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태생이지만 내게 김천이란 도시는 꽤 익숙한 곳이다.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도시 풍경이 상당히 우중충하다는 것과 담장이 예외 없이 약간 어두운 빛이 섞인 노란색 일색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노란색은 오방색 가운데서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다. 황악산의 산 이름에 '황(簧)'자가 들어간 것은 소백산맥의 봉우리 하나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중앙에 우뚝 솟았기 때문이다. 20~30년 전, 김천 시내의 집 담장들의 색깔이 온통 노랗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새마을운동이 남긴 획일성의 결과물이었을까. 직지사엔 몇 차례 다녀갔지만 이상하게 황악산 꼭대기까지 오른 적은 없었다. 오늘은 직지사를 들른 다음 황악산 정상인 비로봉(1111m)까지 다녀오리라.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오기택 노래 '추풍령')" 추풍령을 지나자 금방 황악산에 이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의 본사인 직지사는 황악산 아래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그네를 맞는다. 직지라더니 꼬부랑길이 웬 말?
일주문을 지나면 곧장 대양문과 금강문, 사천왕문이 이어진다. 직지사는 이래저래 한눈팔 틈을 주지 않는 절이다. 김삿갓이 직지사의 중과 글짓기 내기 끝에 지었다는 '발치직지승(拔齒直指僧)'이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시는 "直指由中路曲何(직지유중로곡하직지라 했는데 산중 꼬부랑 길은 웬 말인고)"로 결구를 맺는다. 김병연의 뛰어난 재치가 직지사 중을 크게 한 방 먹인 셈이다. 지는 편의 이빨을 뽑는다는 게 내기의 내용이었다니 '전설의 고향' 못지않은 으스스한 납량특집이 아닐 수 없다. 2층 누각인 만세루 아래 아이들이 놀고 있다. 모르긴 해도 저 아이들은 김삿갓과 직지사 중이 했다는 그런 끔찍하고 저질스런 내기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이들만도 못한 어른들이 많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모양이다.
대웅전 안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을 봉안돼 있다. 그 뒤에는 길이 6m가 넘는 거대한 세 폭의 후불탱화가 펼쳐져 있다. 석가모니불 뒤로 펼쳐진 영산회상도가 장엄하다. 광배에 그려진 물결 같은 무늬가 특이하다. 조선시대 후기 불화의 대표적인 기법이다. 거대한 후불탱화보다 내 눈길을 오래도록 사로잡는 것은 대웅전 오른쪽 벽과 포벽에 그려진 아름다운 채색벽화 들이다. 구름을 탄 선인과 용을 탄 관세음보살, 문수동자상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득한 천상으로 이끈다. 포벽에 그려진 백의관음 별화를 바라본다. 뭉게구름 위,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을 든 백의관음이 어린 남순동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윽해지고 평안해지는 듯하다. 대웅전 마당에는 직지사의 말사인 문경 도천사에서 옮겨온 두 개의 삼층석탑이 서 있다. 탑의 상륜부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유물이든지 그 자리를 떠나면 의미와 가치가 반감되기 마련이다. 대웅전의 위세를 장엄하려고 가져왔을 테지만 바라보는 이 두 탑의 존재가 번잡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대웅전을 나와 비로전을 향해 왼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사명각이 있다. 승병장이자 뛰어난 선승이기도 했던 사명당이 이곳에서 신묵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했으며 한때 주지를 맡기까지 했다.
천불상은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모습도 제각기 다르다. 불상의 재료로는 경주 특산인 옥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천불상을 바라보노라면 세상의 모든 부처님을 모신 듯 숙연한 자리다. 나는 천 개의 부처를 바라보지만 천 개의 부처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눈부셔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로자나불 뒤에 서 있는 발가벗은 동자상이 없다. 법당에 들어가 참배할 때 이 동자상이 처음 눈에 들어오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는 동자상이다. 아마도 사람들의 빈번한 손길을 견뎌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성보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면으로 보이는 석조관세음보살좌상이다. 사자의 앞발을 잡고선 목조동자상이 앙증맞다. 본디 문경 김룡사에 있던 것이라 한다. 내게 직지사라는 절은 볼 것이 너무 많은 절이다. 아름다운 유물을 감상하고 나면 미처 느끼고 음미할 새도 없이 또 다른 유물이 기다린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아름다운 것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라고 했지만 아름다운 것도 너무 많으면 번잡스럽고 권태로운 법이다. 이제 허공은 그만 가리키고
선원 안에는 극락전과 향경다실, 서상당 등의 건물이 있다고 한다. 부도밭은 아마도 극락전 뒷동산에 있는 모양이다. 절의 전각 배치도에도 안 나와 있는 부도밭이 몹시 궁금하다. 한참 안양루와 산봉우리들을 우러러보고 있노라니 스님 한 분이 성큼성큼 도피안교를 건너간다. 나에겐 피안인 선원 영역이 저 스님에겐 차안이다. 저 스님이 용맹정진하는 스님이라면 내가 딛고 선 직지사 영역이 도리어 피안일 것이다. 나는 스님의 피안이 궁금하지만 스님은 내가 몸담은 속세가, 그 피안이 그리울는지 모른다. 황악산으로의 본격적인 산행을 서두르기 전 산중다실 앞 벤치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른다. 지금 직지사 주지를 맡고 계신 스님은 성웅 스님이시다. 3년 전, 남장사에서 스님과 차를 마시며 나누던 한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얘기 내내 스승에 대해 품고 있는 그의 각별한 존경심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때로는 글씨를 쓰기도 하면서. 그의 스승은 조계종 제4대 종정 윤고암 스님이다. 자비보살의 화신으로 한평생을 사셨다고 회자되는 스님이다. 직지사는 그의 스승인 고암 스님이 제산 스님을 모시고 천불선원에서 한철을 보냈던 절이기도 하다. 그는 불교계 안팎에서 청정한 스님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자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절 살림을 맡다 보니 자신이 비록 선승들처럼 수행에 용맹정진하진 못할지라도 새벽 예불을 거른 적이 없으며 어느 고승처럼 몇 십 년 동안 불와(不臥)하지는 못할지라도 자동차 시트에 몸을 묻는 일은 없다고 했다. 자신에게 한없이 엄격한 그의 면모가 느껴졌다. 어미를 따라온 어린아이에게도 그는 맞절을 한다. 지난번 초파일날 도량애 내건 등은 이천 남짓, 부모를 모시고 오는 출향인사만도 두셋쯤은 되니 이 곳을 찾은 사람의 수효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가사 장삼 갖추어 입고 그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어서 오시라 인사하려니, 그 일도 대단한 공부가 되더라 했다. 그러면서도 신도들로부터 '무서운 분'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그는 억울하다. 무섭다는 말은 내가 생명을 해치려 한다거나 흉칙한 마음을 먹었을 때나 들을 만한 말이오. 그런 맘이 없으니 '좀 어렵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난 인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 <봐라 꽃이다>244쪽, 도서출판 호미, 2002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왜 손가락을 보나?'라는 선문답이 떠오른다. 본질을 보지 않고 현상만 보려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다. 물질이 승하고 정신이 쇠퇴하는 시대에서 본질을 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소외인가? 성웅 스님이 직지사에 온 지 2년 8개월, 성웅스님을 만나 그가 이곳에 일으켰을 바람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이대로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가 뜻하는 개혁이 제대로 이뤄져 직지사가 허공을 가리키는 직지(直指)가 아니라 땅을 가리키는 직지(直地)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우리나라 어느 절집보다 더 확실하게 생활에 뿌리박은 실천불교가 이곳에서 이뤄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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