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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들기 쉬운 환상들
삶은 소유할 재산이나 움켜쥘 물건이라는 생각, 사람은 관리하거나 조종할 대상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일대 환상이다. 때로 우리는 세상사가 내 생각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려 한다. 그 환상이 얼마나 깊이 뱄는지 종종 꿈에도 나타날 정도다. 낮에는 정복하는 영웅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밤에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헨리 나우웬의 [춤추시는 하나님] 중에서-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함정은 자아실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이 때로는 자아실현의 이유로 진정한 주님의 뜻도 묻지 못한 채 그릇된 것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야망과 탐심을 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쉽게 말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의 삶을 추구하는 걸림돌은 사실 내 안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환상들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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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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넒어짐 |
그 넓은 곳에 서면 가슴이 트이고, 넉넉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한 사내의 시선 안에 넓은 초원이 담겨집니다. 십년의 사역기간동안 저는 얼마나 마음이 넓어진 걸까요. 광야에서 주님의 광활하심을 배우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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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왕충은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수료 2002년 ~ 2010년 몽골국제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2004년 이후 우우링슈드르쵸글랑(새벽이슬교회) 개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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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재앙이 두려워 - 욥 31:16-23 |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17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18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19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 20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21 만일 나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22 내 팔이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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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23절). 욥은 언제나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의식하며 산 사람입니다. 늘 범죄하거나 허튼 짓을 하여 하나님의 재앙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율법시대의 하나님 이미지는 공의의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두려우신 하나님 상이 맞습니다. 복음시대의 하나님 이미지가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과부를 실망케 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16절). 과부는 고와와 함께 유대사회의 소외계층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도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과 연민을 가지신다고 합니다.<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시도다>(시 146:9).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따라서 욥도 지금껏 과부로 하여금 자기로 인해 실망케 한 적이 없노라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부가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면 지체하지 않고 나서서 그에게 힘이 되어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재앙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부에 베푼 선의 이상의 큰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고아에게 아비처럼 하였다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17-18절). 고아에게 아비처럼 했다는 얘기는 고아들을 돌보며 키웠고, 그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교육까지도 책임적으로 수행하면서 그야말로 그 아이들의 아버지처럼 사랑과 관심을 베풀었다는 고백입니다. 마치 고아를 입양하여 사랑과 헌신으로 돌보며 훌륭히 키워낸 어떤 양부모처럼 욥은 그렇게 많은 고아들을 양육하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 심판이라도 당한다는 듯 최선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0, 45절)고 하셨습니다. 부디 욥처럼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 계층의 이웃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헐벗은 자를 못 본 체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 본 체했다면>(19절). 헐벗은 자를 보고도 외면하거나 아니면 입으로만 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가난한 자를 놀리는 짓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욥은 가난한 자에게 밤에 덮을 겉옷을 주었고, 양털로 짠 따뜻한 옷을 적선하며 자선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선행이 추호라도 사실과 다르다면 <내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22절)고 했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재앙이 두려워서> 고아나 과부, 헐벗은 자를 돌보는 일에 인색하거나 무정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는 자야말로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에서 배제당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런 신념으로 주위의 헐벗은 자 약자들을 돕고 대변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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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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