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
굴욕의 고개 [ 끝 ]
대참패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천안에 방어막을 막 설치하고 적을 기다리던 미 24사단 예하 제34연대는 미군의 선봉인 TF Smiths 의 참담한 패배 소식을 접하자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사단장 딘 ( William F. Dean 1899~1981 ) 소장은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34연대장을 자신이 심임하고 있던 마틴 ( Robert R. Martin 1918~1950 ) 대령으로 즉각 교체시켜 현지로 급파시킵니다.
[ 대전으로 이동전 워커 8군 사령관 (左) 과 환담하는 딘 24사단장 자신만만한 모습이지만 가장 치욕스런 장군이 되었습니다 ]
그런데 전개를 마친 34연대가 전투도 치러보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연대장을 경질하고 부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조차 없는 인물을 신임 연대장으로 바꾼 것은 사실 올바른 지휘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34연대장으로 막 도착한 마틴은 행사장에 나온 것처럼 정복에 단화를 신은 상태로 부대지휘에 나섰습니다. 이 또한 결론적으로 북한군을 우습게 생각한 만용이었습니다.
[ 34연대가 TF Smiths 의 전철을 되밟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 천안에서 대패하고 허겁지겁 철수하는 35연대 ) ]
이러한 제34연대가 TF Smiths 의 전철을 되밟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북한군의 숨쉴 틈 없는 호된 공격에 연대가 급속히 붕괴되자 살아남은 나머지는 알아서 사단이 있는 대전으로 줄행랑치기 바빴습니다. 그 결과 미 제34연대는 80%의 손실을 보고 부대가 해체되었는데 전쟁 끝까지 재건되지 않고 해체된 유일한 연대라는 불명예를 가지게 되었고 마틴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최초의 연대장이 되어 훈장을 추서 받습니다.
[ 34연대도 피눈물을 흘렸으나 미군의 망신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
하지만 제19연대를 주력으로 하여 대전에 배수의 진을 치고 있던 미 24사단의 수모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예상외로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자 딘 사단장은 급거 제19연대를 직접 지휘하기 위하여 대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산의 TF Smiths 나 천안의 제34연대와 마찬가지로 전차를 앞세운 돌파와 북한군의 능수능란한 우회 포위 전술에 휘말려 위기에 빠져드는데 그리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 갑천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전방어에 나선 19연대 ]
제34연대의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나마 정신을 가다듬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에 저항하였으나 7월 20일 대전을 포기하고 옥천으로 후퇴하여 영동으로 진출하고 있던 미 1기병사단의 구원을 받고나서야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단장 딘 소장이 전투 중 실종되어 적의 포로가 되어 휴전 후에야 겨우 생환 할 수 있었을 정도로 미 24사단은 전사에 길이 남는 대참패를 당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대전으로 진입하는 북한군 ]
딘 소장은 유럽전선에서 1944년 12월부터 종전까지 미 44사단을 지휘하였는데 당시 적의 포로가 된 부하가 불과 42명뿐이었던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고 군인이 포로가 되어 적의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하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미군 역사상 적에게 가장 많은 포로를 만들어 준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본인도 포로가 되는 생애 최악의 치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 아군의 특공 구출작전이 있었지만 실패하고 딘 소장은 휴전 후 생환할 수 있었습니다 ]
한국에 처음 왔을 때 16,000명의 병력과 4,800대의 차량을 보유했던 미 24사단은 7월 5일 TF Smiths 의 오산전투를 시작으로 7월 21일 옥천전투에 이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7,000명의 병력과 장비의 60% 를 잃었습니다. 오만에 가득 차서 적을 깔보고 전장으로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들었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이었는지 미군은 똑똑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 미군을 격파하고 대전점령 후 자신만만하게 낙서를 하는 북한군의 모습 ]
결국 상황을 뒤늦게나마 제대로 판단한 미군은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 교두보를 구축하고서야 적의 진공을 막아내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보하고도 기존의 국군병력에 무려 3개 사단의 미군을 긴급투입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미군은 전쟁이 결코 네임밸류만 가지고 손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 전략적으로 방어선을 축소한 측면도 있지만 그 만큼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너무나 잘 알려진 진실을 망각하였던 미군은 죽미령에서부터 겪었던 치욕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각종 교육 등을 통하여 반복하여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미 육군사관학교의 교육관중 하나인 워싱턴 홀 ( Washington Hall ) 에 가면 미 육군이 참전하였던 기념비적 전투를 그려 넣은 스테인드글라스화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죽미령 전투 Battle of Osan 입니다.
[ 워싱턴 홀의 스테인드글래스 ]
전투를 벌이기전 가장 기본적인 상대 정보의 획득, 전투 지속능력 확보, 거기에 더해서 평소의 훈련과 군기의 확립 등 너무나 많이 알려진 승리를 위한 당연한 요소들을 망각하고 상대를 깔보아 개망신을 당한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그들의 각오라고 합니다. 자랑스러운 승전이 아닌 이런 악몽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미군 당국의 와신상담하는 모습을 우리 또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듯싶습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