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하나님사랑 겨레사랑(4), (5)] 김진홍의 아침묵상

鶴山 徐 仁 2013. 3. 8. 19:35

하나님사랑 겨레사랑(4)

2013-3-7

하나님 사랑과 겨레사랑을 평생을 두고 실천한 선배 크리스천으로 김교신 선생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제 글에서는 김교신 선생께서 20대 나이에 함석헌 선생등과 함께 성서조선지를 간행하던 이야기를 하였다. 선생은 일본유학을 마친 후에 양정중학에 지리 선생으로 부임하였다. 지리 선생으로 교실에서 강의하시는 동안에 지리과목은 절반만 가르치고 나머지는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깨우치는 강의를 하였다.

당시에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표현하기를 대륙에 붙은 토끼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백두산 쪽이 토기의 머리요 영일만은 토끼의 꼬리요, 제주도는 토끼의 똥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한반도의 형상이 어찌 토끼 모습이냐? 호랑이의 모습이다. 대륙을 앞 다리 둘로 떠받치고 웅비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이다.”

선생께서는 이를 실제로 그림을 그려 학생들과 지인들에게 돌리곤 하였다. 김교신 선생이 학급 담임을 맡은 적이 있다. 그때 자신의 수첩에 반 학생들의 이름을 적고는 날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학생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중보기도를 드렸다. 그러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학생들을 눈높이에 따라 지도하였다.

반 학생 중에 손기정이란 학생이 있었다. 손기정군이 달리기에 소질이 있는 것을 아시고는 기정군을 불러 마라톤 선수가 되기를 권하였다.

"기정아 너는 마라톤에 소질이 있으니 마라톤 선수가 되어 조국을 빛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선생은 기정군에게 밥을 사며 권하고 격려하였다. 담임선생의 그런 권면을 듣고 열심을 다해 마라톤을 연습하여 드디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게 되었다. 담임선생의 권면과 중보기도가 위대한 선수를 배출시킨 것이다. 손기정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 파견할 대표선수를 선발하기위해 일본 동경에서 열린 경기에 참여하였을 때다. 경기 중간쯤에 이르러 손선수가 지쳐 쓰려지려 할 순간이 있었다. 손 선수가 쓰러지려고 비틀 거릴 때에 자전거를 타고 전 코스를 뒤따르던 김교신 담임선생이 자전거를 탄 채로 목이 매여 소리를 질렀다.

"기정아! 기정아! 조국을 생각해라, 하나님을 생각해라! 기정아 힘을 내라"

담임선생의 이 외침을 듣는 순간 손 선수는 “그래 달리다 죽자”라는 각오로 힘을 다해 달렸다. 지금 이 나라에 그런 교사가 얼마나 필요한 시대인가!

 

 

하나님사랑 겨레사랑(5)

2013-3-8

양정중학교에서 지리과목을 가르치던 교사 김교신은 지리시간에 지리는 절반 가르치고 나머지는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깨우치는 강의를 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일본경찰이 이를 눈치 채고는 김교신 선생을 교단에서 추방시켰다. 그리고 성서조선지에 실은 글이 반일문서라 규정되어 함석헌 송두용 유달영 등의 12명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로 실업자가 된 선생께서는 생업을 찾아 흥남비료공장에 기숙사 사감으로 취직하였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밤마다 도박판을 벌이고 월급을 타면 술값으로 허비하며 지냈다. 도박하고 술 마시니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다. 일본인 경영자들은 조센징들은 으레 그런 거라 치부하고는 그냥 버려두고 있었다. 그러나 김교신 선생께서 사감으로 들어간 이후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밤마다 도박판을 찾아다니며 노동자들을 설득하였다.

"여러분 조국은 망하여 일본의 종살이 하는 터에 여러분이 이렇게 허구한 날 도박에 매달리면 여러분 개개인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발 도박을 끊고 건실하게 삽시다."

노동자들이 처음에는 욕을 하고 행패도 부리고 미친놈이라고도 하였으나 선생께서 진심을 담아 계속하니 노동자들도 감동하여, 도박을 끊고 술을 절제하고 싸움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차에 전염병 장질부사가 기숙사에 밀어닥쳤다. 비료공장 사무처 일꾼들은 전염되지 않으려고 모두들 피하였다. 그러나 사감 김교신 선생은 환자 한 명 한 명을 찾아다니며 간호하고, 죽으면 시체를 수습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러기를 밤낮 쉬지 않고 계속하니 선생을 아끼는 지인들이 간곡히 권하였다.

"지금 해방의 날도 가까워오는 시국인데 선생께서 그렇게 과로 하시면, 환자들을 돌보시다 감염되어 잘못되면 해방의 날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요. 제발 한동안 기숙사에서 나와 피하시요"

그러나 선생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답하였다.

"동포들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터에 내가 살겠노라고 그 자리를 피한다면 내 어찌 크리스천이라 할 수 있겠소!"

이렇게 답하며 그 자리를 지키다 결국은 감염되어 숨졌다. 바로 해방되기 불과 네 달 전, 선생의 나이 45세 되던 1945년 4월 25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