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동반성장 연구소 이사장 정운찬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대한민국 총리 정운찬을 만든 부모님은 어떤 분이냐고.
저는 오늘 제 어머니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본 것 자체가 행운이었습니다.
딸과 아들을 합쳐 열을 낳고 그 가운데 몇을 병으로 잃으신 어머니는 마흔이 훨씬 넘은 연세에 임신을 하자 더럭 겁부터 나셨던 모양입니다. 그 독하다는 익모초 약을 진하게 달여 장복하셨습니다. 모든 약이 다 그렇듯 익모초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뒤탈이 있을법한데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 내성을 길러서 그런지 어머니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건강히 세상에 나왔고 감기한번 안 걸리고 잘 자랐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집들이 그러하듯 저도 가난과 동거하며 살았습니다.
그나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사정은 더 나빠졌습니다.
졸지에 자식들의 기둥이 되신 어머니는 힘겨운 삶에서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새벽에 길어온 물을 소반에 올려놓고 조상들께 소원을 비는 의식이었습니다.
“어제 하루 우리 식구들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게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리고 자식들 이름을 일일이 다 부르시며
“제 밥 먹고 살게 해주시고 남에게 폐 끼치는 일 하지 않도록 보살펴 달라.”는 말로 어머니는 간절한 기원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잠결에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곤 했습니다. 새삼스럽게 생활이 달라질 것도 없지만, 눈을 감은 채 오늘도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새벽 그 순간, 우리 집은 한없이 경건하고 행복했습니다.
어머니는 막내인 제게도 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손이 안 닿는 곳에 있는 음식은 먹으려고 하지 말게.”
“세 번 이상 청을 받기 전에는 남의 집 잔치에 가는 것이 아니네.”
어느 분이 먼저 그 말씀을 하시기 시작했는지 명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무튼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어린 자식들에게 이런 말씀을 반복적으로 들려주셨습니다. 밥상머리 교육은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정작 우리에게는 팔을 뻗어야 집을 수 있을 만큼 반찬이 가득한 밥상을 받아본 적도 별로 없었고 세 번씩이나 간곡히 오라고 부르는 잔치도 딱히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밥이 곧 하늘이었습니다. 한 나절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한 끼를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방 한 칸에 한 가족씩 ? 한 지붕 아래 다섯 가족이 함께 살았으니까 - 매일 스무명이 넘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집안에서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어린 시절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적은 명절날과 생일날 아침과 제삿날 밤중이 고작이었습니다.
제삿밥은 똑같은 분량으로 나뉘어져 골고루 한 집안 다섯 가족에게 배분되었습니다.
간혹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다른 집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밥은 그래서 아무도 독차지할 수 없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하늘이었습니다.
그 때를 빼고는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준 옥수수 가루를 넣고 멀겋게 끓인 죽,
또는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와 국수 같은 것이 밥상에 오르는 음식의 전부였습니다.
점심은 으레 거르기 마련인 그 때 우리에게 죽 한 그릇은 새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경건한 성찬이었고,
또한 그날 하루도 열심히 몸을 움직인 대가로 저녁에 제공되는 근사한 보람 같은 것이었습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지 수 십년이 지났는데도 학교라고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내 어머니만큼 훌륭한 교사가 못된 것 같아 아침이면 늘 나는 교단에 서는 것이 망설여지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어머니의 기도와 가르침, 그리고 주변 선생님들의 도우심으로 저에게는 어느덧 박사학위와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시던 대학교수라는 타이틀이 주어졌지만, 그 때는 제 곁에 반드시 있어야할 분- 어머니가 안계셨습니다. 그 후 병석에서 쓰신 어머니의 편지를 받게 되었는데
“가마를 타게 되면 가마꾼의 어깨를 먼저 생각하게.”
한지에 적힌 글씨는 어머니 얼굴처럼 여전히 단아했습니다.
그 글이 어머니의 마지막 메시지. 마치 백조의 울음과도 같았습니다.
제게 동반성장은 어머니의 가르침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