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 조선의 법궁 17. 동궁전 구역
동궁마마...
역사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 얼마나 자주 듣던 이름인가?
정궁의 동쪽은 태양이 솟아 오르는 곳...
나라의 미래가 빛과 함께 자라는 곳이다.
그러니 나라의 장래의 주인인 왕세자가 머물던 곳이고 그곳을 동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복궁의 동궁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1999년 뒤늦게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였던 자선당과 비현각과 주위의 행각만 복원되었다.
자선당의 해체에서 복원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한없는 비분과 강개를 느끼게 된다.
나라가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경복궁이 대원군에 의하여 중건될 당시, 건물의 수가 330여개 동...
전체 전각의 약 10분의 9는 일제에 의해 뜯겨나가고 없어지고 결국 30여 동만이 남았었다.
대한제국을 병탄한 이후 일본의 대 한반도 정책은 오로지 한민족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신사참배 등 후기에 나온 정책들이
지구상에서 우리 한민족을 아예 없애겠다는 것었다면
초기의 것은 인적인 면으로 대한제국 황실과 구체제의 파괴와
물적인 면으로는 조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궁궐의 파괴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1915년 이른 바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미명하에 개최한 박람회의 장소를 경복궁으로 정하고
치밀한 계획하에 경복궁을 훼철하기 시작했다.
궁궐의 전각들을 없앤 그 자리에 박람회 전시관을 세우고 궁궐 전각들을 전시관과 관리사무소로 쓰는 등
대한제국 황실의 존엄성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려고 했던 것이다.
동궁전인 자선당도 이로 인하여 해체되는 비극을 맞게 된다.
1914년 일본 오쿠라 재벌의 창립자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자선당을 통째로 사서 건물을 분해, 도쿄로 옮겨놓고 자신의 집터에 1909년에 설립한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으로 옮겨서
복원해 놓고 '조선관'이라고 명명, 1917년에 미술관으로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현재의 오쿠라호텔의 자리이다.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 자선당 건물은 모두 불타버리고 기단,계단석 등 유구만 남았다.
자선당의 유구는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에 의해 오쿠라 호텔 주위에서 발견되었고
삼성문화재단에 의해 약 8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 온 것이다.
돌아온 자선당의 유구를 이용해서 자선당을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화재등으로 약화된 재질때문에
복원에 쓰이지 못하고 지금은 건청궁 옆 녹산에 옮겨져 있다.
동궁전의 복원은 1999년에 이루어져 자선당, 비현각등의 전각과 행각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복원된 자선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39평의 크지는 않지만 단아한 전각이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보면...
' 자선당은 동궁(東宮) 건물의 일부로서 세자가 거처하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공부하던 곳이다.
북궐도(北闕圖)에 의하면 동궁은 세자가 백관으로부터 조회를 받던 정당(正堂)인 계조당(繼照堂),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 쓰인 내당(內堂)인 자선당과 비현각,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하던 춘방(春坊, 世子詩講院),
세자를 호위하는 군사가 머물던 계방(桂坊)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궁의 건물들은 일제 강점기에 모두 파괴되었고, 1999년에 자선당과 비현각만 복원되었다.
자선당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긴 집채인 행각은 세자의 시중을 드는 상궁과 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방과 큰 마루, 부엌, 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 되어 있다.
자선당(資善堂)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이다.
중간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동쪽의 방이 세자의 거처이고
서쪽의 방이 세자빈의 거처이다.
자선당 배치도
자선당 세자의 방.
자선당 - 세자빈의 방.
삼비문 - 임금의 편전인 사정전쪽에서 자선당의 중광문 바깥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중광문 - 자선당 바깥 회랑의 출입문이다.
진화문에서 뒤돌아 본 중광문.
진화문 - 중과문을 들어서서 자선당으로 들어가는 남쪽 출입문이다.
자선당 행각
서쪽 행각 뒤로 보이는 근정전...
자선당 동쪽 행각및 남쪽 행각
자선당 뒷편.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자선당 뒷편에서 본 자경전...
자선당 북(뒷)쪽 외곽
비현각(丕顯閣)
자선당이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이라면
비현각은 세자의 편전이다.
스승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장래의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연마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비현각 역시 자선당과 마찬가지로 1915년 이른 바 '조선물산공진회'의 장소로 제공되기 위하여 철거,
1999년 자선당과 함께 복원된다.
이모문 - 비현각 바깥 회랑 출입문
안에서 본 이모문.
구현문 - 비현각의 동쪽 출입문이다
이극문 - 비현각의 바깥 마당의 동쪽 출입문...
그런데 자선당과 비현각 사이에는 재미있는 구조의 공간이 있다.
측간이 바로 그것인데 길위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다..
행각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자선당과 비현각.-동궁전이다.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하던 춘방(春坊, 世子詩講院),
세자를 호위하는 군사가 머물던 계방(桂坊)은 아직 복원되지 못한 상태이다.
다음 블로그 '옛정자 그늘.'
http://blog.daum.net/oldpavilion
파빌리언
스크랩만 허용합니다.
'대한민국 探訪'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태백산의초겨울 (0) | 2010.12.05 |
---|---|
색스폰 연주 (0) | 2010.12.05 |
[스크랩] 산굼부리 억새밭, 마르형 대분화구 (0) | 2010.11.29 |
포항 호미곶 (0) | 2010.11.26 |
따라비 오름(산봉우리의 제주방언). (0) | 2010.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