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Paul Gauguin(1848~1903) 원시(原始)의 세계를 찾아나선 예술가 | ||
나부습작(裸婦習作) 4명의 브르타뉴 舞踊手
야회복을 입은 메트 고갱 고갱은 1873년 11월, 23살의 덴마크 여성 메트와 결혼 했다. 결혼 전 어느 편지에서 그녀의 강한 성격과 고귀한 감정에 대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를 덴마크로부터 뺏어 오기 위하여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작정입니다.' 고 했지만, 결혼 후 북구(北區)의 프로테스 탄트풍(風)의 엄격한 윤리관에 젖어 있는 그녀와 고갱과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고갱 이외의 다른 남자였다면 훌륭한 부인으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갱이 고갱 자신으로 돌아 감에 따라 그녀도 자신을 드러내어 자제하지를 못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본격적인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베르탕 상점을 그만둔 다음 해에 르왕에서 그린 것인데 인상파적인 수법으로 그녀의 그런 기질(氣質)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초상화에서 이런 투시력(透視力)은
1886년 제8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19점의 작품은 기대했던 만큼의 평판을 얻지 못하고 깨어진 하모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그 시기의 구축성(構築性)이 강한 구도법(構圖法)과 그의 평면 처리법(平面處理法)이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의 길은 브르타뉴의 생활에서 하나의 달성을 보인다. 화면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브르타뉴 농부(農婦)의 얼굴을 옆으로 그리는 수법이나, 빨강이나 초록의 사용법 등은 두 번째 브르타뉴 시대의 작품을 예견케하는 점이고, 전경의 인물이나 사물을 크게 그리고 후경(後景)에 여러가지 정경을 그려 넣는 수법으로 장식적인 화면에 원근법(遠近法)을 도입한 것은 고갱이 그의 타히티의 작품에 있어 자주 쓰던 수법으로, 그 싹이 여기에서 자란 것으로 느껴진다. 피사로부터 받은 점묘적(点描的)인 터치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평면적 의지가 화면 속에 교차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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