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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
문둥병에 걸린 자가 구원 받는 것을 보면, 기독교의 기본 진리는 전혀 닿을 수 없어 보이는 곳에 결국 닿게 되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해 주는 것이다. 아무도 손대려고 하지 않던 더러운 상처를 예수님이 직접 만져주시는 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뭉클한 감동을 안겨 준다. -김중기의 [사랑의 실체] 중에서-
주님은 문둥병자의 육체적인 질병과 함께, 그 영혼에게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전염병에 걸릴까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정을 들어줄 리 만무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은 그의 환부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더러운 것을 더럽다 말하지 않고, 그 상처에 손을 얹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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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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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하여 한 몸이 되고 |
이름이 달라요. 조직도 달라요 역사도 다르죠. 하지만, 당신들은 캠퍼스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원하는 비전의 사람들. 한 마음이 되어주세요.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주세요. 당신들이 서로 사랑하면 당신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알게 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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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상동 우물네트워크 대표 기독이미지사이트 피콕 picok.co.kr 운영 기독묵상사이트 씨노트 cnote.kr 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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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눈꺼풀 - 욥 41:18-21 |
18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19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20 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21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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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리워야단 얘기입니다. 리워야단이 강렬한 눈빛으로 두려움을 발산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재채기를 하거나 물을 뿜어내면 그 물이 포말처럼 빛나면서 떠오르는 아침 햇빛에 반사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새벽의 눈꺼풀 빛>(18절) 같다고 했습니다. 실제 애굽의 상형문자에서는 여명을 리워야단의 눈빛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욥기를 불과 한 장 남겨두고 하나님이 이렇게 장황하게 리워야단을 말씀하시는 진정한 이유, 뭘까요?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10절)는 말씀을 거듭 주지하시기 위해섭니다.
입에서는 횃불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19절). 하나님께 대들거나 하나님과 논쟁하려 덤비는 자는 마치 리워야단과 겨루겠다며 나서는 무모한 사람과 꼭 같습니다. 리워야단은 입에서 횃불을 토하며 불꽃이 튀고 입김으로는 숯불을 지피며 불길을 연신 내뿜는데(21절) 하나님과의 논쟁은 마치 그런 리워야단과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의 리워야단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죄성, 그래서 자주 불신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반항하고 대적하려는 완고함이야말로 내 마음 속의 리워야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영성을 황폐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불평과 하나님 원망을 일삼도록 충동질하는 리워야단, 부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제해 주시길 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콧구멍에서는 연기 <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20절). 정말 무시무시한 묘사입니다. 아무리 봐도 바다 악어나 고래 같은 동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용이나 우리가 미처 모르는 바다 공룡 같습니다. 입에서 불을 뿜고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는 괴물,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물으십니다. <네 힘으로 저런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느냐? 네 능력으로 저런 바다 괴물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느냐?> 저런 바다 짐승을 창조할 수도 없고 다스릴 수도 없고 길들여 부릴 수도 없다면 너는 어째서 세상 만물의 주인 행세를 하며 이 피조세계의 진정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제대로 통제할 수도 없으면서, 바르게 제어하지도 못하면서 리워야단과도 같은 세상 힘을 가지려 하고 또 더 많이 갖지 못해 안달하며 아귀다툼을 벌이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협적이고도 압도적인 피조물 리워야단 앞에서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라는 주문이십니다. 단지 세상 만물에 속해 있을 뿐 만물을 창조하지도, 싸워 이길 힘도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을 더욱 정직하게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목덜미에서는 힘이 <그것의 힘은 거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 뿐이구나>(22절). 그렇습니다. 리워야단 앞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한계와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괴력과 위용을 보면 누구나 그 발이 땅에 얼어 붙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그대 앞에만 서면 왜 이리 작아지는가….> 리워야단의 무적의 힘 앞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무한한 왜소함과 절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욥 역시도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교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의롭다는 전제 하에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욥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리워야단 처럼 완전히 욥을 압도하는 권세와 위엄으로 그를 절망케 하며 완벽한 항복을 받아 내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온전한 복종과 겸허한 섬김과 신령한 예배만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더욱 깊숙이 허리를 굽히십시오.새로운 결단과 성찰로 박두한 성탄을 맞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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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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