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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도, 백양사, 필암서원을 돌아보고

鶴山 徐 仁 2012. 5. 27. 17:40

홍도, 백양사, 필암서원을 돌아보고    2012/05/24 08:57 추천 1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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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자주 하는 성격이 아닌 것같다.

붙박이 기질 탓이다. 한 곳에 늘어붙으면 오래 오래 그곳에 머무르는 기질이다.

타고난 역마살 탓으로 정신없이 떠돌이삶을 사는 사람들도 흔히 있는 것같다.

 

잘 돌아다니지는 않지만, 어느 특징의 지역에 가고 싶은 마음을 오래 내면에 키우는데는 남못지 않은 것 같다. 독서를 자주 하는 탓이라고 말하는 도리밖에 없을 듯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전남 신안군의 홍도에는 한 번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젊었던 시절 대학의 선생으로 데뷰한 곳이 전남 광주이다. 거기에서 결혼을 하였고, 두 아들놈을 두었다. 그리고 전남대학 재직시절, 소설가로 데뷰하였다.

 

광주에 3년 반이나 살았으면서도 홍도에 가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실이 무슨 한처럼 내면 속에 쌓여있었던 것이다. 내가 왜 홍도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보지 못했을까...글쎄, 무슨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굳이 그 해답을 찾아본다면, 나는 어디 멀리 여행을 할 때 집사람과 같이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내가 데려가지 않으면 집사람은 거길 갈 기회를 영영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지례짐작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짐작은 나의 실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집사람은 나름대로 친구가 있고, 동창이 있으며, 직장인들이 있다. 나와의 동행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동행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집 사람은 시골 도시에 직장이 있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주말부부가 되어 버렸고, 그러니 주말에만 집에 오는 집사람을 데리고 먼 여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방학은 방학대로 하계강좌나 중등교사 연수같은 강의들이 차 있어서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기껏해야 동해안이나 서해안 해수욕장에 하루나 이틀 짬을 내어 가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생기고 유학을 떠나면서 나는 홍도 방문의 기회를 노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나의 내면에는 홍도에의 그리움이 쌓여갔다. 이러다가 정말 영영 가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생기기도 했다.목포에서 배를 타고 멀고 먼 뱃길을 가야한다는데...

그러다가 그저께 갑작스레 홍도을 방문하게 되었다. 동행이 있어서 나에게 설득을 하였다. 어쩌면 하루만에다녀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 멀고 먼 바닷길이라던데 하루만에 다녀오다니...나는 반신반의했다. 

용산 역에서 7시에 KTX를 타면 열시에 목포역에 내리고, 거기에서 11시에 배로 바꿔타면 오후 1시에 홍도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두 시간 섬을 돌아보고 3시 30분에 섬을 떠나는 마지막 배를 타면 목포에 5시 반에 도착하고, 시간 마다 있는 KTX를 타면 6시, 7시, 8시, 9시, 10시 어느 시간대에도 용산 역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새벽에 집에서 아주 가까운 용산 역으로 나가 목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 돌아올 것인데 무슨 준비같은 것은 불필요했다. 집사람에게는 떠난다는 전화도 하지 않았다.

 

세상은 너무나 바뀌어져 있었다. 내가 책상 앞에서 소설 쓴답시고 졸고 앉았던 사이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고속의 KTX와, 바다를 가르는 초고속 페리호등 나의 뇌리에 박혀 있던 홍도는 먼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부수고 있었던 것이다.

목포역 곁에 있는 목포 여객선 터미널도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어져 있어서 서비스가 그만이었다.

10시 55분에 목포역에 내려, 배 떠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가까이에 있는 목포역사문화관을 방문하였다. 일제시대 때, 호남평야 생산의 한국 쌀 약탈의 중심도시였던 목포에 남아 있는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사의 건물이다.아마도 목포에 남아 있는 일제의 유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속 페리호는 깨끗했고 시설들이 좋았다. 다만 여행객들이 너무나 많아 시끄러웠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무리지어 좋은 날씨에 홍도 여행에 나선 것이다. 나같은 게으름뱅이도 나섰는데, 이 좋은 날 집에서 세월을 썩힐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전부 홍도행으로 나온 것같은 착각을 일이킬 지경이었다. 

고속 페리호는 하루에 세번 홍도행으로 출항했다. 아침 7시 30분, 오후 1시, 오후 3시30분이었다. 우리가 예상했던대로 11시에 떠나는 배편은 취소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는 수없이 여객선 터미널 앞에 늘어서 있는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으면서 시간을 기다렸다.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면 오늘 섬을 떠나 귀경하는 스케쥴에 차질이 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3시 경에 섬이 닿았다. 시간을 알아보니 섬을 떠나는 마지막 배는 3시 30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섬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도리밖에 없었다. 

오후 섬내부를 돌아보는데 쓰고, 내일 아침에 유람선을 타고 섬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곤 섬을 떠나는 마지막 배를 타기로 했다. 홍도는 섬 내부는 볼 것이 없는 돌산이다. 유람선을 타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백미다.섬의 서편에 몽돌해변이라는 것이 있어서 조금 색다를 뿐 별다른 비경은 없었다.해변이 동글동글한 검은 색갈의 자갈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해변이었다.

 

해그름녘에 방파제에 늘어서 있는 해물먹거리판으로 나가 2만원 주고 해물 안주를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목포에 있는 보해양조에서 만드는 잎새주는 이 지역 최고 인기소주인데 19도 정도 되었다.보해의 최고 인기주는 역시 매실주이다.

안마시는 술을 마신 탓일까, 심하게 술에 취해 그만 숙소로 들어와 길게 뻗고 말았다.아침까지 정신없이 잤다.편안히 기차와 배를 타고 왔을 뿐이지만 역시 먼 거리를 이동한 탓이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서둘러 조반을 먹고 유람선을 타러 나갔다. 사람들이 부두에 줄을 서고 있었다.7시 반에에 유람선이 선착장을 떠났다.

한 두시간 정도 걸려 섬을 한바퀴 돌았다. 형형색색의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섬의 주변에 널려 있었다.비경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유람선이 꽤 오래 정박하기도 했는데, 그 틈에 어느새 횟감을 가득 실은 통동선들이 다가와 유람선 뱃전에 대놓고 회를 썰어 팔았다. 사람들은 횟감과 소주를 시켜 먹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야말로 유람선이었다.경치가 뛰어난 곳에서는 배가 잠시 멈추고 사진 찍을 시간을 주었다. 전문사진사들이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늙어지면 못노나니...하면서 구성진 옛 흘러간 노래를 부르는 아낙도 있었다.

 

배가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열시 반, 우리는 11시 배를 타고 섬을 떠났다. 배는 흑산도로 유람객들을 실어날랐다. 홍도는 작은 섬으로 흑산도의 하도였다. 흑산면 홍도리였다. 홍도에 거세게 파도가 치면 섬 사람 전부가 흑산도로 피난을 간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흑산도에서 내리지 않았다. 이 배를 그대로 타고 가면 열두시 경에 목포에 내리고, 상경길에 내가 홍도 못지 않게 내 영혼 속에 한가지 꿈으로 간직해 왔던 백양사에 들러볼 작정이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오나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남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유학자 하서 김인후의 사당에도 한 번 가볼 작정이었다. 백양사와 필암서원은 호남선 KTX의 상행선 상에 있는 장성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행은 반대했으나, 나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주었다. 가봤자 절간이고, 흔해빠진 서원일텐데 이 좋은 날 어디 갈 데가 없어서 그런 고리타분한 절간이나 서원으로 가느냐고 강력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포-용산 기차표를, 목포-장성, 장성- 용산으로 바꾸면 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여정은 바뀌었다. 나는 정말 간절히 이 두곳을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에 조용히 다시 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한번 가 버리면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이 서울사람들의 일상이다. 전남대학에서 선생노릇을 삼년 반이나 했던 내가, 이제서야 홍도에 가고 백양사에 가고 필암서원에 가고 있지 않는가. 광주-홍도, 광주-장성은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목포 장성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백양사와 필암서원을 보고와서 다음 차를 갈아타기까지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우리는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떼웠다. 그리고 백양사에서 한시간, 필암서원에서 20분의 대기 조건으로 5만원 주고 택시를 대절했다. 나는 무슨 수가 벌어져도 꼭 백양사에 가보고 싶었다. 서울 목포간의 KTX 비 보다 더 비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백양사는 절도 절이지만, 그 진입로가 유명하다. 그 길고 긴 전나무 진입로는 너무나 유명하다. 나는 이 길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책시를 타고 질주하는 도리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백양사의 정문 바로 왼편 호수 변에 있는 쌍계루가 너무나 유명하다. 거기에는 포은 정몽주의 시가 돌에 조각되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포은은 동시대인인 목은 이색의 시를 칭찬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고 이색이 왔더라면 백양사를 보고 더 좋은 시를 지었을 것이라고 적고 있었다. 나의 직계 조상이라 고개를 숙여 묵념을 올렸다.대웅전에 올라가,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속으로 되뇌면서 108번 대신에 18차례 절을 올렸다. 그리고 내딴에는 좀 큰 돈이라 할 수 있는 헌금을 했다.백양사 대웅전 바로 뒷편에 솟아있는 백암산의 정상이 너무나 웅장해 보였다.

백암산 백암사가 아니라, 백암산 백양사이다. 주지 스님의 독경소리에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져 인간으로 환신한 흰 색갈의 양 한마리가 절 앞에 죽어 있었다는 전설 탓이라고 한다.과연 낭랑한 목소리의 독경소리가 하도 감동적이라 몇 차례나 저 독경소리의 테이프나 CD판이 없느냐고 물었으나, 절품되었다는 것이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하서는, 호남 출신 유학자로는 독보적인 존재로서, 문묘(공자사당)에 배향된 조선 18성인 중 한 사람으로서 호남출신으로는 유일한 유학자이다. 하서는 조선 12대 왕으로서 재위 8개월만에 후사없이 타계한 인종 조의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하서는 안동의 퇴계나 파주의 율곡이나 호서의 우암(송시열)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호남의 거유이다.

과연 필암서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고, 유물전시관도 상당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전문요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호남인들이 자신의 땅에서 난 대 유학자들을 잘 돌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찾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비는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소수서원 생각이 났다.하서학술재단에서 기증한 약 3000 여점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중 특히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노비보가 눈길을 끌었다.

필암서원의 뒷뜰에는 통곡대라는 바위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모셨던 인종이 서거한 날이 되면, 정치를 버리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유학을 연구하던 하서가 이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면서 통곡했다는 사실에서 통곡대로 칭명되었다고 한다.하서는 인종 재위시 홍문관 부수찬까지 올랐으나, 인종 서거후, 대윤과 소윤의 당파싸움에 밀려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소윤의 대윤에 대한 필사의 복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을사사화 시에, 인종의 총애를 받았던 서하로서는 인종의 외삼촌인 대윤의 거두 윤임의 파라고 할 수 있다. 인종이 후사없이 재위 8개월만에 죽자, 중중의 두째 아들이 왕이 되어 명종이 되었고, 너무 어려서 어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였는데, 오빠 윤원형이 정권을 잡아 소윤의 거두로서 대윤에 대한 철저한 복수전에 나선 것이다.무슨 죄가 있어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당쟁이었다.

그러나 서하는, 인종이 죽자말자 깨끗이 벼슬에의 야망을 버리고, 고향 장성으로 귀향했으며, 그의 직책이 홍문관 부수찬으로서 종6품 직이었기에 정치적인 거물이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홍문관의 성격상 인종의 세자시절 경연을 맡은 경연관이었기에 인종의 즉위 후 잠시나마 총애를 받았으나, 그의 적절한 귀향은 그의 목숨을 구하는데 확실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7시경에 용산역에 닿았다. 하룻밤을 지새고 왔을 뿐인데, 몇주일간 멀고 먼 시간여행을 하고 난 기분이었다. 일행은 부대찌개를 시켜 허기를 풀었다. 정신없이 뛰는라 점심과 저녁을 삼각깁밥 등으로 떼워 허기가 왔다. 소성이와 어디 같이 가면 이건 도무지 놀러가는 여행인지 학술답사여행인지가 분간이 안되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면서 투덜거리는 일행도 있었다. 

일행과 헤어져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고 있는 나의 머릿 속에는 어느 틈엔가, 홍도는 아득히 멀어져 버렸고, 백양사의 그 길고 긴 진입로와 쌍계루의 포은 시비 그리고 필암서원 뒷뜰의 통곡대만이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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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서 김인후를 재향하는 장성 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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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여객선 터미널에서 홍도로 떠나는 쾌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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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도의 항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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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도의 비경중 으뜸으로 치는 코끼리 바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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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형제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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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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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사 쌍계루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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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오신날을 준비중인 백양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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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암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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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계루 역사와 정몽주의 시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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