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골든의 하늘은 환상적이다. 저 멀리 록키의 준령들은, 떠나는 열차처럼 꼬리를 이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섰는데, 그 너머로 해 잠깐 비껴 섰다가 이내 슬그머니 사라지고, 하늘은 붉은 너울 몇 번 펄럭이다가 재색으로 서서히 물든다. 산 머리를 덮은 영봉의 눈들은 넘어가는 해의 마지막 화살을 맞고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었으나, 달 뜨자 언제 그랬냐는듯 새초롬히 돌아앉아 딴청을 부린다. 길섶에는 아직 길떠나지 못한 민들레 몇 송이 바람을 기다리나, 바람은 하루의 일과에 지쳐 숲속에서 살짝 잠들어 있다. 새는 날지 않고 도로에 차 하나만 외롭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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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저녁식사는 숙소와 붙어있는 중국집에서 하였다. 음식은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다만 좁은 테이블에 무조건 10명씩 꽉꽉 채워 앉게 하는 바람에 식사 중 옆 사람과 팔이 자주 부딪히어 불편함을 유발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식사는 코스별로 나왔는데 코스들은 대체로 길이가 짧았다. 사람들은 뒷사람이 신경 쓰여 음식을 제대로 들어내지를 못했고 한번 동이난 음식은 추가 보충 불가였다. 단 밥만은 예외였다.
술은 있었다. 가격도 괜찮았다. 와인 한병을 시켜 학생 다섯 명은 빼고 같은 테이블의 어른 다섯 분 앞에만 잔이 돌아가게 했다. 단체 여행에서 술을 마실 때 마다 느끼는 당혹감이지만 술잔의 배분은 늘상 어려웠다. 내돈으로 샀다고 이 동방예의지국에서 나 혼자만 마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테이블의 전원에게 같이 마시자며 술잔을 내밀기도 그랬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술값은 개인 부담이라 전원의 비용을 내가 부담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백수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만용이니까.
가장 손 쉬운 방법은 안마시면 되는데 집에서도 한 두잔을 반주로 즐겨 마시는데, 이 명승고적에 와서 술 한잔 없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금강산을 눈 감고 구경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논리가 성립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담배는 금연석 비금연석을 구분하면서, 술은 음주석 비음주석을 구별해서 취급하는 여행 패키지는 왜 안 생기는지. 팔순의 할머니는 와인을 아주 맛있게 드시면서 손녀들에게 자랑스럽게 한 마디 하셨다.
"와인은 몸에 좋아, 나도 전에는 식사 때마다 와인 한 두잔은 언제나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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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아침은 다시 돌아왔다. 늦은 조반을 마치고 (단체가 많아서 조반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차에 타니 발빠른 손님들이 목 좋은 자리를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경로석 그런 것도 없어진 것 같았다. 어제 마이클이 좌석을 공평하게 여러 사람이 균등하게 사용하는 방안에 대하여 안을 내놓았으나 실제 실행하기는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학생들이 주로 뒷좌석에 앉아 그나마 중간쯤 창가에 앉을 수가 있었다. 하나 다행인 것은 할머니가 이미 경로석에 앉아계셨고, 우리 자리가 공포의 흰 장갑으로부터 한참 뒤라서 그의 '가리개권'에서 벗어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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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뭍에 있는 배에서 식사를 하는 여행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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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차는 1시간 30분을 달려 요호(Yoho) 국립공원에 도착하였다. 캐나다 록키의 본격적인 관광이 시발되는 지점이다. 먼저 에메랄드 호수에 들렸다. 물빛이 너무 푸르러서 이름 마저 에메랄드로 지어졌다는 호수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물색깔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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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아직 일러 그런지 호면에는 배 한 척 떠다니지 않고, 다만 제대로 퍼지지 못한 아침 햇살만 그의 흰빛 창들로 호면을 이리저리 찔러보고 있었다. 호수는 푸르디 푸른 방패로 햇살의 공격을 요리조리 막아내나, 간혹 실수로 물비늘 몇개 파득이며 키득 거리고 웃는다. 머리에 눈을 인 호숫가의 산봉우리들은 호면에 머리를 담구고 눈을 �어내려 도리질을 해보지만, 눈은 떨어지지 않고 호수에 제 얼굴만 퐁당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자연이 쓴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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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잘 조경된 호숫가를 걸어올라가는데 공원 관리인인듯한 사람이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민들레처럼 보이는 꽃들이 여기저기에 피어 있어,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이 꽃 이름이 무엇이에요?"
그는 나를 귀찮은듯 힐끔 쳐다보더니 퉁명스레 대답하였다.
"민들레(Dandelion)요."
이 여름의 초입에 지금에사 민들레라니. 그들은 피어서 한들거리며 에메랄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악 자리를 뜨려는데 이 백인 아저씨는 나를 쳐다보며 정색을 하며 한마디 덧붙혔다.
"그것은 꽃이 아니고 잡초(Weed)요."
내가 '꽃' 이름이 무어냐고 물은데 대한 항의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막대기처럼 이상하게 생긴 기계로 민들레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여기서 민들레는 잡초구나. 민들레의 잘려나간 자리의 푸른 멍들이 어쩌면 호수의 물빛을 파랗게 물들게 한 건 아닌지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어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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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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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다음 행선지는 자연의 다리(Natural Bridge)였다. 킥킹호스(Kicking Horse) 리버라는 요상한 이름을 가진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자연에 의하여 만들어진 다리라는 거였다. 안내판에 의하면 모래와 자갈을 실은 킥킹호스강의 물살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하상을 깎아내고 석회석 바위를 갉아내어 드디어는 바위에 구멍이 뚫리고 사람이 건늘 수 있는 다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크게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가이드의 말로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자연이 만든 다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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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사진을 몇장 찍고 다시 차로 이동하여 세계 10대 경관 중의 하나라는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로 향하였다. 차가 갈수록 록키산맥의 중심부위에 가까워 지는지, 산들은 더욱 더 높아지고 험해지고 눈은 더욱 깊이 쌓여있다. 루이스 호수에 닿기 전에 레이크 루이스 스키장에 들러 점심을 해결하고 그곳의 리프트를 타고 산정에 올라 록키의 준령들과 건너 보이는 루이스 호수를 감상키로 하였다. (돈 25불 내야하는 선택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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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식을 마치고 리프트를 타러 가는 관광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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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4인승짜리 리프트는 10분도 안되는 시간에 우리를 해발 2000m의 고지에 올려놓았다. 리프트에 내려서 전망 포인트에 다가 서자, 계곡 너머로 거대한 록키산맥의 준봉들이 캐나다 대륙의 등뼈를 이루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용틀임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는, 높이 3000m가 넘는 산만해도 십수개가 넘었다. 템플산, 바벨산, 스톰산, 페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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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망 포인트에서 바라다 보이는 록키의 준봉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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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그중 하나인 표고 3464m의 빅토리아 산은 만년설에 덮힌 채 말 없이 솟아있고, 그 발치에, 우리가 가 보려는 레이크 루이스는 작은 간장종지 모양 납작 엎드려 있었다. 세로 길이가 2km 가 넘는 그 호수도 멀리서 보니 아기 손톱 보다도 작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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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아 산과 루이스 호수 그리고 샤토 레이크 루이스 호텔(얼룩처럼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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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길 |
| 그 손톱 하단으로 희미하게 가로로 얼룩처럼 보이는게 그 유명한 객실 515개의 샤토 레이크 루이스 호텔이렸다. 사람들이 그곳에 한번 자보려면 일년전 부터 안달을 해야하는 그곳도 여기서 쳐다보니 단지 '손톱 밑의 때'일 뿐이었다. 너무 희어서 연푸른 빛이 도는 듯한 아기 손톱에 끼인, 거무스레한 때. 어쩌면 우리는 그 '때'를 보려고, 그 '때'를 향하여 지금 이렇게 허둥거리며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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