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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0년만의 모교(초등학교) 방문

鶴山 徐 仁 2009. 8. 23. 12:27

50 여년만의 모교방문

 

2007년이던가 나는 영천군 화북(자천)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신녕으로 갔다.

산간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30년이 되는 해라서, 아버님의 옛 임지들을 찾아보기 위해 서울을 떠났던 것이다. 아버님에의 그리움 탓이리라.

우리 44회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가 6.25가 한창이던 1951년이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대구 함락(국가붕괴)을 막은 국군 일 사단이 우리 신녕에 잠시 주둔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시절이었다.

당시 아버님은 경찰 지리산 공비토벌대에 소속되어 있었고, 보현산 전투에 참여하시다가 임지가 영천군 자천(화북)에서 영천군 신녕으로 바뀌어 신녕 지서의 주임으로 재직하시고 있었다.

우리가 재학할 당시에는 전선이 낙동강에서 38선으로 올라가 있어서 나라가 전쟁 중이었으나 철없는 우리는 위기감도 없이 재잘거리며 학교를 다녔다.

까마득한 세월의 안개 속에서 가물거리는 신녕의 모습을 그리며 찾아든 나그네의 눈에 신녕의 모습은 너무나 변해 있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의 신녕의 중심은 도시의 북쪽에 있었다. 거기에는 장터가 있었고 꽤 넓은 북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거리에 국밥집이 있었고, 그 집이 같은 반의 여학생의 집이었다.

성씨도 이름도 다 잊어버렸지만 그 여학생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아름다운 소녀의 영상으로 남아 있다.

이어서 나는 서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억 속에는 안개 자욱한 그렇게도 큰 강이었고 거대한 다리였었는데 지금 보니 낭만적인 구석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개울에 차량의 행렬이 조금도 쉬지 않는 시멘트 다리일 뿐이었다.

그 다리 건너에 우리 학급이던 2학년 일반 여자 담임선생님이 사시고 있었다. 선생님은 부끄러움이 많으셔서 우리 남학생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시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몇 해 전 서울 어느 예식장에서 있었던 선생님 손자의 결혼식에 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선생님은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셨다. 선생님의 아들이 우리 동기생이다.

그 시절 소읍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던 지서가 지금은 꽤 번화한 산간 도시의 중간 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위치와 소읍의 지형들을 머리에 떠올리며 가늠해 보았지만 지서의 위치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지서의 건물은 내 머릿 속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치는 옛 것 그대로인 것 같았다. 옛 지서의 마당에는 점심 때 웨엥 하는 스피커음으로 정오를 가르치는 오종대가 서 있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 오종대 밑에 서너 구의 인민군 시체가 여러날 거적대기에 가려 쌓여 있었다.

그 오종대 옆에 우리 식구들이 살았던 지서주임의 사택이 있었다. 물론 지금 그런 건물은 없었다.

지서 앞 광장을 건너 왼 쪽으로 언덕길을 걸어올라 모교로 갔다. 지형은 바뀌지 않았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모교 신녕초등학교, 그 모습이 너무나 바뀌어 있었다. 북쪽으로 학교 강의 건물이 있었고, 그 남쪽으로 운동장이 있었으며, 운동장 둘레로는 미루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었다.

당시 미남으로 생기신 체육선생님이 한 분 계셔서 여학생들이 좋아하곤 했는데, 선생님은 운동회날 흰 츄리닝을 입으시고는 백미터 경주에서 날으시듯이 달렸다. 옛 모교를 찾아든 나그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어렸다. 하지만 그 운동장도 미류나무도 체육선생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의 학교 건물은 북쪽을 향해 있었고, 운동장이 북쪽으로 나 있었다. 학교 이름만 같지 건물과 운동장은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것들이었다. 추억을 담을 만한 어떤 것도 없었다. 지금의 학교는 시골학교 치고는 겉모습이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인상이었다.

모교 신녕국민학교는 한 때 재학생이 2600명이 넘는 굴지의 국민학교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교생이 250 여명이라니 십분의 일로 줄었다. 나라의 도시화가 추진된 탓이리라.

학교의 화단 풀밭에 혼자 오래 앉아 명상에 잠기다가 자리를 떴다.

지난 50년 세월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학교 가까이에 있는 신녕 향교를 찾았다.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담 너머로 안을 살피니 대성전의 모습이 아련하게 내 기억 속에 떠올랐다.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이나 지방문화재인 명륜당의 모습이 세월을 이기고 내 기억을 살려냈다.

면사무소를 찾았다. 무슨 여행안내서라도 찾기 위해서 였다. 그래도 잘 꾸며진 지도를 한 장 구할 수 있었다.

면사무소 앞에는 조선시대 관리들의 송덕비들이 나열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여기 신녕현을 다스렸던 현감과 신녕 고을에 위치해 있었던 장수도(長壽道)역참의 찰방들의 것이었다. 신녕 역참은 인근 14개의 역참을 다스렸던 찰방이 집무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신녕은, 신라시대에 지금의 이름인 신녕으로 굳어졌으며 지금의 영천군인 당시 임고현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는 공양왕 때, 신녕에 감무를 두었는데, 감무라는 벼슬은 현령과 현감의 중간적인 위치의 것으로, 조선시대에 현감으로 바뀌게 된다.

조선시대는 태종 때부터 고종 시까지 현감의 치소가 되었으며, 고종 때에는 대구부 소관의 신녕군으로 되었다가 이어 영천군에 병합되었다.

사서를 뒤적여보면, 신녕 주변의 화산 팔공산 보현산의 위치와 유래들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신녕고을에 30개의 못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시대(1578년)부터 고종말기까지 신녕현에 부임해온 현감 군수의 부임연도, 이임연도, 이임사유등이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풍수지리적으로 신녕은 결코 명당은 아닌 듯하다. 주변의 고산준령들 탓으로 바람이 워낙 세차게 불기 때문이다. 봉수가 있던 봉화제에 바람이 세차게 불면 금호강 지류인 서천과 북천의 물이 흘러넘쳐 피해를 준다고 하는 풍설이 있어서, 주민들이 좀 편하게 살게 해 달라는 뜻에서 신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모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귀마개를 하고 벙어리 장갑을 껴도, 봉화제 바람이 얼마나 찼던지 손이 얼어 터지고 귀바퀴가 얼어 갈라지곤 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흐릿한 기억을 따라 오늘의 신녕을 찾아 헤메기를 근 네 시간, 나는 이 산간의 소읍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갈증이 왔고, 배가 고팠다.

지서 뒤편으로 새로 난 시장 터로 가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나는 알 수 없이 밀려드는 감격과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신녕은 희미한 윤곽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아버님을 추모하러 온 자가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서천 강변을 걷다가 나는 문득 우리 동기생 한 사람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 기억나서 휴대폰을 꺼내어 인하대학의 천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설주범이가 까페를 한다는 것이다. 둘은 손을 잡고 반기었다. 소성아 그래도 니는 알라 때 모습이 좀 남아 있데이...그는 무슨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런 주범이도 작년인가 타계했다.

나는 3학년 때인가 아버님의 전근지를 따라 대구로 나갔고, 그 길고 긴 세월 끝에 50 여년만인 오늘에야 신녕에 온 것이다.

신녕을 잊고 살다가, 대학생 시절 나는 내가 다니던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아득한 세월 속의 옛 신녕 시절의 학우 천명섭을 만났다. 초등학교 4년(3학년 때 떠났으므로), 중고등 6년 그러니 10년만의 해후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신녕과 연결되었다. 기이하게도 44년 동기생들이 나를 정확하게 기억해주는데 신기할 따름이었다

재경 44회 동기생들은 한 서른 명 두 달에 한번씩 만나고 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사 탓으로 모임에 가끔 빠지는 날이 있더라도, 경조사만큼은 철저하게 챙기고 있다. 한 때 우리들은 자금을 모아 고향 신녕에 대학을 세우자는 말까지 했었다. 우리들의 영혼 속에는 남쪽으로 운동장을 낸 그 고색이 창연한 신녕국민학교의 옛모습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모교의 개교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탓으로 사계절의 모습이 뚜렷한 고도 신녕, 거기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우리의 모교, 신녕초등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근년에 재경 동기생들 중에서 서너분이 타계하셨다. 우리도 이제 황혼길에 접어든 것 같다.

모교의 발전에 더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 섭섭하다.  

졸업생이 만 명을 넘었다니, 그분들 한 분 한 분 나보다 더한 가슴저린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졸업생들 중에서 나에게 이런 귀한 글의 청탁을 해주신 개교 100주년준비위원님들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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