을 추진하면서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주변국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잠수함을 확보하는 이상 가장 성능이 검증되고 우수한 잠수함을 갖자는 목표도 크게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해군이 도입할 잠수함 최종 후보로 독일의 209급 잠수함, 프랑스의 아고스타(Agosta)급 잠수함, 이탈리아의 사우로(Sauro)급 잠수함으로 압축됐다. 이 중 당시 세계 11개국에 49척 수출 경험이 있는 209급 잠수함은 안전과 신뢰도 측면에서 최고로 평가되면서 최종적으로 한국이 도입할 잠수함으로 선정됐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209급 잠수함의 선택은 매우 잘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보고함 인수 이후 오늘날까지 그 신뢰성이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해군의 1번 잠수함은 왜 장보고함으로 이름이 붙여졌는가?

 우리 해군은 전통적으로 군함에 이름을 붙일 때 주요 지명(地名)이나 도시의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서울·전북·경북처럼 도 단위나 대도시는 규모가 큰 전투함에 사용해서 서울함·전북함·경북함 등으로 불렀고, 중·소도시는 이보다 규모가 작은 전투함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91년 장보고함이 등장하면서부터는 해군이나 해양 활동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이름을 따서 함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수상 전투함도 이와 같았다. 광개토대왕·을지문덕 등의 이름을 따서 광개토대왕함·을지문덕함처럼 말이다.

 그러면 왜 해군 역사에 큰 계기가 된 첫 번째 잠수함 이름으로 장보고를 선택했을까?

 장보고 대사는 통일신라시대 한·중·일 삼각무역을 장악했던 해양활동의 선구자였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에 장보고 대사의 병력이 1만 명 정도였다는 사실로 봐 그는 국제무역의 선구자였으며 해군의 시조(始祖)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1번 잠수함은 장보고함으로 명명(命名)됐다.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승조원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장보고함은 1988년 8월 독일에서 건조가 시작돼 37개월 만인 1991년 9월 독일 HDW 조선소에서 한국과 독일의 대표자가 모여 장보고함이라는 명명식과 함께 잠수함의 형체를 갖춰 최초로 물에 띄우는 진수식을 거행했다. 이후, 1993년 한국에 도착해 각종 뉴스매체의 조명을 받게 됐는데 이를 계기로 장보고 대사에 대한 재조명 붐이 일어났다. 당시 드라마 ‘해상왕 장보고’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관련 소설 등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때를 맞춰 1996년에는 장보고 대사 출생지인 완도군 주최로 장보고 축제가 시작됐다.

 이 기간에 해군에서도 장보고 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장보고 해상 유적지 답사’에 참가했다. 전국에서 교수·대학생·역사학자·기자 등 202명이 목포해양대학교 실습선인 새 유달호에 몸을 싣고 중국의 산둥반도 법화원, 일본 후쿠오카 이만리 현 등을 방문해 장보고 대사의 행적을 따라가 보기도 했다.

 운 좋게 이 과정에 해군 일원으로 참여한 필자가 참으로 놀랍게 생각한 사실은 장보고 대사가 한국에서보다 중국·일본에서 더 유명한 인사였다는 것이다. 중국·일본의 방문지마다 해상왕 장보고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많은 사람이 환영했다. 아무튼 한국 해군 1번 잠수함을 장보고함으로 명명한 것은 한국 해군사(海軍史)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획을 긋는 계기가 됐으며, 해군 잠수함 부대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잠수함사업단 구성과 3척 해외건조 계약체결

 해군은 1987년 1월 잠수함 해외구매를 위해 특수사업단을 구성하고 4년 전 예산 부족과 주변국의 묵시적인 압력으로 중단된 잠수함 사업을 재개했으며, 그해 말에 이르러 드디어 바라던 결실을 보게 됐다. 특히, 1987년 12월 1일은 한국 해군사에 있어 참으로 의미 있는 날이었다. 30년 해군 숙원사업이었던 잠수함 구매사업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재가 내용은 1척은 독일에서 건조하고, 2척은 원자재 도입 국내 조립 생산으로, 68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잠수함 3척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12월 15일 대우조선소와 독일 HDW 조선소 간에 건조 계약이 체결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해외구매사업 추진을 위해 팀이 구성됐고, 서울역 앞에 있는 대우그룹 빌딩 16층에서 10여 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모여 장보고함 해외 도입에 필요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8월 8일 독일의 HDW 조선소에서 장보고함 건조가 시작됐다. 당시 남북관계가 긴장상태에 있었고, 미국 등 주변국이 한국의 잠수함 도입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비밀리에 추진됐다. 또 이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해군이라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사복(私服) 차림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잠수함사업단의 해군본부 이동과 잠수함 운용준비위원회 구성

 잠수함 사업의 대통령 재가 후에는 잠수함사업단을 대우그룹 빌딩 사무실에서 해군본부(당시 서울 대방동 소재)로 옮기면서 일부 내용이 공개되고 보안(保安)이 완화됐다. 해군에서 보안을 유지할 경우 작전운용, 군수지원 등 본격적인 잠수함 운용준비를 위한 관련부처 간 업무협조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해군본부는 특수사업단을 구성하고 해군참모차장 주관으로 매월 ‘잠수함 운용준비위원회’를 운용하면서 본격적인 잠수함 인수준비를 시작했다.

잠수함 퀴즈

우리나라 해군은 1992년 10월 14일 해군 역사에서 숙원사업과도 같은 첫 번째 잠수함인 장보고함을 독일에서 건조해 인수하게 됐다. 또 1994년 4월 1일에는 국내에서 첫 번째 건조한 해군의 두 번째 잠수함인 이천함을 대우조선소에서 인수한 이래 2001년까지 매년 1~2척의 209급 잠수함을 확보했다. 해군은 현재 총 몇 척의 209급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는가?   지난회 정답 : 백상어

 

1993년 대우조선소에서 열린 해군의 세 번째 잠수함인 최무선함 진수식 장면. 그해 후반기에는 해군의 네 번째 잠수함인 박위함까지 진수해 한 해 두 척을 진수하는 기록을 세웠다.독일 잠수함학교에 입교한 해군 최초의 해외 잠수함 인수 승조원들. 독일이 통일되던 해인 1990년 54명이 파견돼 잠수함 기초교육부터 받기 시작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문근식 (주)솔트웍스 고문 한국국방안보포럼 대외협력국장 mksnavy@naver.com

2013-08-12 13:2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