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敎育.學事 關係

[스크랩] 청년의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鶴山 徐 仁 2009. 1. 29. 12:15
청년의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들어가며 -

청년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떠오르는 이미지가 많습니다. 우선 탄력 있는 용수철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질주하는 맹수, 또는 쏟아지는 폭포 등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여하튼 이러한 여러 이미지들의 공통된 점은 모두 힘이 넘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이 청년이라는 말을 들을 때 시들어 가는 풀잎을 연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청년기는 힘과 용기, 결단과 실천 및 성취의 시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청년의 시기에 대한 연령상의 구분은 각 나라의 문화적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우리 나라의 한 국어 사전에서는 간단히 '20-30세 전후의 젊은 사람, 소년과 장년사이에 해당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자료인 한 성서 사전에 보면 '젊고 혈기 왕성한 한창 나이 때의 사람. 20-30세 전후의 사람을 지칭하나 때로는 소년과 장년까지를 포함시켜 말하는 경우도 흔하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헬라어에서 흔히 청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네아니아스는 24-40세 정도의 나이에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청년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연령층은 상당히 폭이 넓긴 하지만 어째든 분명한 것은 청년기는 인생에 있어서 왕성한 힘으로 일할 때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예로 들어 언급되는 인물 중에는 그가 청년인지 소년인지 혹은 장년인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위 喚疵? 하여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그들의 청년 시기에 하나님의 큰 일들을 감당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이나 여호수아,기드온, 다윗, 그리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모두가 다 청년 때 큰 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또 신약의 세례 요한이나 주님의 제자들, 그리고 바울과 그의 팀도 모두가 다 청년 때에 큰 일을 시작하거나 혹은 이루어 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청년기에 있는 이들이 자신의 젊은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님 앞에 옳으며 또 본인 자신에게도 가장 보람된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아주 의미 심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I. 청년의 시기의 중요성

청년의 시기가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를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결단의 시기

어떤 통계에 보면 장년의 때보다는 청년의 때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수가 더 많고, 또 74세 이후의 노인들보다는 45세 전후의 사람들이 그래도 주님을 더 잘 영접한다고 했습니다. 이 통계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결단하기가 더욱 어려워 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도 그들은 이 땅에 대한 미련이 더 많아지고 욕심도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가리키는 말 중 노욕(老慾)이라고 하여 늙은이의 욕심이라는 뜻의 단어가 있습니다. 이처럼 노욕이라고 하는 단어가 특별히 생길 정도로 사람들을 나이가 들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겸허하게 이에 대한 준비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 더 오래 머물러 있을 것처럼, 혹은 더 나아가 마치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죽음 이후의 영원에 대한 심각한 생각이 결여되어 있고 죽음에 대한 준비를 별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문제의 결단은 노년의 시기로 미룰 것이 아니라 젊은 청년의 시기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내려야 할 결단은 구원과 연관된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가복음 8:36). 세상적으로 어떤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영적인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물거품과 같은 허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결심이나 활동보다도 이 구원에 대한 결단부터 내려야 됩니다. 많은 일로 마음이 번잡하고 결단을 내리기가 어렵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해야 합니다.1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 기를 굴복시키고,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베풀어주신 그 대속의 사실을 믿고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해야 합니다.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결단을 내려야 할 때도 청년의 시기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망설임 없이 배와 그물 혹은 부친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르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때가 바로 그들이 청년의 시기였던 것입니다(마태복음 4:18-22 참조). 성경에 나타난 많은 하1나님의 일꾼들가운데 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결단을 내린 경우도 물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청년의 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던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하나님의 결단을 내리는 것을 연기한다면 결국 자기 평생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할 기회를 놓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젊었을 때에 잠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다가 낙심하여 타락의 길을 걷다가 노년에 와서야 새롭게 결심하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잃어버린 값진 세월들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청년의 시기가 자기 생애의 가장 중대한 결단의 시기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煊?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며, 또한 성실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여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 12:1에 보면,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노인들에게, '이제 당신이 무덤에 갈 때가 가까웠으니 당신의 창조 자를 기억하시오'라고 경고한 것이 아니라, 청년의 때에 처한 사람들에게 바로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영원한 것을 위해 자기를 훈련하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성취하는 일을 청년의 시기에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일꾼으로 부르셔 서 쓰시길 원하시는 그 일에 대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결단을 젊은 때인 바로 지금 내려야 됩니다. (계속)

2. 힘이 넘치는 시기

잠언 20:29에 보면,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자의 영화는 재물이 많은 것이라든가 권세가 있는 것이 있다고 하지 않고 그 힘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피곤을 모르며 또 피곤해도 속히 회복되는 것, 이것은 노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또 젊은 사람의 힘은 아이들도 매우 부러워합니다.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거나 옮겨 놓을 수 있는 힘, 높은 것이나 넓은 곳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힘 등 강인한 체력뿐만이 아니라, 일을 수행해 나가는 추진력 혹은 창의력 등에 있어서도 어린이나 노인들은 젊은 청년들의 힘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나도 저 젊은이처럼 다시 힘이 있었으면....'하면서 젊은이들을
부러워합니다. 나의 경우 50세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운동들을 청년들과 함께 즐겨 왔으나 더 세월이 흐른 지금 나의 몸은 그들의 힘찬 운동 경기를 단지 의자에 앉아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젊은이들의 힘은 어린아이나 노인이나 부러워하는바 젊은이의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러한 왕성한 힘으로 하나님 앞에서 맡은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2:14에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시기의 청년들이 흉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강한 믿음의 힘과 결단력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0:3에 보면, '주의 권능의 날에...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청년들에 대해서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새벽 이슬은 넘치는 생기와 새로운 희망과 신선함의 상징입니다. 전날 낮에 뜨거운 햇볕으로 시들시들해진 잎들도 새벽 이슬이 맺히는 아침이면 다시 신선한 생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나뭇잎, 풀잎들에 맺힌 새벽 이슬을 보면 우리의 마음조차도 새로워지며 활력을 얻게 되는데, 젊은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이러한 느낌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힘과 용
기가 넘치고 무엇이든지 해내고 이기는 것이 바로 젊은이들의 표상인 것입니다.

헬라어로 청년을 가리키는 말 중에 네아니아스는 원래 새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새로운 인물 다시 말하면 구세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을 때 그를 가리켜 네아니아스라고 합니다. 네아니아스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용기와 의욕이 있으며 새로운 것을 창출해 냅니다.
이러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때마다 그 사회는 개혁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목표가 새워지고 새로운 과업의 성취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 혹은 청년이란 바로 이러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젊은 우리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육체의 젊은 힘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야 하며, 이로 인하여 매일매일 폭발력 있는 능력의 삶을 살며 마땅히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기력한 사람이되 어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의 삶은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그를 통하여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실수는 배울 수 있는 최선의 기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실수를 두려워하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계속)

3. 유용한 시기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크신 역사를 이루실 때에 노인이나 어린아이들보다는 청년들을 불러서 사용하신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 이유는 노인이나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그런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그들보다는 더욱 유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유용하다(available)는 것은 쓸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세상 일에 얽매어 있지 않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환경적으로, 시간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및 영적으로 준비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꼭 필요하고 유익하더라도 막상 사용하려고 할 때 곁에 없으면 유용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의 시기는 여러 모로 쓸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동성이 있으며 또한 개방되어 있는 상태여서 가장 유용한 시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수많은 이스라엘 왕들과 선지자들과 사사들, 혹은 주님의 제자들이나 교회의 일꾼들이 거의가 다 청년의 시기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 중에는 들에서 먹이던 양무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두고 따른 사람도 있고 직업과 지위, 재물과 명예를 포기하고 부르심에 응하는 용단을 내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드리는 일에 유용하도록 준
비되어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경기에 임하는 운동 선수는 이에 알맞게 항상 자신을 준비하여 경기에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옷을 걸쳐 입지 않으며 멋을 내기 위하여 이것저것 장신구를 부착하지 않고 가능한 한 간편하고 가볍게 해야 합니다......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브리서 12:1)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도 항상 인생의 경주에 임하는 자임을 알고 얽매이는 것이 없이 유용하도록 자신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이가 많아지면 그만큼 많은 것에 얽매이게 되는 것을 봅니다. 갈수록 여러 인간 관계가 더 복잡해지고, 자신의 직업, 또는 사회적 책임이나 기능 등 일과 관련된 것들로 말미암아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얽매이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외적인 요인들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 자체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기존의 관계들 속 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용기를 내길 어려워하며, 그 위치 또는 그 환경에 안주하고자 하는 타성에 젖는 것이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노년에 접어들게 되면, 사람은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자신의 안정된 삶의 기반이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 매우 강해지는 데 이것이 그들의 하나님 앞에 유용한 사람이 되는 데에 장애물이 되곤 합니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무엇인가 바뀌는 것에 대해서 큰 불안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원하고 변화를 원합니다. 젊은이들은 특히 정신적 유용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의 한 세대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이미 많은 수가 노인들이 되어서 그들은 현재의 새로운 자유에서 누리는 만족보다는 옛날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느끼던 안정을 자주 더 좋게 생각하고 연 연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더 이상 유용성이 없는, 노예 근성으로 인격이 형성된 구세대를 포기하시고 새로운 젊은 세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새로운 세대의 젊은이들이 약속의 땅에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유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속)


4. 비전을 따라 사는 시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28). 이 말씀은 말세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실 때 젊은이들이 비전(vision)을 갖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여기 이상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비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은 한산 먼 미래를 내다보며 자기가 이루어야 할 것들에 강한 매력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청년들에게 시대의 필요를 직시할 수 있는 영적 시야를 주시고, 그에 따른 사명과 아울러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목표와 전력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비전의 청년들이 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건전한 젊은이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거기에 항상 매력을 느낍니다. 역사를 통하여 많은 젊은 사람들이 고귀한 생애의 목표를 위해서 때로는 죽음도 마다 않고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살았던 것은 이들 젊은이들이 바로 그들이 가진 비전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사랑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보건대 우리들 각 사람의 청년 시기는 정말로 값진 것입니다. 이 값진 청년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 시점에서 결정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이 시기를 잘못 보낸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영적 축복들을 다 놓쳐 버리는 것이며, 결국 자신의 생애 전체를 잘못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시절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평가해 보고 새롭게 시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떤 면에서 취사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느냐에 따라 우리 일생은 좌우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무가치한 것인가를 분별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의 수많은 청년들이 혼돈된 가치관으로 인하여 비록 진지하기는 하나 허무한 삶의 목적에 자신의 고귀한 젊음을 헌신적으로 낭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II. 청년의 시기에 버려야 할 것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청년의 시기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기는 또 하나님 앞에 중요한 만큼 사탄도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가장 집요하게 공격을 가해 오고 여러 가지로 유혹을 많이 하는 때가 또한 이 청년의 시기인 것입니다.
창세기 4:7-8에는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인이 젊었을 때 사탄의 공격을 받고 넘어진 것을 모여 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25:27-34에 나오는 에서, 그도 젊은 시절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로서의 모든 특권과 영적인 축복이 약속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또 사무엘의 아들들(사무엘상 8:1-3 참조), 압살롬, 르호보암, 여로보암, 므낫세, 그리고 마태복음19:16-23네 등장하는 부자 청년 등등, 이러한 여러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사탄의 유혹하는 대로 자신을 방치함으로 말미암아 일생을 망쳐 놓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젊은 시절에 타락한 것을 보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느냐 아니면 세상의 유혹에 끌려 그런 일들에 드려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생애의 모든 것이 죽은 후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의 자기의 발걸음에 따라서 자기 자서전의 초안이 기록되기 시작한다는 점을 심각하게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청년 시절에 있는 우리모두는 이런 실패의 대열에 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경계하고 버려야 할 영역들이 무 엇인가 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해를 주는 버려야 할 영역들이 참으로 많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자기 생각대로 사는 습관
우리는 자기 눈에 보이고 마음에 느끼고 귀에 들리는 대로 사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전도서 11:9에 보면,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이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보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언뜻 첫 부분을 읽어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청년들에게 마음대로 한번 살아 보라고 허락하시거나 권장하시는 것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네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해 봐라'하고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을 더욱 강한 의미로 전달하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 길로 좇아 행하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오히려 강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현상이 따라 혹은 자기 마음에 느끼는 대로 결정하고 살아가는 식의 사려 깊지 못하고 무책임한 방식으로 삶을 운영해 갈 때 , 결국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되며 성경의 표현대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후회를 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바로 이러한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분가할 때 믿음의 눈으로가 아니라 자기 육신의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나갔으며 점점 장막을 옮겨 결국 죄악의 도시 소돔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창세기 13:1-13 참조). 그는 세상적인 가치관을 기초로 하여 자기 갈 길을 선택하였는데 결국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될 때 불 가운데서 겨우 자기 몸만 빠져 나오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창세기 19장, 고린도전서 3:15 참조). 에서도 이런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는 들에서 돌아와 시장할 때 그 당장에 죽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하여 가정의 통솔권과 물질적 축복 및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된 역적 축복에까지 직결된 장자의 명분을 헌신짝 버 리듯이 야곱에게 내어 주었습니다(창세기 25:27-34).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몸으로 느끼는 대로 결정하고 행동하였던 것인데, 나중에 가서야 그 축복들이 자기에게서 떠나 야곱에게로 간 것을 알고 '방성 대곡'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6에서는 이러한 에서의 처신이 망령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망령되다'라는 날은 영적인 사고 방식과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판단과 행 동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영적인 것을 경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두려워하며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린도후서 4:18).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도후서 5:7). 이 말씀들에 나타나 있는 원리가 우리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청년은 힘과 용기가 있는 반면에 또 지극히 충동적이고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에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또 심사숙고하여 행하기보다는 먼저 몸부터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행동화하는 이 특성은 장점이 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삶에서 떠나 절제하며 스스로를 쳐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일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어서조차도 젊은 사람들은 지극히 충동적인 때가 많습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듯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말할 수 없이 깊은 저 밑바닥에 빠진 듯 힘없는 삶을 사는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충동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고, 절제로써 이러한 모 든 충동적인 생각에서 떠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린도전서 9:25상). (계속)

2. 청년의 정욕

디모데후서 2:22에 보면,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이 정욕이란 청년들이 갖는 모든 잘못된 욕심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이다. 성적인 것이나, 향락적인 것, 정상적인 야망 등을 추구하는 모든 욕심이 다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침 이슬처럼 신선해야 될 청년들을 시들시들하게 만들며 비전 가운데 살아야 될 청년들을 시들시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청년이 정욕에 빠지게 되면 무기력하고 방향 감각 없이 살게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6에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일락을 추구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치관이 흐려지고 사고 능력이 마비되어 결국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술집이나 여러 종류의 향락적인 장소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들이 바로 무덤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향락을 추구하는 이런 곳들은 곧 겉이 번드르르한 무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무절제한 것들로부터 떠나야 됩니다.

시편 119:9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청년이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자기의 결심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의 계획에 의한 자기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차 있을 때 그 말씀이 생각을 경건하게 만들고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 시절에 특별히 힘써서 해야 할 것은 말씀의 섭취이며 그 중에서도 더욱 역점을 두어야 할 영역은 성경 암송입니다.

갑자기 어떤 충동적인 생각 또는 감정이 일어날 때, 혹은 어떤 갑작스런 유혹을 받았을 때,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성경 공부 시간에 배웠던 어떤 말씀이나 또 이전에 기도했던 어떤 내용을 생각하게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경에 관한 신학적인 상식이 생각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가장 신속히 생각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암송한 말씀인 것입니다. 충동적인 행동을 그 순간에 순발력 있게 막을 수 있
는 것은 단검과 같은 암송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런 때를 대비하여 젊은이들은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암송에 매일 열심으로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하튼 젊은이에게 있어서는 세상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죄로부터 승리하는 것이 선교하는 일 자체보다도 더 큰 과제라는 것을 알고 매일 매순간 깨어 있어서 이런 일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요한일서 2:15-17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앞의 14절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의 대상이 특별히 청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가장 매력을 느끼고 세상적 유혹에 이끌리기가 쉬운 시기가 바로 청년기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렇게 강조하여 경고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람은 대개 청년 때 정해 놓은 방향대로 일생을 살게 됩니다. 청년 때에 길들여 놓은 습관대로 자기 생을 꾸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물줄기는 나중에라도 방향을 고쳐
잡기가 쉽지만 이미 거대한 강을 이룬 물줄기는 방향을 바꾸기가 아주 힘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이 정욕으로 말미암아 큰 강과 같은 죄의 습관을 이루어 놓기 전에 방향을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모든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는 습관을 청년 때에 형성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를 위해 많은 방법들이 있겠으나 특히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살아 있는 말씀을 지속적으로 암송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계속)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누가복음 6:45)


III. 청년의 시기에 취해야 할 것들
청년의 시기에는 우리들 하나님의 축복에서 떠나 실패의 삶을 살게 만드는 것들 즉 사탄에 속한 세상적인 것, 마귀적인 것 등 악한 모든 것들을 미련없이 버려야 되지만 또한 열심히 취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핏 보기에 은혜와 축복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 중에도 중요하게 여기고 취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귀중한 것들을 소홀히 여기거나 택하지 아니하고 버리는 경향 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을 취하지 않으면 죄에 빠지는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젊은 시절에 반드시 취해야 할 것들로서 그처럼 가치 있고 유익한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1. 그리스도의 멍에

예레미야애가 3:27에,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멍에를 멜만한 힘이 있고, 또 몸과 마음 의 유연성이 좋아서 멍에 메는 일에 쉽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젊어서 멍에를 메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젊어서 망에를 메는 습관을 들이면 늙어서도 그 멍에를 메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쉽습니다.
멍에란 본래 소나 말 등의 가축이 쟁기질이나 수레를 끄는 일 또는 무거운 짐을 올려놓고 운반하는 일 등을 효과적으로 하도록 하기 위하여 목이나 등에 가로 얹어 사용하는 기구입니다. 소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멍에를 메는 것에 굴복할 줄 알아야 하고 또 그 멍에가 마치 자기 몸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느껴지도록 숙달시키는 훈련이 필요 합니다.
멍에를 생각할 때 나는 시골에서 짐을 운반하거나 산에 나무를 하러갈 때에 사용하는 지게를 연상하게 되는데, 이 지게는 처음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곤란스럽게 느껴지곤 하는 기구입니다. 처음 지게를 지어 보면 상체 근육도 매우 아프고 때로는 지게 멜빵이 닿는 어깨 부분의 피부가 벗겨져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또한 처음 지게를 지고 그 위에 짐을 져보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면서 균형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지게를 메지 않고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되
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씩 지게 지는 것이 익숙해지면 손으로 들고 간 다든가 한쪽 어깨에 메고 가는 것보다 훨씬 많은 짐을 더 멀리 지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지게 지는 것이 익숙해지면 맨손으로는 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험한 산길도 오르내릴 수 있게 되며 쌀 가마니를 지고 징검다리도 건너다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 이것을 숙달시키면 늙어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지게는 결코 그 자체 무게 때문에 우리가 지는 짐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더 효과적으로 짐을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구인 것입니다. 우리가 메어야 할 그리스도의 멍에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쉽게 가벼운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처음부터 편하고 쉽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은 거의 본능적인 것 같습니다. 쉽게 해결하고자 하는 데로 마음이 쏠려 있어서 늘 그런 방향으로 치우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운동도 기초부터 차분히 하기보다는 우선 시합부터 하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음악이나 미술 또는 다른 학문에 있어서도 같은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대개 정로를 택하기보다는 편법을 좋아합니다. 이런 쉬운 방법을
통해서만 성장한 사람은 항상 보든 것을 정상적으로 해결하고자 하기보다는 쉽게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고자 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노력보다는 힘들지 않고 무엇인가를 취하려고 하며 그러다가 죄에 빠지곤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해주신 것이 아직도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해주셨는데 우리 중에는 주님께 헌신하며 값을 치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 보다는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더 헌신해 주시기만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참제자는 얻을 것이 무엇인가보다 버릴 것이 무엇인가에, 누릴 것이 무엇인가보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께 헌신하여 사는 데에 관심을 더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쉽게 살기를 원하는 마음을 품는 사람은 주님의 일꾼이 되는 데 있어서도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모세나 엘리야 같이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만히 앉아서 영적 축복을 다 누리려고 하고, 또 훈련의 과정은 거치지 않고 영적 지도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렇게 정로보다는 항상 지름길을 원하는 사고 방식에 젊었을 때 길들여지면 일생을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름길만을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세상살이에 있어서도 쉽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들은 대부분 불법과 편법들이며,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가 심각한 것같이,
영적인 면에서 생각해 볼 때도 주님 안에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과 훈련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질적인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으며, 혹시 외적인 지위나 위치는 확보했다고 해도 참된 영적인 역할과 기능은 발휘할 수 없게 되어 많은 문제를 만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듯이 멍에를 메고 배울 때에 그것이 진정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값을 지불하지 않고 얻은 모든 것은 평안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을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헌신된 삶이 필요합니다(마태복음 16:24, 누가복음 14:27 참조).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헌신된 제자의 삶을 사는 것도 인간적인 열심이나 육체적인 힘, 혈기에 위한 결단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되는 것이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히브리서 11:6 참조). 우리의 구원도 물론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디도서 3:5, 에베소서 2:8-9 참조). 그리고 헌신된 제자로서 값을 지불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도 역시 하나님의 무궁한 자원과 공급에 의한 믿음,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4)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 또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 짐을 져주시는 것과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없이는 헌신적인 제자로서 지속적으로 주님을 일생 동안 좇아 가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28-30의 말씀을 하실 그 시대에 유대인들은 주로 두 가지 잘못된 멍에, 곧 율법의 멍에와 사탄의 멍에를 에고 있었습니다. 이 멍에를 짊어지고 숨을 헐떡이며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시며 은혜의 멍에에로 그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지금까지 무엇인가 잘못된 멍에를 메고 살던 삶에서 벗어나서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멍에를 조금도 망설임 없이 메기를 원하십니다. 때로 미숙한 목수가 아무렇게나 제조한 잘못된 멍에를 멜 때에는 짐을 쉽게 지거나 쟁기를 힘차게 끌어 밭을 갈기는커녕 오히려 그멍에 자체가 주는 무게가 힘이 들 뿐만 아니라 살갗이 터지고 문드러지기 때문에 여간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종교의 멍에, 세속화된 삶의 멍에, 죄악의 멍에들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워 주시는 멍에는 작자에게 편안하게 잘 맞아 쾌적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힘든 짐을 실어 놓아도 가뜬하게 운반할 수 있게 되며 또 메마른 밭이라 할지라도 쟁기를 힘차게 끌어 일구어 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멍에를 나 혼자 메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메어 주시기 때문에 더욱 쉽습니다. 우리 나라 멍에는 그 구조가 소 한 마리가 한 겨리를 이루어 메거나 그 이상의 다수의 소와 함께 메도록 되어
있습니다. 둘이 함께 끌 때 그 중 함 마리 힘센 소가 잘 끌면 옆의 소는 잘 따라가기만 해도 상당히 수월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볍고 편안하게 잘 맞는 멍에를 메워 주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한 겨리가 되어 멍에를 메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쉽고 가볍게 그 멍에를 메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메워 주시는 멍에를 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고통과 눈물만이 요구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도리어 복되고 즐거운 것입니다.

함께 짐을 져주시는 주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담대히 멍에를 멜 때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메워 주신 멍에를 능숙하게 메고 따를 수 있는 훈련을 즐겨 받으며, 또한 멍에와 더불어 지워 주신 영적 과업을 성취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훈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일의 가치와 그 선한 목적은 인정하면서도 막상 그것을 위해 훈련받기는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훈련받는다고 하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고난을 감수하며 훈련을 받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을 무시기 위해 준비시키시는 과정이며 이것은 주님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훈련을 자청하는 태도를 가질 때 주님께서는 친히 함께 하여 주심으로 오히려 그것이 쉽게 가볍도록 도와주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고 기피할 때에는 어느 사이엔가 사탄이 그의 거칠고 무거운 멍에를 우리 위해 씌워 놓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탄이 메워 주는 죄의 멍에가 아니라 의의 멍에를 메어야 할 것을 거듭 교훈 하십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되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로마서 6:13).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로마서 6:16). 이와 같이 우리는 필연적으로 두 멍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순종의 종으로서 의
의 멍에를 메는 것이 축복된 삶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 멍에를 메고 헌신적으로 이 삶을 수준 높게 유지하며 주님의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제자가 되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하며 훈련에 임해야 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동행하는 삶을 지속하기 위한 훈련,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육신적인 본성들을 제어하는 훈련, 경건한 그리스도 인들과의 교제와 동역하는 삶의 훈련, 기타 여러 영역에서의 자기 개발을 위한 훈련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런 훈련을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포기하는 것이요, 결국 청년의 시기를 잘못 보내는 과정으로 자기를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모든 훈련의 환경을 마지못하여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젊은이에게 '좋은'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박수 갈채를 받고 화려한 꽃다발을 받아들이기를 좋아해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된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에레미야애가 3:27-28)고 하신 말씀에서 잠하라'는 것은 단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불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소가 멍에 메기를 거부하여 멍에 없이 등에 짐을 올려 놓는다든가 다리나 꼬리에 쟁기를 메어 놓으면 제대로 일할 수 있겠습니까? 우스꽝스러운 일만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우리 각자에게 어떤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맡기실 때는 일을 맡기기에 앞서 먼저 멍에를 메게 하시고 훈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하며 하나님이 훈련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이를테면, 누구라도 수양회에 참석하면서 일부러 감기에 걸려야겠다고 계획을 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나와 같이 수양회 때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와 같이 수양회 때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기에 걸리면 여러 가지로 말씀을 묵상하기도 어렵고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끔 감기를 허락하심 으로 말미암아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지 않은 다른 영역에서 나를 훈련하시고 배우게 하시는 것을 봅니다. 적어도 이런 감기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사소한 영역에서도 주님을 의뢰해야 함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세우신 모든 훈련 과정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잠잠하라.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메우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하필 시험 보는 기간에 병에 걸려 어려움을 겪어야 할까? 왜 등록을 해야 하는 기간에 가족이 아파서 등록금으로 마련해 놓은 것을 병원비로 내야 할까? 이처럼 우리에게는 스스로 생각지 않고 계획하지 않은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이 닥쳐 올 수
있습니다. 또 환경적인 것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으로 계획해 놓은 여러 훈련 과정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하여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어느 시기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젊었을 때에 가장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젊은 시절에 멍에 메는 것을 회피하면, 그 기회가 결코 자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며, 온 다고 하여도 그때는 이미 멍에 메기가 너무도 힘이 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2.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역대상 11:9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하고 다윗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성하여졌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강성하여지며 형통케 된 이유는 그가 어떤 새로운 정치학이나 군사학을 배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젊은 시절부터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형통한 삶을 살았던 것을 봅니다. 그는 많은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형통하였습니다. 애굽에 팔려 가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 에서 종으로 있을 때에 그는 자기도 형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인인 보디발 집 전체가 그의 형통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세기 39:2-5).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인처럼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 동행하여 형통하였으며, 그의 형통을 통하여 또한 그와 함께 있는 간수장도 형통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그가 나중에 왕 앞에 나아가서 왕을 삼길 때에도 요셉 자신만 형통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하를 둔 왕도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는 동행하는 자신만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의 가정이나 직장 또는 학교가 형통하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형통하고 있느냐 혹은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미가 6:8 말씀에서 이렇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해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또 베드로전서 5:5-6 말씀에서는 특별히 젊은 이들에게,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아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단지 관심을 덜 기울이시거나 싫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뛰어난 능력과 재능이 있어도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형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이런 사람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주님의 젊은 제자들은 자주 '우리 중에 누가 더 높으냐?'하는 데에 마음이 쏠려 있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주 그들의 이런 겸손 치 못한 태도에 대하여 지적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도 그들은 그런 문제로 서로 불편한 마음을 품기도 했습니다. 흔히 청년들은 배우는 대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자기를 나타내는 데에 더 민감하게 관심을 기울이며 활동에 의한 자기 과시에 마음이 많이 쏠리곤 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결국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며 형통치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동네 노인들 중에 고집이 센 노인이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이런 옹고집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한번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꺾을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자기 입장을 관철하는 데에만 마음이 쏠려 있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형편에는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들고 이야기를 걸고자 하지만 다 꺼려합니다. 그 노인이 동네 저쪽 길에 서 있으면 그리로 지나가던 사람도 멀찌감치서 옆 골목으로 피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의 이야기에서는 늘 벽에 부딪히는 듯한 답답한 느낌이 들며 마음에 즐거움이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한번 붙들리면 놓아주질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젊었을 때에 겸손을 배우 기보다는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주정하는 것만 몸에 익혔기 때문에 늙어서도 그렇게 된 것일 것입니다. 자기는 팔자가 나쁘다느니 인덕이 없다
느니 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한탄을 하지만, 대개 이런 경우 자신이 젊었을 때 심어 놓은 인격의 열매를 늙어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생을 통하여 형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먼저 청년의 시기에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워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3. 경건한 사람과의 적극적인 교제

사람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가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가 좌우되곤 합니다. 우리 집에는 주님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형제 자매들이 자주 드나드는데, 우리 자녀들을 보면 그 형제 자매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들의 관심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녀들도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다가 또 미술을 전공하는 형제 자매가 있으면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곤 했습니다. 또 테니스를 잘치는 전 국가 대표 선수가 자주 드나들 때는 테니스에 적극적인 관심을 쏟고 그쪽으로 치우치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과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관심과 행동이 바뀌게 되며 결국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가 훈련되어야 할 많은 기본적인 삶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우리를 경건한 영적인 사람으로 지켜 주고 성장하게 하는 데에 핵심적인
필요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제 가운데서 이런일들을 즐거움으로 누리기도 하지만 혹 힘들게 느낄 때도 있습니다. 어쩌다 가끔 힘들게 느껴지면 마음 속에 '이것이 내 확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확신에 따라 끌려가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며 교제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잘못된 영적 상태를 변명하기 위하여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는 데서 나오는 것이며, 설사 그 변명의 내용이 사실이라도 해도 실제로 자기 확신으로 했느냐 혹은 남의 확신으로 했느냐 하는 문제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경건하며 유익한 일은 다른 사람의 확신을 따라 했다고 하여도 문제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그가 현재 영적인 교제와 훈련의 환경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시는 많은 축복들을 잃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청년의 정욕에서 떠나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2:22의 말씀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이 말씀은 청년의 정욕에서 떠나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경건한 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중요한 하나님의 원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더러운 것을 버린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취할 것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것이 경건치 않는다고 생각되어 그런 것으로부터 떠나겠다고 결심을 여러 번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자리를 떠나 야겠다고 하여 떠나고, 어떤 것은 그만두어야 되겠다고 하여 그만두는 것 같았는데, 얼마간 지난 후에 보면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있고 그 행동을 다시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떠난 뒤에 취해야 할 것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정욕의 문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청년의 정욕을 떠나는 것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취할 것을 취해야 승리할 수 있는데, 그 취할 것이란 바로 주님을 내 마음의 첫 자리에 모시고 경건한 자들과 적극적인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24-25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히브리서 말씀에 뒤이어 나오는 히브리서 10:33은 그 당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교제의 수준이 어떠했던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환경이 정상적이고 그 교제를 통해서 영적인 축복이 넘치며 또한 세상적인 모든 축복들까지도 아울러 누리는 그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교제한 것이 아니라, 이와는 정반대로 많은 고난과 불이익이 따르는 데도 불구하고 교제한 것이었습니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만약 우리 중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비방과 환난으로써 구경거리가 되는 그런 어려운 형편에 퍼하게 되었는데, 그가 그런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이 순전히 주님의 일 때문이라고 할 때, 우리가 그 사람과 기꺼이 교제하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적으로는 구경거리가 되고 조소거리가 되고 실패자로 보일지라
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옳으며 성서적인 진리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경건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교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과의 교제에 고난이 따른다고 하여도 그것을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삶의 가치와 목적, 그리고 경건함과 의로움과 복스러운 소망을 따라 사는 삶을 그런 사람을
통해서 배우고 주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

4. 본이 되는 삶

디모데전서 4:12에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젊은 디모데에게 바울은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할 영역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가르치는 기술이나 말하는 방법이나 설교 준비하는 법 등을 잘 배워 본이 되라고 하지 않고, 언행을 비롯하여 사랑이나 믿음이나 정절 등 인격적인 면 과 일반적인 삶의 영역들에서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젊은 지도자를 업신여기는 경향은 어느 때에나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는 일반적으로 혈기가 왕성하여 무언가를 이루어 놓는 것같지만 반면에 경험이 없으므로 자주 실수를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또 남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등 부족한 면이 많이 드러납니다. 이런 것이 젊은이가 영적 권위와 능력을 인정받는 데에 장애물이 되곤 하는 것을 보는데,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젊은 지도자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디모데전서 4:13)고 교훈하기에 앞서서 12절에서 먼저 본이 되는 삶을 살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젊은 디모데에게도 젊은 남자들을 이끌 때 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디도서 2:6-8). 젊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보여 주어야 될 본은 세상 젊은 사람들과는 달리 말씀의 교훈대로 삶으로써 부패치 아니하고 경건하며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똑같은 젊은이인데 세상의 다른 젊은이들과 다르다.' 이러한 것을 느끼게 하는 젊은이가 있으면 그는 최고의 본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간증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디도서 2:15 말씀 내용과 같이 권위를 인정받고 업신여김을 받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젊은 지도자들인 디모데와 디도 각각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비결은 본을 보이는 것이라는 단순하면서도 귀한 교훈은 가르친 것입니다. 이외에도 사도 바울은 자주 본받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는 본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 4:16).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립보서 3:17).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립보서 4:9). 이처럼 사도 바울이 여러 차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여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올바른 본을 보여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되라'(고린도전서 11:1)

사람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통하여 더 잘 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을 보여주는 것은 이론 강의를 통한 교육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데살로니가전서 1:6-7).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본이 되었고 다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 도들은 주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본을 보여 주는 것은 이렇게 사역 확장의 핵심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는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베드로전서 5:3). 좋은 본을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 세상 보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실천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는 특별히 본이 되는 언행과 인격의 계발에 힘쓰기보다는 지적 충족과 다양한 사역의 기술 습득
또는 지위 확보에 더 큰 매력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시절에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훈련 목표를 두고 간절한 기도와 적극적인 관심으로 자기 삶을 계발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이후 생애에서 본을 보이는 삶의 능력과 그 결과를 경험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과연 우리 각자는 젊은 자신의 혈기와 자신의 열심으로 다른 사람을 주관하고자 하는 태도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고 본을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본을 보여 주는 면에서 우리는 모두 다 미숙합니다. 아마도 일생 동안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계속해서 올바른 본을 보이는 삶의 영역에서 우리 자신을 훈련해 나가야 합니다. (계속)

5. 그리스도의 지상사명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 시느니라'(디모데전서 2:4). 이 말씀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관심은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나 어떤 다른 특정한 만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바로 이러한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가운데 계획되고 실행된 것이었습니다(요한복음 3:16 참조).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은 신약 시대에 와서야 새로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음에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땅의 모든 족속 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기 12:2-3),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내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창세기 22:18)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족속, 천하 만민에게 복주리라는 관심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도 세상 만민을 구원하하고자 하시는 뜻 을 보여 주셨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이사야 45:22). 이 외에도 구약성경의 수많은 곳에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 축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도 바로 이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소서'(요한복음 17:2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온 세상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도록 하
기 위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하고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는데,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지상사명입니다.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품으신 것과 동일한 관심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과 같이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기보다는, 흔히 자기 자신이나 가족등 가까운 주변의 문제에만 시야가 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관심이 지극히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불과한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을 가져야 하며, 자기 자신이나 주변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말씀하실 때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관심과는 달리 여전히 자기 민족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1:6-8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표가 없이 방황하며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시는 영적 축복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심히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필요를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의 영적인 추수를 감당할 일꾼이 부족한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일꾼을 보내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9:36-38 참조). 오늘날도 혼돈 되고 허무한 삶을 살아가며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시 그들을 보시고 심히 민망히 여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동일한 관심으로 영적인 시야를 가지고 이러한 세상의 필요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또한 그들의 필요에 민감한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사명은 이 세상의 근원적인 필요를 채우시기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동으로 부여하신 바 그야말로 가장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다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이 세상의 어떤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더욱 보람을 느끼며 시간과 관심을 투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젊음을 투자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을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관심을 기울리시고 또 가치 있게 여기시는 그 지상사명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곧 청년의 시기에 취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속)


IV. 지혜로운 선택
청년 시절은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이라고 느껴지는 동안 별로한 것 없이 지나가기가 쉬운 것이 바로 청년의 시기입니다. 너무나도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이것 조금 건드리고 저것 조금 손대고 하는 사이에 10년 혹은 20년이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중요한 것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투자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젊음은 허공만 치는 권투 선수와 같은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시편 90:12에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이것은 자기 날수가 얼마나 짧으며 또 허무한가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해달라고 구하는 기도입니다. 또 이 기도는 '나는 지금 몇 살이며, 대개 사람의 평균 수명이 얼마이므로 이 땅에서 나의 인생은 얼마나 남아 있으며, 또 나는 과거에 어떻게 살았으며, 현재는 어떤 상태로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지혜를 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연관하여, '나의 관심은 무엇이며, 내가 지금 관계되어 있는 일들은 무엇이고, 나의 친구들은 누구이며, 내가 하고 있는 활동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둥에 대하여 생각하며 평가해 보는 것도 자기의 날을 계수하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에는 이러한 진지한 관심이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의 젊은 날은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한 5년 정도, 어떤 사람은 한 10년 혹은 15년까지 남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1-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결단 혹은 각오 가운데 이 시기를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유용한 이 시기에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드려져야 되겠습니까? 젊은이는 비전을 본다고 했는데, 이 비전의 시기에 여러분은 정말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설교나 성경공부 시간 등에서 들어온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그 비전이 여전히 자기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비전이 이미 자기가 자신의 것이 되어 그것으로 마음이 뜨겁게 불타고 있습니까? 또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배우고 훈련받는 일에는 과연
적극적으로 드려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새벽 이슬과 같이 싱싱한 가운데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시편 39:4-7을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4절).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종말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연수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은 조금 더 길고 어떤 사람은 조금 짧으므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비교할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가 자신의 연한과 연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5 절). 여러분의 인생의 날이 긴 것 같지만 사실 손 넓이란 엄지손가락 끝에서부터 다른 손가락 끝까지의 한 뼘 길이인 것입니다. 인생 전체가 이렇게 짧은데 여러분의 젊은 시절은 그보다도 훨씬 더 짧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앞에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있으나마나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편의 기자는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든든히 선 때란 어떤 때입니까? 건강과 재물, 또는 지위와 명예 등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잘 갖추어진 어떤 때, 혹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가므로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때 등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무언가 남의 부축이나 도움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서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인 젊은 시절을 바로 '든든히 선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젊은 시기조차도 진실로 허사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절). 그림자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지나고 나면 흔적이 없습니다. 언제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 같은 그 사람이 그림자 같은 재물을 열심히 모아 보아야 허사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인생이 어떠함을 알고 난 뒤에 결국,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이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절)라고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소망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음을 믿고 우리의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배울 때 우리는 가장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자와 같이 없어질 세상 것들을 쫓아다니면서 값진 청년의 시기를 낭비하며 살 때에는 실로 허무하고 허사뿐이며, 혹 그것을 늦게야 깨달아도 되돌아 가기에는 이미 때가 늦은 것이 우리의 생애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젊은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가 진실로 역동적인 삶을 살길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하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과거 삶이 너무 후회스럽기 때문에 아무리 수없이 새로운 결심을 해도 소용없겠다고 생각하며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귀의 고소장만 그대로 믿고 속아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정죄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현재까지 실패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끝까지 실패자로 남아 있는 거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실패자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현재까지의 실패에 개의치 말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려야 됩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기 날을 계수함을 가르쳐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손 넓이만큼 짧은 우리의 생애를 무엇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겠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그 비전으로 불타도록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지상사명에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나 자매가 청년 시절에 온전히 주님께 헌신된 상태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청년회 대화내용
시작하자마자 me(영우) 한 마디 ☞ 전성민 형제 또 애인 얘기 할려고 그러지?
어! 그런데 우리의 상훈 형제는 애인이 없다네? 자랑스럽게...
왜 애인이 없어요?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이유? (전도사님)


첫째,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요.


둘째, 이상하게(?) 여자들이 나한테 관심이 없어요.
(윤주, 륜경이, 근혜, 은혜, 화남이 등등... 반성해!) 청년회 자매들은 반성하기)


세째, 말 주변이 없어서요. 원래 말을 하기보다는 듣기를 좋아하죠.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초라한 더블보다는 화려한 싱글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제대후 할 일? (전성민)
특별히 계획이라 할 것은 없어요. 계획을 짜놓은 것은 있지만 경제사정상 좀 어렵고, 우선 급한게 취업이죠. 지금은 중소기 업의 전산계통직을 생각하고 있어요.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느껴졌을 때와 가장 초라하다고 느꼈을
때는? (김삼식)
자랑스러웠던 일이라...(여기에서는 '점' 세개지만 약5분이 흘렀다) 없어요. 그
리고 초라했던 때는 음...(역시 약3분이 흐른 뒤) 기억이 안 나네.(내 참! 이
렇게 썰렁했던 금주의 인물 시간은 없었는데...)

자신의 신상명세와 믿게 된 계기? (우지훈)
71년 10월 12일생이고, 경북 진량에서 태어나서 서울로 이사왔죠. 부모님이 다 계시고, 여동생이 있어요. (침 흘리고 있는 우지훈 형제) 애인은 없고 여자친구도 없어요. 교회는 5살때 부터 다녔으니까 음...오래 다녔네요. ?.2때 오산리 기도원에서 은혜받고 믿음이 많이 컸죠.
우지훈 형제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드디어 이상훈 형제 여동생의 프로필을 긴급 입수!!! ☞ 74년생. 범띠. 성격이 급하고 욕심이 많은 편. 상고 졸업후 현재 간호조무사(산부인과)로 근무중. 애인은 없슴. '생긴 건?' (전성민) 나(이상훈 형제)랑 완전히 반대 (안도하는 전성민 형제!!!)

앞으로 어떻게 살건가요? (전성민)
이제까지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이사도 많이 다니고.. 그래서 돈에 대한 욕심이 좀 많은 편이죠. 그렇다고 해서 주체못할 정도의 부를 원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여유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군포 집에 항상 혼자 계시는 어머님이 늘 안타깝습니다.
(아버지는 지방에, 동생은 병원기숙사에서 생활)


태양모를 쓰고 예배 드린 청년
커다란 태양모를 쓴 채로 예배 드리는 청년에게 집사가 찾아가서 말했다.
'예배 시간엔 모자를 벗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는 것이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 큰 모자를 쓰신 이유를 물으니, 왈(曰) '저는 교회 나온지 4개월 가량 되는데, 누구하나 말해 주는 이 없음으로, 큰 모자라도 쓰고 있으면 말해 줄까 해서 썼더니, 벗으라고 말해 주는 분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토머스 제퍼슨의 청년기
미국, 어느 강의 나루터에서 한 노인이 추운 겨울날 벌벌 떨면서 서 있었다.

누가 자기를 좀 강 저편으로 건너 주기를 청하려는 것이었다. 마침 말을 탄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노인은 선뜻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말을 탄 사람들이 거의 다 지나가는데 노인은 맨 마지막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한 청년을 유심히 처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보게. 나를 좀 강 건너편으로 건너줄 수 있겠소?' 그 말을 들은 청년은 선뜻 노인을 말에 태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을 다 건너가서 이 청년은 노인에게 물었다.
'제 앞으로 많은 군인들이 말을 타고 지나갔는데 왜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지나가는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눈을 보고 있었네. 그러나 자네를 앞선 사람들은 모두가 아주 피곤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무엇인가 가득 차 있어서 남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네. 그런데 젊은이의 눈을 쳐다 보았더니 거기에는 평화가 있고 여유가 있으며, 이리저리 주변 풍경을 살필 줄도 알더구먼. 그래서 젊은이에게 부탁했던 것이오.'
이 청년은 그후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프랑스 좌파정부 청년 실업자 구제방안
동네분쟁 예방요원, 퇴원환자 재적응 지원요원, 수감자가족 응대요원,학교폭력 예방요원, 대중교통 동반요원, 범죄피해자 접대요원, 임대차계약 보조요원…. 지금까지 전혀 듣도보도 못한 이 직업들은 프랑스 좌파정부가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는 나왔으나 일자리를 못 구해 실의에 빠진 젊은 실업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21일 발표한 22가지 신종직업목록에 나
오는 것들이다.
프랑스 정부는 올해부터 5년간 총 3백50억프랑 (약5조원) 을 투입해 35만명에 이르는 젊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 (임금은 국고보조 80%, 지방자치단체보조 20%) 를 제공키로 하고 이날 직업까지 만들어 발표했다.
신종직업중 예컨대 동네분쟁 예방요원은 공공주차장.상가등 동네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에 배치돼 동네주민간에 발생하는 사소한 다툼이나 분쟁을 예방하고 필요시 뜯어 말리는 직업이다.
퇴원환자 재적응 지원요원은 환자가 퇴원후 완쾌돼 정상생활을 되찾을 때까지 환자 집을 왔다갔다 하며 환자의 의료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일을 한다. 수감자가족 응대요원은 교도소등 수감시설을 찾는 가족들의 필요에 따라 창안된 직업으로 부인이 남편을 면회하는 동안 동행한 아이를 돌봐 주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양로원이나 퇴직자 공동숙소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의 말벗을 전문으로 하는 무의탁노인 동반요원, 동네 '컴맹' 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주민정보화 지원요원, 이혼가정의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가정분쟁 중재요원, 갈수록 늘고 있는 미성년자범죄를 예방.중재하기 위한 청소년범죄 중재요원 등도 있다.
프랑스 지방자치단체나 공공단체.기관등은 정부가 제시한 22개 직종을 토대로 각자 필요에 따른 채용계획을 마련해 올가을부터 젊은이들을 고용하게 된다.
현재 프랑스의 26세 미만 실업자는 모두 58만3천명으로 전체평균 실업률


효자로 소문난 청년

어느 동네에 효자라고 소문이 난 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직장동료가 하도 궁금하여 퇴근길에 그의 집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그 청년과 함께 그의집에 들어선 청년의 친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청년은 대문을 발로 차며'엄마, 나 왔어. 이거 내 친구야'하고 하고는 마루끝에 걸터 앉으니 70이 다 되어 뵈는 노모가 '그래 그래 너 왔냐'하고는 반가이 맞이한다. 그 청쳔은 '엄마 내 구두좀 벗겨 줘'하며 발을 내미니 노모가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들의 구두와 양말을 벗기고는 '가만 있거라. 물을 가져오마' 하고는 대야에 따뜻한 물을 떠다가 아들의 발을 씻어주고 닦아주는 것이었다.
그 효자 청년은 꼭 세살된 어린아이 같이 행동을 했다. 그뿐인가 '
엄마 나 피곤해 어깨좀 주물러 줘' 라고 하니 노모는 그래도 즐거워 하면서 물을 버리고와서 어깨를 주물러 주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친구는 속으로 `원 세상에 저런 불효막심한 놈을 효자라고 하다니...' 하고 분개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노모는 유치원생을 돌보듯 아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주고 양말과 구두를 신겨준다.
친구는 '아니, 젊은 녀석이 노모를 하녀 부리듯 하다니...'하자 '자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그러나 우리 어머님께는 그것이 유일의 낙일세. 어머님 연세가 지금 70이라네 오래 사시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한다네'

성경 전 12:1-2

서론


'천년의 때를 인생황금이기라고 한다'


제목 '청년의 때'

1.창조주를 기억하라
본문 1 '아무 낙이 없다고 하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다'
2.주님의 재림과 죽음이 임하기 전에 창조주를 섬기라
본문 2 '일월성신이 어둡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마 19:22' 부자 청년은 영생에는 관심이 있었으나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3.청년의 정욕을 피하는 경건한 면을 택하라
딤후 2:22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라'
딤전 6:10-11)
'결론'
눅 7:14 죽은 청년이 살아났다'

자료/의성교회 이윤근목사

출처 : 낙송의 집
글쓴이 : 낙송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