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스크랩] 항우(項羽)와 카다피

鶴山 徐 仁 2011. 10. 28. 09:02




항우(項羽)와 카다피

  리비아 전황을 다룬 소식이 한동안 잠잠하더니, 카다피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날마다 국내에 전해지고 있다. 한 나라를 수십 년 동안 철권 통치하던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접하고 보니 ‘그래도 정의는 살아있다’는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일시적으로 독재와 부정이 세상을 지배할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자유와 정의가 승리한다는 통쾌한 결말은 새삼스럽게 역사의 진보를 느끼게 만든다. 리비아 국민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저 먼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우리의 현실과 역사에서도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 그것이 역사의 장엄함이다.

  그런데 카다피 한 개인의 종말에 시선을 돌려보면, 그의 죽음이 비장하게 다가오지 않고 우스개거리 골계담처럼 느껴진다. 하수구에 숨어 있다가 개처럼 끌려나와 병사들에게 얻어맞고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이 한때 막강한 권력을 쥐었던 독재자의 최후로는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추악한 독재자일망정 서방세계에 그렇게 기세 좋게 독설을 퍼붓던 강력한 이미지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차라리 미리 시민군에 항복하든지 아니면 호위 병사들처럼 싸우다 죽든지 하면 그나마 ‘기개 있다’는 이미지를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썩은 음식을 주워 먹으며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다가 비참하게 죽음으로써 생전의 이미지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그런데 어쩌면 그 비굴한 모습이 그의 본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카다피 뿐만이 아니라 권력자나 지도자의 실제 본모습은 대부분 그럴지도 모른다.

  진실 여부야 어떻든 카다피의 최후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엉뚱하게도 유방(劉邦)과 더불어 중국 천하를 놓고 다투던 항우(項羽)의 죽음이 떠올랐다.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항상 즐겨 읽는 <항우본기>에 묘사된 비극적 영웅의 최후와 겹쳐졌기 때문이다. 항우와 카다피를 연결시키는 것이 언뜻 어울리지는 않지만 막강한 권력자의 비참한 최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은 비슷하다.

  항우는 진나라 혼란기에 봉기하여 천하를 거의 거머쥐었다가 유방에게 패해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되었다. 23세에 봉기하여 8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결정적인 순간을 잘 이겨냈다면 중국을 차지했을지도 모를 가장 강한 군대를 가졌었다. 그러나 노회한 유방에게 쫓겨 결국 해하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항우는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서도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았다. “내가 군사를 일으켜 이제 8년째다. 칠십여 번을 싸워 맞선 자는 격파했고, 공격한 자는 굴복시켜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어 드디어 천하를 제패하여 차지했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서 끝내 곤경에 처하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일 뿐 전투를 잘하지 못한 잘못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패배는 전투의 실패가 아니라 하늘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없애려 했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몰락을 앞두고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으니,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동양인의 인생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태도를 가졌다고 하겠다. 그런 그는 마침내 운명에 맞서다 자살하고 그의 시신은 몇 조각으로 찢겼다.

  나는 항우의 종말을 서양의 비극에 등장하는 비극적 영웅의 종말과 견주어보면서 영웅적 최후의 전형이라고 생각해왔다. 그 비극적 정서는 대단히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장면으로 기억할 만하다. 그런데 카다피의 최후를 보면서, 영웅적 최후를 맞이한 항우의 종말도 실제로는 카다피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우의 삶을 후세에 전한 역사가 사마천이 그의 최후를 지나치게 비장하게 묘사해서 후세 사람들이 왜곡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사기》에 묘사된 것과 달리 최후를 맞이한 항우가 분노에 차서 휘하 군사를 마구 죽이고, 술에 취해 구토하고 울고불고 하는 온갖 추태를 벌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마천은 항우의 많은 행동 가운데 영웅에 어울리는 것만을 취해 묘사함으로써, 천하를 잃은 항우를 비극적 영웅으로 새롭게 탄생시키려 했다. 사마천이 묘사한 최후의 장면만 없다면 항우에게서 현재 우리가 느끼는 영웅적 모습이 그렇게까지 강렬하게 부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사마천이 항우의 시시콜콜한 마지막 행동을 다 묘사해 놓았다면 그는 비범한 영웅이 아니라 형편없고 비굴한 장군쯤으로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기》에 묘사된 항우의 평상시 행동 중에는, 무소불위의 제왕이 되기를 탐하던 폭군에다 지략이 없이 힘만 믿고 살육을 자행하던 무자비한 장군에 불과한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주로 전쟁에서 진 패자에게 동정적 시선을 담아 묘사하는 태도를 가졌다. 비분강개하기를 잘했고, 자기에게 닥친 불운과 강개한 심경을 곧잘 역사상의 인물에 투영했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에 대해 ‘과연 세상에 진정 하늘의 도가 존재하느냐?’며 비장하게 논설을 펼쳤는데 그 논설에도 사마천이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심경이 투영되어 있다. 유방과 천하를 다투다 장렬하게 사라진 항우를 그렇게까지 비극적인 영웅으로 만든 것은 바로 사마천일지도 모른다. 항우의 최후가 과연 그토록 영웅다웠을까? 오히려 영웅답기는커녕, ‘저런 위인이 어떻게 한때나마 세상의 영웅들과 천하를 다투었을까?’ 하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처신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항우의 행위와 그에 대한 평가 기준을 사마천의 기록에 기댈 수밖에 없으므로 이 모든 것이 추정에 불과하기는 하다.

  현대 사회는 정보가 제한 없이 공개된다. 따라서 카다피의 죽음에 얽힌 사실도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려져 비밀에 부쳐질 부분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수십 년 사이에는 비굴하고 우스꽝스러운 그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연민을 자아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 년 이백 년 지나고 모든 시시콜콜한 사료가 사라진 뒤에 어느 순간 그의 죽음이 미화되어 카다피가 비극적 영웅으로 재탄생되는 역사의 희극이 재현되지 말란 법도 없다. 리비아의 역사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면 그런 임무를 맡을 역사가는 망설이지 않고 사료를 취사선택하리라.

  대개 대중의 앞에 나서는 지도자는 살아있을 때도 그가 지닌 본모습에 비해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는 일이 많다. 실제로는 탐욕스럽고 쩨쩨하고 정의롭지 못한 데도 불구하고 언론에는 그 반대로 묘사되고 선전되기 쉽다. 그러니 그가 죽은 뒤에 그에 관한 한두 가지 사실에 기대어 그를 과대 포장하는 일이 또 얼마나 많겠는가?

 
 
안대회 글쓴이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벽광나치오』, 『고전 산문 산책』
    •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 『선비답게 산다는 것』
    • 『정조의 비밀편지』,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등
    • 역서
      • 『추재기이』, 『산수간에 집을 짓고』, 『한서열전』
      • 『북학의』, 『궁핍한 날의 벗』 등
출처 : 碧波 藝術村
글쓴이 : 촌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