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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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작동 국립 현충원을 찾아서

鶴山 徐 仁 2008. 6. 9. 20:40

해마다 현충일이 되면 나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는다.

작은 비석 하나만으로 남은 젊은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이다.

젊음을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프다. 내가 이들을 위하는 길은 이렇게 현충일에 꽃 한송이 들고 찾아와 충혼탑에 헌화하고 배향한 후 잠시 묵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불멸의 소설을 써서 이들을 후세인들에게 영원히 전하여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이다.

동작동 현충원에는 주로 일제시 독립운동하다 죽은 독립군들과 6.25 전쟁 시 죽은 군인들과 월남전 전사자들이 묻혀 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이름을 알만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6.25 전사자들 중에는 장군 이상은 6.25 전쟁사나  당시 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 이형근, 백선엽 등의 회고록에서 거의 읽은 기억이 있는 분들이다.

베트남 전쟁 참전사를 체계적으로 읽은 적은 없으나 월간 종합지 등에서 단편적으로 무수히 많이 읽었다.

그래서 나는 현충원에 가면 외롭지 않다. 작은 돌로 변한 이들과 무수한 대화를 나눈다.

장군 묘역에서 만난 육군 준장 김용주의 묘는 나에게 깊은 감회를 주었다. 김용주 장군은 내가 문리대를 졸업하고 유네스코에 취직했을 때, 총무부장을 하던 분이었다. 얼굴이 사자상으로 생겨 참으로 무서웠고 과연 장군 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으나 영어와 불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라 조금 뒷전에 있던 분이다. 조금은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백선엽의 6.25전쟁사에서 6.25 중 이분의 역할을 알게 되었다. 평양탈환전에서 그는 정면전투를 벌린 1 사단 이외에 평양을 옆에서 파고든 특수부대였는데 그 전공이 대단하였다. 죽음을 무릅쓴 특수 부대였다. 김용주 소령은 이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엘리트들이 집결한 유네스코에서 그는 현대 세계어인 영어와 불어에는 무지했으나, 과연 위대한 군인이었다. 그분이 여기에 묻혀 있다니. 나는 비석을 어루만지며 회고에 젖었다.

평양 탈환, 백선엽 당시 1군 사령관은 그 위용을 세계 어떤 전사에도 없는 당당한 것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그는 평양이 자신의 고향임을 미군으로 하여금 상기시키고 적어도 적도 평양 탈환만큼은 자신이 지휘하는 한국군 1사단이 최초로 하도록 양해를 구했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그대로 되었다.

그러나 나의 상상력으로는 김유신 휘하의 신라군의 평양성 함락도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의 평양 탈환 못지 않게 위무도 당당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 김유신은 벌써 일흔을 넘긴 노장군이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탈환한 김유신 부대의 수하 장수들에게 나누어준 왕의 하사품이 있는데, 주로 귀족 작위와 땅, 수천 석의 곡식이었다. 이때 너무 과도하게 나누어준 작위와 하사품은 후일 신라가 귀족사회로 성장하여 왕권에 저항하는 토후들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으니 역사란 과연 알고도 모를 일이다.

당시 고구려를 침략하는 당나라군은 유인궤 설인귀 이적 등이 지휘하였고, 신라군은 김유신 김인문 흠순(김유신의 동생) 품일 김삼광(부장, 유신의 맏아들)등이 지휘하였다. 김유신을 백제 정벌의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평양성 함락의 주인공은 오히려 김인문이었다고 사서들은 적고 있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세째 아들이었으나 삼국을 통일하고 난 후 당 나라에서 살다가 그대로 죽었다. 품일은 우리가 잘 아는 화랑 관창의 아비되는 사람이다.

삼광은 유신의 맏아들로서 아비 못지 않은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두째 아들 원술은 전쟁에 패하고도 죽지 않고 돌아왔다는 죄목으로 죽을 때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뵙지 못했다.

이 위대한 가문도 몰락의 길을 걸어 가문 전체가 육두품으로 떨어지게 된다. 역사 속에서 유신은 질시와 폄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역사서는 적고 있다.

우리 등산객들에게는 낯익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진흥왕(24대)이 죽었을 때, 문제가 생겼다. 맏아들 동평이 죽었기 때문에 맏아들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해야 마땅하지만, 진흥왕은 두째 아들 진지(25)를 왕으로 명하고 죽었다.

그러나 신라는 순수한 왕조국가이지만 역시 화백제도 등으로 합의제가 조금은 남아 있었다. 진지왕이 죽었을 때 맏아들 용춘(춘추의 아비)이 제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평의 맏아들 진평(26대)왕으로 이어져 갔다. 그래서 춘추의 왕위 계승은 한참 멀어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골(전 왕의 아들과 딸)에서 진골(선왕의 삼촌 등)로 격하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57명이나 제위한 신라 왕통은 동평계와 진지계가 치열한 암투를 벌리게 된다.

진평왕은 삼촌의 가계대로 흘러갈 뻔한 왕통을 돌려 받았으나, 후대 아들이 없어서 선덕(27대),진덕(28대)로 이어져갔다. 그래서 춘추의 왕위계승 순위는 한참 밀려버렸고, 사실 왕위계승을 바라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진덕 역시 후손이 없자, 알천이 왕위계승 영 순위로 떠올랐다. 왕실 최고의 원로로 인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춘추를 강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오르게 한 사람이 유신이었다. 당시 백제 고구려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을 치르던 신라는 승승장구하는 상승장군 유신의 막강한 힘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유신의 아내가 춘추의 세째 딸이다.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던 상승장군 유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춘추에게 알천은 대항할 의욕을 버리게 되고, 연부역강한 춘추(29대)에게 왕위를 양보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무의 힘을 느끼게 한다. 왕통은 다시금 동평계에서 진지계로 넘어온 것이다.

유신의 무력은 왕통의 흐름을 바꾸었고,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고구려의 주력군이 당군과의 전투를 위해 만주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라군의 평양성 함락은 거의 무인 지대의 질풍노도와도 같은 진격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평양성은 고구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신라군은 조금 고전하였고, 당시 수훈자들의 전공을 보면 동문 파괴자 북문 파괴자 남문 파괴자 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평양성 함락전 중 전사한 장군이 있는 것을 보면 그리 쉬운 전쟁인 것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김유신이 치른 통일전쟁 중 백미는 역시 백제의 명장 계백의 5천 결사대와 겨룬 5만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이다. 혹자는 삼국통일이 마치 17만 당군에 의한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신라는 외세을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통일전쟁의 주체는 역시 신라군이었다. 백제멸망을 결정지은 황산벌 싸움에서 신라군이 승전하고 있을 때, 백강 입구에 도착한 당군은 싸움한 번 하지 않고 서해에 그냥 떠 있었다고 한다. 이들 당군은 백제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린 것이 아니라, 황산벌 싸움에서 패하고 기진한 벡제군과 단 한번 싸웠을 뿐이었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새삼스레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프다. 쇠고기 파동으로 우리들의 젊은이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미국은 6.25 전쟁시 자신들의 젊은 아들을 3만 6천명이나 우리 한반도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것을 보면 미국은 역시 거대한 나라이고 역동적인 나라이다. 자신들과 별 관계도 없는 작은 나라의 전쟁에 자신들의 아들을 3만 6천명이나 목숨을 바치게 했다니. 자유수호라는 명목으로.  아무리 이념논쟁으로 당시 공산권과 대립하고 있던 민주자유진영의 리더라고 하지만 과연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최근 <red river>라는 오래된 영화를 한편 보았는데, 존 웨인과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서부극이었다.

미국의 서부에서 만 마리의 소떼를 몰아 붉은 강(리오 그란데강)을 건너 미주리 주로 이동하는 소떼 주인과 고용인의 이야기였다. 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서부극이 지금 이순간 역동적인 에너지를 간직한 한 국가의 숨겨진 모습을 느끼게 하였다.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어 이웃나라들을 위협하는 테러성 짙은 나라들을 미국이 아니면 어느 나라가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빨리 정년을 하고 싶다. 그래서 여생을 소설 창작에 전력투구 싶다.

나는 44년 생이지만 생일이 2월이라, 43년 생들과 함께 정년을 맞는다. 대학력은 3월 1일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손해본다고 말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대학을 영원히 떠나고 싶다. 제대 말년의 고참병사가 매일 아침 부하로부터 남아 있는 제대일자를 보고받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 병장 말년의 심정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요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한, 요즈음의 대학가 풍토는 교수가 연구와 강의 준비 이외에 개인적인 작업을 하기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편하고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과거 대학과는 체질이 많이도 달라졌다.괜히 마음이 다급하여서 소설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나의 무기력을 대학가의 변한 풍토로 돌리는 것은 아니다.

그 넓고 넓은 동작동 현충원의 구도를 자주 왔기 때문인지 이제는 대략  알 것만같다.

충혼탑에서 정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면,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소가 나오고, 여기 주변에는 국가유공자 묘역이 있고,이어서 조금 좌편으로 우남 이승만의 묘소가 나오고, 조금 더 직진하면 박정희 묘소가 나온다. 여기 고지대에는 장군 묘역이 있고, 충혼 탑 인근 저지대에는 사병묘역이다.

2시에 입장하여 5시까지 돌았다. 5시 경 광윤이 전화가 와서 그의 식당으로 갔다. 효자로 소문난 광윤, 대전 현충원 국가 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간줄 알았는데, 감기가 걸려 코를 훌쩍거리면서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가 내어주는 콩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막걸리 잔을 채워, 마로니에 홈페이지 회원 50분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가슴에 이는 나의 이 행복감을 누가 알아주랴...감사합니다...광윤과 50 명 입회 축배의 잔을 나누었다. 근 십년 이래로 내가 심혈을 기우린 마로니에 모임의 일종의 결실이라면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무엇엔가 쫓긴 듯 정신없이 두 발로 달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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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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