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송희영 논설주간
외환위기 책임자들을 고스란히 핵심으로 기용 이렇게 뽑기도 힘들 것
대통령, 다른 의견 들을 기회가 있겠나
이건 완벽한 패자 부활극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트리오는 환율과 외환보유고 관리를 담당했었다. 강만수 청와대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은 재정경제원 차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담당 차관보, 김석동 신임 금융위원장은 담당 과장이었다.IMF 트리오는 타고난 검투사인 양 싸웠다. "펀더멘털(경제의 기초체력)은 튼튼하다"고 우겼고, 핫머니 공세에서 한국을 지키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트리오의 무모했던 항전(抗戰)은 처참하게 끝났다. 우리 경제가 그때 받았던 충격은 국부(國富) 20~30%가 허공으로 날아갔다는 피투성이 결산서로 요약된다.
미련없이 내팽개쳐도 괜찮을 인물을 이 자리 저 자리로 재활용하기 좋아하는 정권이다. 그렇더라도 하필 '그때 그 팀'을 고스란히 재등용한 이유가 뭘까. 출중한 재능이 아까워서 그랬을까, 다른 인재를 못 찾아 어쩔 수 없이 낙점했을까.
폐품을 재활용할 때는 리사이클공장을 거치면서 다른 상품으로 바뀐다. 품종 전환이 안 되면 과거의 흔적을 깔끔히 지우고 정화(淨化)필터를 거쳐 내보내는 것이 소비자에 대한 의무다. 하지만 트리오 중 나중에라도 리사이클 공정(工程)을 제대로 거친 사람은 윤증현 장관뿐이다. 2008년 2차 외환위기 이후 장관직에 올라 경제를 안정시키고 G20 행사를 잘 마무리했다는 평가다. 이번에 물러났더라면 패배자 낙인을 떼고 공직자로서 흑자 인생을 결산했을 것이다.
반면 강만수 위원장은 1차에 이어 2차 외환위기까지 정책실패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이 정권에서 경제정책 총수로 재등판했다가 잇단 고환율 발언으로 시장 신뢰를 잃었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물러났다.
강 위원장의 재활용 실패가 김석동 위원장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금융계에서는 완력을 휘둘러 쥐락펴락할 것이라는 걱정과 '그 성격 어디 가겠나'는 냉소가 파다하다. 김 위원장은 1차 외환위기 때도 시장 흐름과 맞지 않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달러 부족 사태가 일어나자 여행객 환전을 제한하는 조치부터 취했다. 미사일 공격에 단칼로 맞서는 응전(應戰)이었다.
차관보 시절에는 종합부동산세를 강화하고 강력한 부동산 투기 억제책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노무현 정권의 특정 계층을 향한 세금폭탄을 제조한 핵심 기술자로 꼽혔다. 현안 대책을 만드는 과정에 자주 참여한 인연으로 '대책반장'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나, 그것이 성공의 대책반장이었는지, 실패의 대책반장이었는지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 위원장은 일찌감치 도박을 시작했다. 부실 저축은행을 대형 금융지주회사에 떠안기는 공작에 돌입했다. 골칫거리 해결사로서 결단력과 노회한 관료로서 소신을 뽐내는 조치처럼 보인다.
월스트리트의 기라성 같은 금융회사들도 부동산 대출 늘리기 경쟁을 하다가 멍들어 금융위기를 조장했다. 국내 저축은행들이 부동산 투기로 대박을 노리다가 실패하기는 리먼 브러더스와 똑같다.
대형 은행에 골병든 저축은행을 떠넘기는 작업은 보석 상자 안에 수류탄을 내장(內藏)하는 위험한 짓이다. 이 정권은 이미 부실 저축은행 몇 개를 멀쩡한 저축은행에 떠맡겼다가 그들까지 덩달아 부실 덩어리로 만든 실패를 맛봤다. 회사가 부실해졌으면 망하게 둬야 하건만 쓴맛 보고서도 정신을 못 차렸다. 위기 때 한꺼번에 정리하면 충격이 오지만 지금처럼 경기가 좋을 때를 도살처분 기회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
IMF 트리오와 함께 떠오른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도 마피아 조직을 닮았다는 구(舊) 재무부 출신이다. 최 장관은 기획재정부 차관 시절 강만수 장관의 고환율 정책에 앞장서며 2차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데 힘을 보탠 명콤비다. 당시 한국은행에서는 최 장관의 강압에 시달린 끝에 "도저히 함께 일할 수 없다"는 불만을 터뜨렸다. 그 여파로 필리핀 주재 대사로 피신했던 그는 작년에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복귀했다.
이 정권은 외환위기 책임에서 도망칠 수 없는 인물 4명을 경제팀 핵심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이런 인물만을 골라 내 하나의 팀에 동시에 집어넣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재무부 과장까지 지냈던 임태희 비서실장까지 포함하면 경제정책 결정에 한솥밥 식구들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이런 단선(單線) 인맥은 대통령에게서 다른 의견을 들을 기회를 빼앗고 있다. 큰 정책 방향을 조정하지 않은 채 요금인상 동결, 설 물가 단속 같은 군사독재 시절의 낡은 행정에 몰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