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보도를 보면 OECD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부모의 소득이 낮을수록 부모를 찾는 자녀의 발길이 줄어든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부모 소득이 1% 높아지면 부모가 자녀와 1주일에 한 번 이상 대면할 가능성이 두 배 높아진다는 수치가 나왔다. 늙어서 자식 얼굴 자주 보고 싶으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노인들의 푸념을 이 조사결과가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사회와 사회정의를 말할 때마다 사회 구성원의 사회적 책무를 들먹인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나 '톨레랑스(tolerance·관용)'라는 말에는 그러한 실천윤리가 담겨있다. 좀 더 배우고,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가진 자들이 나누고 베푸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법인카드로 밥을 먹고 여행하는 계층만이 아니라 제 돈 내고 제 밥 먹고, 제 돈으로 제 차에 기름 넣은 계층에게도 사회적 윤리는 필요하다.
가난하지만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의 오만(傲慢)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될 수 없는 세상에서, 실로 평범하고 나약한 자들의 양심과 윤리야말로 사회와 국가를 건강하게 지키는 가장 큰 힘이다.
불경기라고 해서 초등학교 철제 교문을 뜯어가고 맨홀 뚜껑을 실어가는 자들이 설쳐대는 사회에 무슨 장래가 있겠는가?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다지만 교통표지판을 뽑아가고 군사지역 경계용 철조망을 걷어가는 국민이 있다면 그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나?
근래 우리나라 국민의 가치관은 '잘 먹고 잘 살자 주의'라는 말을 듣게 된다. 물론 자조적인 농담이겠으나 이게 무슨 가치관인가. 지난 시절 우리가 부르던 새마을운동 노래에는 '잘 살아보세'라는 가사가 있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고 했지 '나 혼자 잘 살아보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 공동체 윤리를 바탕으로 이룩한 근대산업사회와 민주국가의 뒤끝이 '잘 먹고 잘 살자 주의'란 말인가? 그러한 철학으로 선진국을 이룩하고 선진국민이 되고자 한단 말인가?
눈물 흘릴 일 없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아직도 나를 울리는 세 가지가 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그 하나고, 연말이면 신문지상에서 만나게 되는 검정고시 합격생 이야기와 평생 김밥 팔아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기부했다는 할머니 이야기가 나머지 두 가지다.
이산가족 상봉은 성격이 다르지만, 검정고시 합격생과 김밥장수 할머니 이야기에 감격하는 이유는 그들의 거룩한 복수심 때문이다. 그들이 이 한심한 세상에 던진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자의 인격이 일으킨 저항의 파도로 인해 나는 눈물 흘린다. 그러한 보통 사람들의 단순한 실천이야말로 부패한 재벌과 비리를 비리로 돌려막는 정치인, 곡학아세하는 지식인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부유층을 정화하는 막강한 힘이 된다.
어떤 자리에서 '없는 자들은 카드를 카드로 돌려막고, 있는 자들은 비리를 비리로 돌려막는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비리를 비리로 돌려막는 자들의 부도덕도 큰일이지만 카드를 카드로 돌려막기 바쁜 자들마저 최소한의 양심을 내동댕이친다면 더 큰일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부패와 타락은 전멸의 징조다. 그들이 자신의 가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부정을 처세술로 여기고, 양심을 외면한 채 비리와 슬쩍 손잡고 '잘 먹고 잘 살자 주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회적 저항력은 소멸한다. 지갑이 돌아오지 않는 사회, 돈 없는 부모는 찾아보지 않는 사회, 초등학교 교문을 뜯어가는 사회의 미래는 없다.
이 혼돈과 무의미의 시대에 우리가 진정 갖춰야 할 가치관은 보통 사람들의 윤리와 인격 회복이다. 동사무소 창구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리지만 새벽마다 날품 팔러 가는 아저씨, 아이 병원비 빌릴 데조차 없지만 옆집 노인의 연탄불을 갈아주는 아줌마, 48년 동안 운전하다 만 67세 되던 지난해 개인택시를 땄으나 승객이 두고 내린 전세금 6000만 원을 돌려준 택시기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윤리가 이 사회와 국가를 지키는 진정한 힘이다. 가난하고 못 배웠더라도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들의 오만보다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심상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