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사회민주당(SPD) 출신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수상에 취임하자마자, 앞서 20년간 집권했던 기독민주당(CDU)의 할슈타인 정책(Hallstein Doctrine)을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바꾼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status quo) 동서독 두 개의 국가를 대외적으로 인정하되(각자 UN 가입), 동서독 간에는 특별한 방식을 띠게 된 이중적 정책이었다. 당연히 제1 야당 기민당은 동방정책을 반통일 정책이요, 영구분단 모략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1972년 1월 브란트는 <극단주의자 파면법>에 손을 들어준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준다. 다름 아닌 젊은이의 우상 브란트가 급진 좌파를 모든 공직에서 추방하겠다고 했으니, 그 충격의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법은 브란트에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빨갱이 꼬리표를 떼는 데 도움이 된다. 기민당은 마침내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추구하되, 동독에 협상의 주도권을 넘기지 않을 것임을, 동독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않을 것임을 믿게 된다. 막 퍼 주지 않을 것임을 믿게 된다.
동서독의 화해(rapprochement) 분위기 속에서도 끝내 서독이 동독 슈타지의 집요한 공작에 넘어가지 않고 자유평화통일의 합창을 부를 수 있었던 데는 이 <극단주의자 파면법> 외에도 두 개의 법률이 추가로 위력을 발휘했다. 하나는 1956년 헌법재판소에서 극우(나치)와 극좌(공산당) 정당에 대해서 모두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달리 국수주의당, 떼법당, 반국가 정당이 발을 못 붙이게 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68년의 긴급조치법이다. 이 법은 재난 발생 시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모든 구제 수단을 집결하는 법적 근거일 뿐 아니라 ‘민주적 헌정 질서’를 내부적으로 위협하는 위험에 대한 방어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기민당 정부의 공산당 위헌 결정과 긴급조치법, 사민당의 <극단주의자 파면법>은 서독이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냉정하게 실용적으로 동독과 교류하면서 야금야금 동독을 뿌리에서 흔들어 선의(善意)로 악의(惡意)를 이기는 3중의 보호막이 된다.
빌리 브란트는 1913년 사생아 어머니에게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빌리 브란트는 가명이다. 1931년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3년 외국으로, 주로 노르웨이로 12년간 떠돌아다니던 중에 쓰던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에른스트 칼 프람인데, 프람은 외할아버지의 성을 딴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성인이 되어 알았지만, 프람은 외할아버지도 아니다. 하여간 아버지 역할을 한 외할아버지 루드비히 프람은 8살 빌리 브란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준다. 외할아버지가 파업 중인 공장의 어떤 감독관이 배가 고파 빵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에른스트에게 빵을 두 개 주었다. 에른스트는 한달음에 그 빵을 집에 들고 와서 자랑스럽게 외할아버지에게 보여 주었다. 외할아버지는 크게 노했다.
“당장 그 빵을 돌려주어라! 선물이라구! 파업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어떤 선물도 받지 않는 거야. 우리는 적들로부터 매수당해서는 안 돼! 우리 노동자는 적선으로 달래는 거지가 아니란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원하지 ‘선물’을 원하는 게 아니란다. 그 빵은 다시 갖다 줘라. 당장!”
빌리 브란트는 고등학교 때 태생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자연스럽게 사민당에 입당한다. 나치가 사민당을 탄압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사민당의 격렬한 노선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브란트는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민당을 탈당하여 사회주의노동당(SAP)에 입당한다. 그러나 1937년 스페인 내전에 노르웨이 신문의 통신원으로 파견되어 스페인의 공산당이 스탈린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음을 보고 공산당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다. 급진 사회주의자에서 온건 사회주의자로 완전히 돌아서는 데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맹이 결정적이었다. 1939년 극우와 극좌가 손을 잡는 것을 보고, 두 악마의 검은 계약을 간파하고 다시 사민당의 품안으로 들어간다.
사민당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시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원론적 계급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노동자만 대표하는 정당으로 남아 있다. 변신하지 않고는 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브란트는 직감한다. 1959년 마침내 사민당은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노동자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 거듭난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사회주의가 그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기에 진정으로 정당한 정책을 펼치려면 사회주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해야 한다.”
1960년에는 사민당의 외교정책도 획기적으로 바뀐다. 알량한 민족적 자존심을 꺾고 중립 노선에서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와 한편이 되는 서구 편입을 공식화한다.
빌리 브란트도 그렇고 사민당도 그렇고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적으로 업그레이드한다. 성숙하고 발전한다. 브란트는 1957년에 베를린 시장으로 당선되는데, 그는 당시에도 변방으로 전락한 서독의 한계를 절감하고 미국의 하늘 아래서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특히 1961년 소련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면서 동서독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케네디의 미국과 흐루시초프의 소련임을 분명히 깨닫는다. 공산 전체주의 소련과 자유민주 미국 사이에 중립은 있을 수 없고, 서독이 살고 동서독이 다시 하나 되려면 미국 편에 설 수밖에 없음도 분명히 깨닫는다. 그러면 아무 것도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무엇을?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 동족끼리 만나는 것이다. 민간인끼리 교류하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는 수상이 되기 전 베를린 시장 시절에 이미 동서 베를린 간 민간 교류의 물꼬를 텄다. 베를린 장벽에 좌절하지 않고, 그는 1963년부터 인내심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기어코 동베를린과 4가지 통과협정을 맺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서베를린 사람들이 마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당초 3만 건 정도를 예상했지만, 1963년 크리스마스에서 1964년 새해 연휴까지만 무려 120만 명의 서베를린 시민이 동독을 방문했던 것이다. 1965년부터 기민당의 아데나워도 연방 차원에서 연금 수령자인 동독 주민이 연간 100만 명씩 각자 100마르크 받고 4주간 서독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서 베를린 사이에 행하던 것을 전국적으로 확대 적용한 것이다. 교류하되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라는 국가 정체성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일찍이 1962년 10월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이 막 구축되던 바로 그 때에 공산주의의 허장성세를 꿰뚫어 보았다. 하버드대학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서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저는 공산주의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도 없으며, 상호공존에 대한 소련의 요구를 약세(弱勢)의 표현으로 파악합니다.”
1974년 빌리 브란트는 수상직에서 물러난다. 자신의 비서 기욤이 동독의 간첩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1972년 <극단주의자 파면법>의 부메랑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아니지만 자신의 비서가 동독 간첩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브란트는 책임지고 자리에서 깨끗이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당내 입지는 탄탄했다. 사민당 안의 라이벌 헬무트 슈미트에게 수상직은 물려주었지만, 당총재는 여전히 빌리 브란트였다. 기민당의 헬무트 콜 수상 시절에도 제1 야당의 총재는 여전히 브란트였다. 최종 학력이 고졸에 지나지 않았지만 7개 외국어를 구사하고 어떤 주제든 즉석에서 연설할 수 있었던 브란트였다. 그는 1964년에서 1987년까지 23년간 사민당 총재 자리를 지켰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기민당으로 정권이 바뀐 후에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브란트가 수상직에서 물러나던 1974년부터 독일 통일 2년 후인 1992년까지 외무장관으로 활약한 자민당의 디트리히 겐셔가 있었다. 현실적이었지만 낭만적이고 이상주의자적인 면도 간직했던 브란트는 핵무기라면 무조건 반대했지만, 냉철한 겐셔는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현존하는 소련의 SS-20에 대해 미국의 퍼싱2를 서독에 배치함으로써 소련이 자멸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겐셔와 콜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더욱 현실적으로 한 단계 발전시켰던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김대중과 노무현의 적극적 햇볕정책과 이명박의 소극적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편지 한 통 전화 한 통 남북간에 주고받지 못한다. 통일될 무렵 동서독은 전화는 1억 통 사람은 연간 1천만 명이 오갔지만, 한국은 그렇게 돈을 갖다 바치고 물자를 올려 보냈지만, 동물원식 상봉 쇼만 몇 번 있었을 뿐 이산가족이 단 한 쌍도 자유로이 오가지 못했다. 기껏 돌아온 것은 김대중 정부에선 연평해전 두 번, 동해 침투 1번, 장거리 미사일 발사 1번, 노무현 정부에선 미사일 발사 수십 건과 핵실험 1번, 이명박 정부에선 서해 도발 3번, 핵실험 1번, 장거리 미사일 발사 2번밖에 없다.
서독의 동방정책은 한 마디로 동독 인권운동이었다. 자유민주의 확장이었다. 모든 민간교류는 특히 친인척과 친구의 상호방문은 인권운동이다. 자유민주의 확장이다. 한국은 어떤가. 공수병 환자가 물만 보면 눈을 까뒤집으며 거품을 물듯이, 북한인권이라는 말만 들으면 눈을 부라리며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적대정책이요, 내정간섭이라며 새파랗게 발작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서독으로 말하면 사민당에 해당해야 할 민통당이 특히 그렇다. 서독으로 말하면 해체된 공산당에 해당할 통진당이 가장 심하다. 그들이 사갈시하는 미국은 2004년 북한인권법에 이어 <2012북한어린이복지법>까지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데, 그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한국은 아직 북한인권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서독은 기민당이든 사민당이든 기본법(Grundgesetz, 헌법)에 충실했다. 한국은 어떤가. 헌법을 ‘그 놈’이라고 부른 대통령이 영웅이 되는 나라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까.
(2013.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