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 1830년 7월 10일 (프랑스) - 1903년 11월 13일
프랑스-인상파 화가
피사로는 성공한 유대인 상인인 아브라함 가브리엘 피사로와 라셸 만자노 포미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일찍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5년 뒤 서인도제도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이 이국적인 섬과 그곳의 주민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1853년 카라카스로 도망쳐서 2년간 그곳에서 덴마크의 화가인 프리츠 멜비와 함께 머물렀다. 마침내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1855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그린 가장 초기의 작품들은 열대지방과 프랑스 시골의 풍경화 및 인물화인데, 그것들은 대담하게 그린 것이기는 했지만 그뒤 그의 전생애에 걸쳐 그의 미술의 특징이 된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입학한 국립미술학교에서는 평범한 전통미술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에 흥미를 못 느낀 피사로는 화가인 카미유 코로를 추종했는데, 코로는 1864년의 살롱 전람회에서 피사로가 스스로를 코로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무렵 피사로는 바르비 종파의 미술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전원적이고 감상적인 그림들과 일상적인 사실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들에도 매력을 느꼈다. 1860년대에는 미술가들과 작가들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유명한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 토론회에 참가했으며, 젊은 화가들인 오귀스트 르누아르나 클로드 모네와 함께 활동했다. 1870년 프랑스-독일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도피했으며, 그곳에서 역시 프랑스에서 망명한 모네와 함께 여러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영국의 풍경화들을 감상했다. 그는 런던에서 예전에 그의 어머니의 하녀였으며 이미 그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 2명을 낳은 줄리 벨리와 결혼했다.
1871년 프랑스로 돌아온 피사로는 루브시엔에 있는 그의 집이 약탈당하고 그의 그림들 중 상당수가 파괴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는 곧 퐁투아즈에 또다른 집을 구했다(파리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피사로는 동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근교 마을에서 살았음). 그의 주위 환경은 약 30년 동안 그의 미술의 주제가 되었으며, "나에게는 아름다운 장소가 필요하다!"라고 그가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언제나 신중하게 선택되었다. 1872년 폴 세잔이 퐁투아즈에 와서 합류했는데, 이들은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외광회화). 피사로의 그림들은 결코 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1870, 1880년대에 그는 주요한 모티프로서 단지 집과 공장, 나무, 건초더미, 들판, 일하는 농부들, 강의 풍경들을 사용했다. 형태들은 흐릿하지 않고 뚜렷하며 색채는 강렬했다. 1870년대 후반에는 쉼표 모양의 붓놀림을 이용해 반짝이는 섬광을 많이 묘사한 작품 〈과수원의 꽃 피는 과일나무들, 퐁투아즈의 봄 Orchard with Flowering Fruit Trees, Springtime, Pontoise〉(1877)을 제작했다.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리인으로 그들의 작품 판매를 대행하고 있던 미술 상인인 폴 뒤랑 뤼엘이 그의 그림들을 팔아주었지만, 피사로는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맏아들인 뤼시앙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 쓰고는 했는데, 이 주목할 만한 편지 왕래는 1883년에 시작해 그뒤 20년간 계속되었다.
피사로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표시한 적이 몇 번 있다. 양식과 기법의 문제에 정신을 빼앗긴 그는 1885년 화가인 폴 시냐크의 소개로 만난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 이론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피사로는 작은 색점들을 나란히 병치시켜 꼼꼼하게 그리는 쇠라의 기법을 채택했으며 5년 동안 이 '분할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들은 미술 상인들과 수집가들 및 심지어는 그의 오랜 동료 미술가들에게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계속되는 가난한 생활에 크게 낙담한 나머지 피사로 부인은 가장 어린 두 자식과 함께 물에 빠져 죽을 생각까지 했다. 마침내 피사로는 그 양식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 이유는 그가 부딪힌 반대 때문이 아니라 "나의 감각에 충실하게 대상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토록 찬란하면서도 그토록 제멋대로인 자연의 인상에 충실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무렵 그는 예전에 그와 같은 경향으로 활동하다가 새로운 상징주의 운동에 합류한 폴 고갱과도 멀어졌다.
1892년 뒤랑 뤼엘은 피사로의 작품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를 계기로 피사로는 재정적인 안정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이무렵 고질적인 눈병에 시달려 야외에서 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1893, 1897년에 그는 파리에 호텔 방을 잡고 해가 비치거나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낀 이 도시의 거리들을 밤낮으로 그려 24점을 완성했다. 1890년대에 그는 또한 루앙의 강 풍경을 연작으로 그려 마찬가지로 자연의 다양한 효과를 묘사했다. 1900년부터 3년 뒤 그가 죽을 때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에라니·디에프·르아브르에서 참신한 시각과 더욱 자유로워진 기법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다. 유화와 구아슈, 템페라, 파스텔화, 심지어는 부채와 자기에도 그린 1, 600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약 200점의 정교한 판화들과 함께 피사로가 반세기에 걸쳐 남긴 작품들의 뛰어난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최한 7번의 전시회에 모두 참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지혜롭고 남을 잘 격려해주었기 때문에 당시 개성적인 표현의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고자 분투하고 있던 젊은 미술가들(모네·르누아르·세잔·고갱) 사이에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피사로는 60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렸지만 "성공하리라는 확신 없이는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을 확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Mi. Vishny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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