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②

鶴山 徐 仁 2009. 10. 26. 09:22

 
   
   
  서정후 님께 드립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②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 역에서 겨레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여순 감옥으로 옮겨져 5개월 후에 사형 당하였다. 그는 1910년 2월 12일 여순지방법원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자신의 거사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다음같이 진술하였다.
 
“나는 이토가 한일 두 나라의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지, 결코 자객으로서 그를 살해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일심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항소를 포기하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그는 일본 당국에 그의 저술이 끝날 때까지 사형집행을 미루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일본 당국은 서둘러 형을 집행하였기에 그의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당시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이룬다는 간판을 걸고는 조선과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던 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의 구성을 살펴보면 유럽공동체보다 70년이나 앞선 탁월한 평화공동체 구상이라 평가된다. 그리고 요즘 논의가 일고 있는 한중일 FTA(자유무역협정) 구상이 100년 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구성과 닮은 점이 많다는 점에서 그의 경륜이 얼마나 탁월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동양평화론 구상의 알맹이는 다음 같다.
1) 한중일 3국의 중심지가 되는 여순을 중심지로 삼고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2) 한중일 삼국의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한다.
3) 한중일 3국 공동의 군대를 창설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4) 한국과 청국은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안중근보다 100년 뒤에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안중근 선배가 품었던 겨레사랑 동포사랑의 정신을 되새기며 겨레의 번영과 아세아의 평화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마음과 뜻을 모았으면 하는 마음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