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이곳이 바로 ‘삶의 길’

鶴山 徐 仁 2008. 3. 31. 01:03
제주 '올레 길' 을 걷기 전에…
제주의 '올레 길'은 순례길이다. 성 야고보의 묘를 참배하는 이른바 '산티아고 순례길'이 종교에 바쳐진 길이라면, 제주의 올레 길은 바다의 아름다움과, 걷는 이의 삶에 바쳐진 길이다. 그 길이 품고 있는 역사와 형태는 다를지언정, 무릇 '종교의 길'과 '삶의 길'의 목적지는 같을 터. 그렇다면 이 두개의 길은 '걷는 이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 아닐까

제주의 올레 길을 걷다보면 생각은 깊어지고, 삶은 정리된다. 제주에서 바다, 또는 민가의 돌담을 끼고 걷는 몇시간의 도보여행은 참으로 희한하게도, 육신의 피로를 통해 정신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이 길은 그저 가벼운 '도보여행 코스'가 아니라, 순례길에 더 가깝다. 종교와 참배는 없지만, 그 길을 걷다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숙연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올레 길은 마을 안의 돌담길부터 바다를 끼고 도는 해안길까지 실핏줄처럼 이어져 있는 명확한 코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은 속도나 주파를 위한 것은 아니다. 남들이 5시간에 걸쳐 걷는 길을 3시간 만에 주파했다고 자랑하는 그런 길이 결코 아니다. 그저 느릿느릿 '간세다리(게으른 걸음이란 뜻의 제주방언)'로 걷는 길이다. 한 코스를 다 걷지 못한다 해도 좋다. 그저 마음이 닿는 만큼 걷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족하다.

올레 길에는 안내자는 물론이고, 친절한 팻말조차 없다. 그저 돌담 위에, 혹은 길바닥에, 전봇대에 아무렇게나 그려넣은 듯한 푸른색 화살표만이 가야할 길을 알려준다. 이런 화살표는 갈림길이면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찬찬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저 풍경에 빠지거나 생각에 잠겨 걷다보면 자칫 화살표를 놓치고 길을 잃게 된다.

화살표를 놓치고 몇번 길을 잘못 든 뒤에 슬며시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한참을 걷고 나서야 곳곳에 화살표를 숨기듯 그려 넣은 뜻을 알게 됐다. 숨겨진 화살표는 상념에 빠지거나 아름다움에 취한 보행자들을 가끔씩 흔들어 깨운다. 그러고는 길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찮게 지나치곤 하는 뒹구는 돌이나 쌓아놓은 돌담,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린 유채꽃의 새삼스러움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화살표는 그 길을 안내하는 역할과 함께, 보아야 할 것을 알려주는 화살표의 역할도 훌륭하게 해내는 셈이다.

#외돌개 ∼ 월평포구 6시간을 걷다
올레 길은 지금까지 총연장 63㎞의 4개 코스가 공개됐다. 1코스는 자그마한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해 말미오름을 거쳐 성산일출봉섭지코지를 잇는다. 성산포의 일출봉과 바다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곳이다. 2코스는 쇠소깍에서 천지연폭포를 지나 외돌개까지 이어진다. 자연경관과 함께 문화의 향취까지 듬뿍 느낄 수 있는 코스다. 3코스는 조용한 해안마을의 포구와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 봄날의 정취에 가장 어울린다는 길이다. 외돌개에서 법환포구와 강정을 지나 월평포구를 잇는다. 4코스는 월평포구에서 시작해 중문을 지나 대평포구까지 가는 길이다.

제3코스(15.1㎞)의 길을 쉬엄쉬엄 6시간동안 걸어봤다. 포근한 봄날은 더 할 수 없이 화창해 멀리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었고, 숲길은 폭신했다. 간혹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다져진 포장도로도 나오긴 했지만, 몇 곳을 제외하고는 차량들의 경적이나 위협이 거의 없는 한적한 마을길이었다.

3코스의 출발지는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서귀포쪽의 외돌개다. 외돌개 입구 아래쪽의 찻집인 '솔빛바다' 테이블에 앉아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제주의 푸른 바다와 걸어야 할 길을 내다보았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색. 이 바다는 화살표를 따라 터덜터덜 길을 걷는 동안 마치 '말없는 동행'처럼 줄곧 왼쪽 어깨쪽으로 따라와 붙을 터다.

외돌개 아래 해안가 솔숲에서 시작한 길은 나무데크로 잘 정비돼 있는 돔베낭길로 이어진다. 제주 말로 '돔베'는 도마이고, 낭은 '나무'다. 그렇다면 '돔베낭길'이란 '도마 나무 길'이란 얘긴데, 잎이 도마처럼 넓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이름에 걸맞게 상록림의 넓적한 이파리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늘어서 있다. 곳곳에는 유채꽃들이 단정하게 묶어놓은 꽃다발처럼 군데군데에서 환하게 피어났다.

#걷는 이들과 주민들이 함께 길을 내다
돔베낭길을 지나 소공원에서 해안경비대 초소구간으로 내려서면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잘 다져놓은 흙길을 만난다.
이 길의 이름은 '수봉로'다. 여기서 한참을 더 가서 강정천 부근에 해안쪽으로 내려서는 구간이 있는데, 이곳에도 돌을 쌓아 만든 다리에 '수봉교'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고작 10m 남짓한 초라한 흙길과 다리인데다, 이름이 적힌 팻말도 없어서 보통은 눈치조차 못채고 지나는 구간이다. 이 길과 다리에는 왜 '수봉'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올레 길을 만든 이들에게 들은 얘기는 이랬다. 지난해 11월쯤 자원봉사자들이 이 구간을 개척하던 중 길이 끊겨 고민했단다. 그런 와중에 마을의 자원봉사자인 '김수봉씨'가 삽과 곡괭이로 비탈진 흙길을 계단식으로 다듬고, 돌을 주워 다리를 놓아 길을 이었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날품을 파는 막일꾼이었던 김수봉씨는 우연히 올레 길을 만드는 자원봉사에 나섰다가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길을 놓은 것이다. 그래서 당초 '바다로 내려가는 기정길' 혹은 '붕댕이소 징검다리'였던 이름을, 그의 열정과 공로를 기억하기 위해 '수봉로'와 '수봉교'로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올레 길은 새 길을 찾는 눈밝은 이들과 제주의 주민들이,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함께 내고 있는 길이다. 그래서 그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광보다, 때로는 길에서 만나는 사연이나 인연이 더 마음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돔베낭길이 끝나자마자 만나는 호근동 하수종말처리장. 말이 하수종말처리장이지 냄새도 없고 공원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이곳은 수시로 찾아드는 도보여행자들로 번잡스러울 법 하건만, 문을 걸어잠그기는커녕 사무실을 개방해 아무나 들어가서 차를 타서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해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내 집처럼 소파에 기대 차 한잔을 마시면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 길이 제주에 대한 생각을 바꾸다
사실 이런 풍경은 제주에서는 생경한 것이었다. 누구든 제주를 다녀온 여행자라면 관광지마다 손을 벌리는 입장료에다가, 터무니없이 비싼 음식값, 불친절 등의 불쾌한 체험을 해보았지 싶다. 퉁명스러운 주민들의 인심도 마찬가지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외딴 마을에서 촌로들은 외지인들에게 "밥 먹었냐"부터 묻곤 소매를 잡아끌거나, 불쑥 잘 익은 감을 내밀기도 하지만, 제주에서는 웬만해서는 이런 경험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올레 길에서만은 다르다. 보통 관광객들의 동선에서 벗어난 이 길에서는 마당의 귤나무에서 귤을 따서 건네는 아낙도 있고 바가지에 물을 떠서 건네는 아저씨도 있다. 근사해보이는 별장 주변을 기웃거리자, 외지의 한 노년 부부는 들어와서 보라며 문을 열어주곤, 집을 지은 내력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왜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순하고 친절한 것일까. 그것은 '걷는 이들에 대한 호의'아닐까. 만일 그 길을 차를 몰고 왔다 돌아갔다면 어땠을까. 제주의 인심이 사납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상은 차를 타고 관광객들의 발길로 닳아빠진 동선을 따라 이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올레 길 위에서, 그 길의 몇몇 식당에서, 또 붕어빵을 구워 파는 행상 아주머니에게서 순박하고 정감어린 배려를 받아본 뒤 내린 결론이었다.

올레 길은 잘 지어진 별장들과 해안마을의 돌담, 비닐하우스 등을 돌아나간다. 길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화살표를 따라 이어진다. 자그마한 법환포구를 지나, 강정해안을 지나고 3코스의 종착점인 월평포구에 닿았다. 월평은 그곳이 포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자그마한 어촌이다. 포구래야 5t 미만의 배 두세 척이 묶여 있는 게 전부. 외지인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포구는 나른하고 조용하다. 3코스는 여기서 끝나지만, 올레 길은 끝이 아니다. 새로 만들어진 4코스는 이곳 월평포구에서 출발해 주상절리와 중문을 지나 대평포구에 닿게 된다. 그리곤 5코스와 6코스가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와 제주 사람들의 소박한 삶 사이로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그 길을 다시 되돌아가다
6시간에 걸쳐 3코스를 차분히 돌아본 뒤에 2코스와 1코스의 올레 길도 궁금해졌다. 이튿날 다시 되돌아서 1코스와 2코스의 하이라이트 구간만 2시간씩 짧게 걸었다. 사실 올레 길은 완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길이니만큼 어디서 시작하든, 또 어디서 끝을 내든 그것은 온전히 걷는 이의 자유다. 2코스에서는 지난해말 서귀포시의 천지연폭포 주변에 새로 만들어진 소공원을 끼고 도는 길을 걸었다. 상록림이 울창한 길에서 숲 사이로 여유있게 천지연폭포를 내려다보는 맛이 각별했다.

1코스에서는 성산 부근의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해 말미오름에 올랐다. 오름에서 내려다본 우도와 일출봉, 섭지코지쪽의 풍광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만큼 장쾌했다. 우우 몰아오는 바닷바람은 몸을 능선 위의 길로 떠밀었다. 오름의 능선에 오르자마자 이 길이 왜 올레 길의 첫 코스에 올랐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제주의 바다는 다양한 농담의 푸른빛으로 빛났고, 곳곳에 피어난 꽃과 푸릇푸릇 싹이 오른 풀들이 환하게 대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한 달짜리 제주 올레 길이 다 만들어지고 그 길 위에 서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와 마음과 같아질까. 처음에는 조급증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 서서히 보폭을 줄이고 속도를 늦추기 시작할까. 가져온 짐들도 점점 줄여서 최소한의 소지품만 남게 될까. 그래서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움켜쥐고 왔던 것이, 사실은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걷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란 깨달음도 얻게 될까. 그리곤 또다시 바쁜 도회지로 돌아가서 그 깨달음도 금세 다 잊고, 생각이 산란해질 때마다 그 길에 섰던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