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을 맞는 워싱턴의 미국 의회 의사당의 모습. K 스트리트에 몰려 있는 수많은 로비업체엔 ‘밥줄’이 걸린 곳이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
한국의 미국에 대한 로비는 1970년대 박동선 스캔들처럼 어두침침한 ‘작업’만 있었을 뿐,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공식 로비활동은 전무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대미 로비를 시작한 지 1년, 그동안 K 스트리트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다. 다만 국익에 반하는 내용이나 특정 정치인의 신상은 가급적 기사화하지 않았다.》
"한국은 '잘 하고' 있는 나라다. 그러니 나한테 로비할 생각은 말아라."
워싱턴 로비업무에 관여하고 있는 L 씨는 올 초 비자면제협정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 의회의 한 간부에게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넣었다. 그러나 번번이 돌아오는 차가운 대답은 "바쁘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사무실 방문 허락을 받았지만 앉자마자 면박 주듯이 "로비할 생각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참담한 심경으로 돌아온 L 씨는 그러나 "시간 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정중한 감사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기대않던 호의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와 수시로 식사를 하고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이 간부가 비자면제 가입 문제에서 한국편이 됐음은 물론이다.
공식적인 대미(對美) 로비 한 돌을 맞은 한국 정부에게 'K스트리트'는 껍질을 벗길수록 새로운 양파 같은 세계다. '돈과 표'가 제일 중요한 것 같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 '걸음마 1년'
한국 정부가 로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봄부터. 주미 한국대사관 의회과 간부들은 주요 법안이 간발의 차이로 통과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것 봐라"하며 감탄했다. 다수당인 공화당 지도부가 로비스트를 동원해 소속 의원들을 '줄 세우는 것'이었다. 한국 같으면 의원총회 등을 통해 집안 단속을 할 텐데 미국에선 로비스트들이 법안 발의 의원이나 당 지도부의 요청을 받고 다른 의원 설득에 나서는 경우가 다반사다.
"로비는 미국에서 입법과정의 필수 대목"이라고 결론을 내린 대사관은 2005년 여름부터 로비스트 물색에 나섰다. 검토 결과 한국계 미국인인 토머스 김 씨가 공동 운영자로 있는 '스크라이브 전략&자문'이란 로비 회사가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다. 김 씨는 조지타운대,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을 졸업하고 무역대표부(USTR) 등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30대 초반의 신예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이 특히 깊었고 활동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5년 10~12월 활동비 포함해 월 1만 달러의 시범 로비계약을 맺었다.
이어 올 초 비자면제프로그램과 한미 관계 등 두 과제를 위한 로비에 월 3만 달러를 지급하는 내용의 정식 계약을 맺었다.
이와 별도로 최근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본격화하면서 경제 분야에서도 로비 활동이 본격화됐다. 계약은 전경련 및 무역협회가 맺고, 대사관이 이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전경련은 전직 의원이 세운 회사를 고용했으며, 대사관 경제과는 로펌(법률회사)을, 홍보공사실에선 홍보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1년간 한국 정부가 펼친 로비의 가장 가시적인 결과물은 한국의 비자면제 프로그램 가입 지지 여론을 높인 것. 하원의 경우 행정부에 지지서한을 보낸 의원이 35명에 달한다. 법사위 국제관계위 국토안보위원회 등 관련 3개 상임위 위원장, 간사, 소위 위원장 등을 포함한 12명의 핵심 의원 가운데 7명의 지지를 확보했다.
미 행정부 한 관계자는 7일 "지난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비자면제 협정을 융통성있게 운용하는 방향으로 개편하겠다고 밝힌 것도 의회에서의 긍정적인 목소리가 행정부에 전달된 덕분"이라고 귀띰했다.
종군위안부 결의안도 9월 처음으로 하원 국제관계위원회를 통과했다. 올 한해 의원들이 발표한 한국을 지지하는 18건의 성명서, 주요 인사 방미 시 나오는 환영 성명, 의회 관련 전문지들의 한국 관련 특집 보도 등의 뒤엔 로비의 숨은 힘이 적잖게 작용했다고 의회 관계자들은 전한다.
●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마찬가지'
로비스트들과 로비 업무에 관여하는 외교관들은 지난 1년간 주요 의원과 보좌관, 언론인들을 집요하게 찾아 다녔다. 인사를 나눈 뒤 식사에 초대하는 게 순서다. 반응은 사람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한 의회 간부는 사무실에선 딱딱하기 그지없었으나 식당으로 초대하니 태도가 바뀌었다. 워낙 식욕이 왕성해 항상 3개 이상의 코스를 시켰다. 좋은 식당만 예약해 놓으면 '만사 OK'였다. 규정상 1인당 20달러 이내의 식사대접만 허용되지만 100달러를 초과할 때도 없지 않았다.
반면 상원 민주당 소속의 한 전문위원은 꼭 카운터파트인 공화당 전문위원을 데리고 나왔다. 민주 공화당이 섞이면 자리가 공식화돼 내밀한 얘기를 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리곤 반드시 자기 식사비는 스스로 계산하고 나갔다.
골프장으로 초청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린피가 1인당 50~100달러인 중상급 퍼블릭코스를 주로 이용한다고 한 로비스트는 전했다. 물론 규정상 선물이나 접대 한도는 50달러 이내이지만 주말에 워싱턴 근교에서 50달러 미만짜리 골프장을 찾기는 쉽지 않다.
미국에서도 종종 언론의 포화를 맞는 공짜 해외여행을 보내준 적은 없다. 하지만 허물없이 지내게 된 의회 관계자가 "내 동료가 한국에 관심이 많은데 한국 방문 프로그램이 있을 때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해오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접대 보다는 지속적인 만남, 정성을 다해 챙겨주는 태도가 훨씬 큰 효과를 냈으며, 특히 의원별로 가장 예민한 포인트를 찾아내는 게 관건이라고 로비 관계자들은 전했다. "평소 의원 쪽에서 필요로 할 것 같은 온갖 정보를 취합 정리해서 보내주다가 현안이 발생하면 핵심만 간추려 얘기해주고 빨리 빠져주는 게 효과적"이라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물론 정치인들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역시 '표'와 '후원금'이다. 한인 단체들의 협력을 요청해 풀뿌리 유권자 운동을 벌이면 효과가 컸다. 특히 한국계 유권자가 많은 지역 의원들에겐 "11월 중간선거에서 한국계의 표심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 십중팔구 "어떻게 한국을 도와줄까"라는 반응이 나왔다.
"의원님 명의로 국무장관에게 한국을 비자면제대상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주면 좋겠다"는 식의 부탁을 한다. 1주일 만에 편지를 보내주는 의원도 있었다.
정치 후원금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아예 모른 척 하면 섭섭해 하기도 한다. 남부 출신의 한 의원은 사석에서 "한국 경제인들이 '중요한 메시지가 있으니 시간을 내달라'고 해서 만나보면 '잘 부탁한다'고 자기들 얘기만 잔뜩 하고 돌아간다"고 불만을 토로 했다.
토머스 김 씨는 그동안 자기 활동비를 털어 법적 한도(연간 2000달러)내에서 여러 의원들에게 후원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식사 말미쯤에 '다음달에 펀드레이징(기금모금) 행사가 있어서 바쁠 것 같다'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의원이나 보좌관들이 많다"며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참석해서 성의를 표시한다"고 말했다.
● '갈길은 멀고 산은 높다'
미 하원에서 종군위안부 결의안 문제가 논의되자 일본 정부는 태평양 전쟁 문제가 의회에서 공론화되는 것을 막는 로비를 헨리 하이드 국제관계위 위원장과 동향(일리노이주)이며 1994년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낸 밥 마이클 씨에게 맡겼다. 거물급 로비스트라, 월 6만 달러를 주는 조건으로 알려졌다. 한국정부의 전체 로비액이 월 3만 달러인 것과 비교가 안 되는 규모다. 한 자료에 따르면 기업 로비를 합쳐 2004년 기준으로 일본은 연간 1341만 달러, 대만은 625만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툭하면 청와대나 여권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발언'들도 로비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현장에서 어렵게 쌓아올린 '친한(親韓) 감정'이 바닷가 모래성처럼 쓸려나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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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기홍, 김승련특파원
“민주당으로” 로비스트들 발길 이동
중간선거 이후 K 스트리트 달라진 풍속도
“이들의 마음은” 11·7 미국 중간선거 직후인 지난달 14일 워싱턴 국회의사당 계단에서 기념촬영 중인 초선 의원들. 워싱턴 로비업계는 새로 등장한 의원들의 ‘성향 분석’에 부심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 장면 1
미국 11·7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직후인 16일 밤. 워싱턴 의사당 서북쪽 귀퉁이에 위치한 한 건물의 9층과 10층에선 왁자지껄한 파티가 열렸다. 이날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및 부대표에 선출된 정치인 2명을 위한 별도의 자리였다. 두 행사는 누가 개최했을까? 로비회사였다. 워싱턴포스트는 “두 행사를 번갈아 돌아다니는 수많은 로비스트와 정치인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고 썼다.
# 장면 2
거대 제약회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중간선거 직후 새로 입성한 정치인의 성향 파악 작업을 시작했다. “공화당 A 의원의 낙선으로 로비망에 큰 구멍이 뚫렸고, 민주당 B 의원이 하원에서 상원으로 입성하면서 제약회사들에 대한 압력이 거세질 것”이라는 내부 평가가 내려졌다.
미 제약업계는 수입의약품 제한 완화 조치를 두려워한다. 저가약품 유입은 가격 경쟁을 부를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이겠다”며 수입 촉진을 공약해 왔다.
민주당의 중간선거 승리는 의사당에서의 승리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워싱턴 로비업계인 K 스트리트의 권력 이동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 이제는 D 스트리트? = 친(親)기업 정책을 펴는 공화당과 로비스트들은 궁합이 잘 맞는다고 볼 수 있다. 공화당이 30년 야당 생활을 마감한 1994년 이후 K 스트리트는 번창했고, 공화당 대통령(조지 W 부시)이 들어선 2001년 이후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K 스트리트는 공화당(Republican)을 뜻하는 의미로 ‘R 스트리트’라는 농담도 돌았다.
그러나 이제 권력은 민주당(Democratic)으로 넘어갔다. 앞으로는 ‘D 스트리트’라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
K 스트리트에선 ‘실력자와의 거리가 곧 권력’이라는 말이 통한다. 환경 및 노동 문제를 강조하는 민주당의 의회 장악은 민주당의 외곽조직 역할을 해 온 노조 및 환경단체 로비스트의 부활을 의미한다. 환경운동단체인 시에라 클럽의 한 간부는 방송에 출연해 “공화당 지도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민주당은 선거 직후부터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는 전갈을 보내 왔다”고 했다.
‘포데스타-머툰’과 같은 민주당 성향의 로비회사에 월마트, 석유기업 BP의 계약 요청이 잇따른다고 한다. 노조나 환경 문제가 부각되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업들이다. 이 로비회사의 공동대표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존 포데스타 씨의 친동생. 민주당 접근 능력이 최상위권인 로비회사다.
▽ 험난한 로비 개혁 = 중간선거 기간 내내 로비 스캔들이 이슈화하자 민주당 지도부는 1월4일 새 의회가 개원하면 100시간 이내에 로비 개혁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현역 의원의 선물 및 공짜여행 수수 금지, 로비스트의 활동 보고서를 검증하는 ‘공공 도덕성 기구’ 수립이 주요 항목이다.
그러나 성과는 자신할 수 없다. 현재 현역 의원은 낙선 후 1년이 지나면 로비스트로 변신할 수 있다. 전직 의원은 의원전용식당 및 체육관 출입이 허용되고, 회기 중에 본회의장 출입도 가능하다. 이런 철옹성 같은 ‘로비 네트워크 유지 구조’가 쉽사리 바뀔지는 미지수다.
특히 ‘상한선 없는 선거자금’ 구조가 만들어 낸 ‘돈에 약한’ 정치인 양산 구조는 달라질 기색이 없다.
하원의원 선거에 드는 돈은 대략 100만 달러. 2년 임기라는 점에서 당선 직후부터 매주 1만 달러를 모금해야 한다.
출처 : 동아일보 2006. 12. 9.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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