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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투병 여고생 "반(潘) 총장 만났으니 외교관 꿈 이뤄야죠"

鶴山 徐 仁 2009. 8. 27. 09:05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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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암(癌)투병 여고생 "반(潘) 총장 만났으니 외교관 꿈 이뤄야죠"

최근 휴가차 서울을 찾은 반기문(65) 유엔 사무총장과 유순택(65) 여사 부부는 이명박 대통령, 현인택 통일부 장관 등 주요인사들을 만나느라 휴가 중에도 쉴 새가 없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반 총장 부부가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인 10일 오후 반 총장 부부는 주위에 비밀로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를 찾았다. 반 총장은 수행진에게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이곳을 찾았다는 것을 알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반 총장이 국립암센터를 찾은 것은 생면부지 10대 소녀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이날 반 총장 부부는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권나영(18·서울 양천구 금옥여고 3년 휴학중)양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장래희망이 외교관인 권양이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했다. 권양은 "평소 나의 '우상'이나 다름없던 분을 봬서 너무 떨렸다"고 했다.

"겉으론 담담한 표정을 했어요. 속으로는 '이건 현실이 아니야. 꿈이다'라고 계속 되뇌면서 흥분을 가라앉혔어요."

지난 10일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권나영(18)양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부인 유순택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암 투병 중인 권양은 “반 총장을 만난 것은 기적”이라며 “병도 이겨내고 장래희망인 외교관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제공
권양은 고3이던 지난해 6월, 학교에서 단체로 결핵검사를 받다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됐다. "X레이 사진을 보니 폐가 좀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찾아갔다가, 허벅지에 생긴 암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폐까지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근육, 혈관, 림프관 등에 주로 생기는 '폐포성 연부조직육종'이었다. 어머니 한순임(47)씨는 "아이가 고1 때부터 자주 허벅지가 부었는데, 근육통인 줄만 알았다"고 했다.

권양은 마지막 한 학기를 남긴 채 휴학계를 내고 국립암센터에 들어가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올 초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이사장 황우진· www.wish.or.kr)에 "반기문 총장을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전했다. 이 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둔 메이크어위시재단(www.wish.org)의 한국 지부다. 난치병에 걸린 전세계 어린이·청소년 환자의 꿈을 이뤄주는 단체다.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은 권양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지난 4월부터 여러 차례 메이크어위시재단 본부와 유엔에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 반 총장과 권양의 만남을 주선했다. 지난 6월, 재단은 반 총장 부부의 비서들을 통해 "일정이 빡빡하지만 30분간 시간을 내겠다"는 의견을 받았다. 기자들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권양은 이날 반 총장을 만나 지금까지 궁금했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유엔 총장이 되고 난 후 달라진 게 뭔지, 외교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반 총장은 권양에게 유엔 마크가 찍힌 은색 보석함을 선물로 줬다. 권양은 반 총장이 방문하기 사흘 전부터 밤마다 오전 2시까지 병상에서 만든 한지 공예품을 액자에 담아 반 총장에게 선물했다. 반 총장을 위해 국립의료원에 비치된 피아노로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오는 탱고 명곡 '간발의 차이(Por una cabeza)'를 직접 연주했다. 권양이 평소 병상에서 즐겨 듣는 곡이다.

권양과 반 총장의 만남은 예정시간(30분)을 넘겨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지켜보던 어머니는 반 총장을 만난 지 10분도 안 돼 눈물을 쏟기 시작했지만, 권양은 내내 의연했다. 그는 "눈물이 눈 아래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렀다"고 했다.

권양은 "반 총장을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신청하긴 했지만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반 총장이 한국에 언제 올지도 모르고, 한국에 와도 바빠서 시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 총장이 시간을 내준다고 해도, 자신이 중환자실에 있느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다.

실제로 권양은 반 총장이 찾아오기 1주일 전, 몸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손에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주삿바늘을 꽂은 채 치료를 받았다. 권양은 "너무 힘들어서 주삿바늘을 다 뽑아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고 했다.

"항암치료로 몸무게가 12㎏ 줄고 머리칼도 많이 빠졌어요. 거울을 보면 외모가 전과 너무 다르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병을 이겨 낼 수나 있을까' 싶었지요. 병상에서도 내내 영어책을 봤는데, 책을 손에서 놔버렸어요."

1년 넘게 무남독녀의 병수발을 해온 어머니 한씨는 "반 총장이 다녀간 뒤 딸이 부쩍 기운이 나는 것 같다"고 했다. 권양은 다시 영어책을 펼쳤다. 권양은 "언젠가 꼭 외교관이 되고 싶다"며 "영어 공부도 다시 하고, 지난해까지 배웠던 중국어도 다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했다.

권양은 요즘 오전에는 피아노 연습을 하고, 해가 지면 책을 읽는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줄곧 반장을 했던 그는 암에 걸리기 전까지 반에서 3등 안에 들 만큼 성적이 좋았다.

권양은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반 총장을 기적처럼 만났다"며 "병을 이겨내고, 외교관의 꿈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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