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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회복
모든 믿음의 공동체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행하실 일에 언제나 새로운 기대를 거는 것이다. 서로를 이러저러한 사람으로 분류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형제들의 행동, 자매들의 성장에 대해 예언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속한 각 사람은 독특하다. 각자는 특별하게 사랑을 받는 자이며 독특하게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이다. -유진 피터슨의 [한 길 가는 순례자] 중에서-
주님은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위에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형제, 자매에 대하여 말하기보다 그들에 대한 따뜻한 기대감으로 나아갈 때 온전한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공동체의 완성은 완벽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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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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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소리가 들리는가 |
아프리카. 그 먼 곳으로 떠났다 굴곡진 역사로 상처받았던 남아공의 그 땅에서 이렇듯 멋진 자태를 뽐내는 나팔을 만났다. 주의 구원을 노래하던 나팔, 승리의 함성을 외치던 나팔, 주의 날을 알리던 나팔. 고요하기만데... 나팔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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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기환 필리핀 마닐라 거주, 선교사 한인 디아스포라 포럼(www.handifo.com) 상임총무 인터넷 라디오 방송 KCN 섬김이 되고 싶은 삶 - '다리놓는 사람', '유통하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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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자 - 욥 32:1-10 |
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7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8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9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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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과 세 친구 사이에 엘리후 라는 사람이 개입하여 중재하는 대목입니다. 엘리후는 인과응보론의 세 친구와 또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의 허물을 동시에 지적하며 참 지혜를 깨닫게 합니다. 확실히 욥의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접근은 세 친구들과는 달랐습니다. 세 친구는 범죄로 말미암아 고난이 왔다고 회개를 촉구한 반면 엘리후는 오히려 욥이 고난을 당하면서 교만한 태도로 인해 죄를 짓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엘리후의 분노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2-3절). 이제 무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세 친구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욥도 지쳐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중재자가 나설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부스 사람 엘리후입니다. 엘리후가 먼저 욥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욥에게 화를 낸 것은 그가 마치 자기의 명예가 하나님의 명예보다 더 소중하다는 듯, 자기에게 환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애쓰기보다 도리어 자기가 불의하기 때문에 환난을 당한다는 비난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데 훨씬 더 열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엘리후가 세 친구에게 화를 낸 건 그들이 욥을 위선자요 악인이라고 단정하면서도 그것을 입증하지도, 또 욥이 제시한 결백의 증거들을 반박하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욥을 정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후는 중재자로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양쪽 모두의 잘못과 실수들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엘리후의 겸손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6절). 엘리후는 젊은 사람이었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결코 건방지거나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긴 시간 욥과 친구들 사이에 오간 말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들었습니다. 엘리후의 겸양은 이렇듯 그가 연장자들이 하는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7절).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와 <전능자의 숨결>, 즉 성령이 주시는 감동과 깨달음을 외면할 수 없어 중재자로 나섰노라고 합니다(8절).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의 전입니다.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하시면서 그때그때 계시와 분별과 지혜와 감동과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럴 때 바르게 응답하고 결단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이고, 그런 다양한 성령의 역사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악에 다름 아닙니다. 엘리후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제 그 감동을 좇아 욥과 세 친구들 앞에 나서 그들을 중재하고 있습니다.
엘리후의 용기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10절). 그건 사실입니다. 어른이라고 항상 지혜로운 것은 아니고 노인이라고 항상 정의로운 것도 아닙니다(9절). 오히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2JW 4:13) 낫습니다. 엘리후는 담대하게 <내 말을 들으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자제가 필요하고, 분수와 염치도 가져야 합니다. 또 성급함이나 경박함, 잘난 체 하며 분별없이 나서는 짓도 가능한 삼가야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고, 성령이 감동하시고, 또 반드시 옳고 그름을 밝히고 양자를 중재하고 화해시키고 사태를 바르게 수습해야 할 상황이라면 단호하고도 권세 있게 <내 의견을 말하리라>며 발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디 엘리후에게서 배우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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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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