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25전쟁 유해발굴 국가영구사업 결정…올해 대원 85명으로 창설
2007년 함안 진동 등 12곳 격전지서 주먹밥 먹으며 '시간과의 전투'
사진=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ho@chosun.com
입력 : 2007.03.30 16:40 / 수정 : 2007.03.31 20:23
-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대원이 38호에서 나온 유해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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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리까지 가주세요.”
지난 3월 14일 오전 11시 마산 고속버스터미널. 기자 일행은 택시를 탄 뒤 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했다. 택시가 마산만 바닷가를 끼고 달리고 있을 때,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택시기사가 물었다.
“진동리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꺼?”
“거기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한다고 하던데요.”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 이어졌다.“진동이 (6·25 때) 마지노선 아닙니꺼? 1950년 여름이었어예. 진동이 뚫렸으면 부산은 함락되었지예. 진주는 이미 수중에 떨어졌었고. 진동리의 야반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지예.”
기자가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택시기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나이 든 사람은 다 아는 얘기라예”라고 말한다.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은 지난 3월 2일 2007년도 유해발굴감식 사업을 시작했다. 유해발굴은 12개 지역에서 전반기(7개 지역)와 후반기(5개 지역)로 나눠 시차를 두고 땅이 얼기 시작하는 11월 15일까지 계속된다. 전반기에 발굴하는 7개 지역은 함안 · 진동(3월 2~30일) 안강 · 기계(4월 2~27일) 군위 · 칠곡(4월 2~27일) 신남(5월 1~31일) 영광 · 화순(5월 15일~6월 15일) 양구(6월 1일~29일) 현리 · 매봉산(6월 1~29일)이다. 모두 6·25 당시 아군이 북한군이나 중공군에 맞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던 장소다. 발굴 지역은 6·25 전사 기록과 주민 및 참전용사의 증언 · 제보, 현장 실사를 거쳐 확정된다.
오후 1시 기자 일행은 진동리 어귀에서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 이용석 과장(중령)을 만나 발굴 현장인 야반산 정상(341고지)을 향해 올라갔다. 30도가 넘는 경사면을 40여분 쉬지 않고 오르니 능선이 나타난다. 능선 양 옆에는 움푹한 참호(塹壕)가 즐비하다. 이용석 과장은 “왼쪽은 아군의 호고, 오른쪽은 북한군의 호”라고 설명한다. 1950년 여름, 참호는 빗발치는 공산군의 총탄을 막아내기 위해 가슴 높이까지 깊게 팠을 것이다. 하지만 57년이라는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참호는 간장종지처럼 얕아져 있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3년 동안에 남한에서만 3백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실종자가 13만여명이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2000년 4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의 포성(砲聲)이 멎은 지 47년 만이다. 육본은 경북 칠곡 다부동 328고지(낙동강 전투)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위해 첫 삽을 떴다.
한시적으로 시작된 전사자 발굴 사업이 지속 추진사업으로 결정된 것은 2003년 7월. 이 사업은 2005년 6월 호국보훈 관계 장관회의에서 국가영구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된다. 2007년 1월, 마침내 85명을 단원으로 하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withcountry.mil.kr)이 창설되었다.
- 34호에서 나온 유해, 전투화, 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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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년간 발굴된 유해(적군 포함)는 1484구.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52구이고, 유가족이 확인된 유해는 22구이다.<표 참조> 지난해 11월 강원도 홍천에서 전사한 장복동 일병의 유해가 55년 만에 가족품으로 돌아갔다. 1951년 1월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장복동 일병은 스테인리스 수통에 못으로 ‘장복동’이라는 이름을 새겼고, 이것이 유해의 신원을 밝히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야반산 능선을 따라 걸은 지 5분여 만에 발굴현장에 도착했다. 이준하 중사가 이끄는 발굴대원 20명이 발굴에 정신이 없었다.
야반산에만 1000여개의 옛 참호가 있다. 발굴과 대원들은 참호 한 개를 팔 때마다 호에 고유 번호를 붙인다. 전쟁 당시 참호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곳은 일단 옛 낙엽을 걷어낸 뒤 야전삽으로 흙을 파낸다. 유해가 묻혔을 법한 장소의 표토(表土)를 걷어냈는데 나무 뿌리가 가로막고 있다면 톱으로 조심스럽게 나무 뿌리를 잘라낸다. 57년이라는 망각의 지층을 거슬러 잠들지 못하고 있는 유해를 만나려면 최소한 수십㎝는 파내려 가야 한다.기자가 도착했을 때 29호에서는 유해의 존재가 확인된 상태였다. 29호에는 M1탄, 다리뼈, 엉치뼈, 학생용 버클(발굴단 추정), 앙증스러운 크기의 시계 알, 설탕 봉지 등이 출토되었다. 설탕 봉지는 미국제로 8g짜리였다. 제조사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선웨이 푸르트 프로덕트(sunway fruit product)였다. 봉지는 뜯어져 내용물이 없었다. 유해의 주인공은 참호 속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며 혀끝에서 녹는 설탕의 달콤함에 죽음의 공포를 잊고 싶었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29호 유해의 두개골이 두 개로 나뉘어 양쪽으로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준하 중사는 “분리된 두개골과 다리뼈의 상태로 볼 때 신체가 꺾인 상태에서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이준하 중사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이분들이 여기서 싸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면서 “비록 57년이 지났지만 후배로서 아들로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이용석 과장은 버클을 들어 앞뒤로 살펴보며 “뒤에 이름이라도 새겨놓았다면 누군지 알 수 있을 텐데”라고 했다. 순간, 기자는 지난해 11월 강원도 홍천군 내면에서 수습된 장복동 일병의 수통이 생각났다. 안타깝게도 버클에서 육안으로는 아무런 특이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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