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만에 열린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 후계구도가 공식화됨에 따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김정은에게로 넘어가는 권력 승계가 빠르게 가시화될 전망이다.
김 위원장의 경우 1974년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고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1998년 자신의 통치체제를 공식 출범시키기까지 무려 24년이 걸렸다.
반면 김정은은 작년 1월 내정 이후 불과 1년8개월여만에 후계자 지위를 대내외에 천명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의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권력을 천천히 물려받는 여유는 생각할 수 없는 처지다.
그래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정은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국내 통치권을 빠른 속도로 넘겨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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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김정은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이 사진은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당 중앙기관 성원 및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 참가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있는 장면이다. 김 부위원장의 성년사진은 처음 공개됐으며 정확한 촬영일시는 밝히지 않았다. 연합뉴스 |
문제는 그 속도다.
김 위원장의 건강이 좋지 않다 해서 후계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한 27세의 김정은한테 권력을 너무 빨리 넘겨줬다가는 여러가지 ‘탈’이 생길 것이 뻔하다.
김정은의 대리 통치가 제대로 작동할지도 의문이고,일반 주민들은 물론 각 분야 엘리트나 전문 관료들의 불만을 자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정은 후계체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국가안전보위부나 인민보안부 같은 공안기관을 동원해 주민들을 강하게 통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정은의 고모부(김 위원장의 매제) 장성택(국방위 부위원장 겸 당 행정부장)을 김정은의 ‘후견인’로 주목하는 것도 그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양대 공안기관인 보위부와 보안부가 바로 장성택이 맡고 있는 당 행정부장 관할인 것이다.
설사 어린 나이에 ‘3대세습’ 통치자로 나선 김정은한테 주민들이 불만을 품더라도 장성택이 공안을 틀어쥐고 있는 한 동요가 표면화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또 다른 문제는 김정은의 허약한 카리스마로 엘리트 계층을 끌어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북한 사회의 특성상 일반 주민들이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봉기’할 가능성은 낮지만,지배계층에서 반발 세력이 생겨 군이나 주민들을 자극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고 김일성 주석이 권력을 장악할 때는 물론이고 김정일 위원장한테 넘겨지는 과정에서도 흔히 말하는 ‘숙청 바람’이 한바탕 북한 권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김 위원장의 경우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되고 바로 그 이듬해에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삼촌 김영주 등 이른바 ‘곁가지’를 철저히 제거했다.향후 자신의 후계지위를 흔들 가능성이 있는 세력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낸 셈이다.
이처럼 김 위원장 때까지는 후계 구축과정이 ‘정당성 확보 및 주민 세뇌’와 ‘숙청을 통한 권력기반 강화’의 투 트랙으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김정은과 주변의 ‘후견세력’이 서둘러 숙청의 칼을 휘두를 것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으며,그 이유로는 우선 김정은의 권력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이 꼽힌다.
김정일 위원장의 경우 후계자 내정 전해인 1973년부터 당 비서국의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와 당 선전선동부장을 맡아 인사권을 휘두르면서 자기 세력을 다질 수 있었고,김성애와 김평일을 숙청한 1975년에는 이미 실질적인 ‘2인자’였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반면 김정은은 이번에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올라 군사 분야의 ‘2인자’가 됐다고는 하지만 북한의 권력시스템 전반에 통하는 실질적 ‘2인자’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고위층 탈북자는 “권력승계기를 전후해 한바탕 숙청 바람이 불곤 했던 북한 체제의 속성상 김정은이 아버지로부터 당권과 인사권을 넘겨받으면 숙청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지금처럼 김정은에게 권력이 다 넘어온 것도 아닌 상황에서 섣불리 숙청에 손을 댔다가는 엄청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김 위원장이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아버지 중심의 ‘구세력’과 아들 중심의 ‘신세력’ 사이에 갈등이 불거질 상황은 아직 아니라는 분석도 나온다.
외견상 김 위원장 체제의 핵심 세력이 상당 부분 김정은 후계구도로 넘어와 있는 터라 당장 권력 다툼이 벌어질 개연성도 낮다는 것이다.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은 “지금은 김정일 체제와 후계 체제의 핵심 세력이 거의 같기 때문에 누가 누굴 치고 그럴 상황이 아니다”면서 “또 김정은의 후계자 위상이 확실하기 때문에 후계구축 과정에서 숙청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김정은의 경우 후계 위협세력을 자르기 위해 칼을 빼들 필요도 없다는 지적이다.왜냐하면 장남인 이복형 김정남은 김정일 위원장의 눈밖에 나 마카오 등에서 떠도는 처지고,동복(同腹) 형 김정철도 후계 경쟁에선 일찌감치 탈락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처럼 살벌한 ‘피의 숙청’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권력구도가 짜여져 가는 과정에서 엘리트들 간의 경쟁과 견제로 고위층의 ‘인적재편’이 수시로 이뤄질 가능성은 살아 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아울러 아직 20대 후반에 불과한 김정은의 후계자 카리스마가 엘리트 계층에 잘 먹혀들지 않을 경우 장성택이나 그의 아내 김경희(김정은 고모) 같은 ‘후견세력’이 앞장서 기강잡기에 나설 개연성도 있다는 지적이다.아예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엘리트들을 긴장시키기 위해 수시로 ‘시범 케이스’를 잘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김정은 체제가 자리를 잡기까지 크고 작은 ‘물갈이’가 간헐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 과정에서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이후 1998년 ‘김정일체제’가 출범하기 전까지 벌어졌던 북한 고위급 인사들의 ‘탈북 러시’가 재연될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