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렇게 어린 나이로 즉위했어도 구이신왕은 재위 八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비유(毗有)이다.
비유는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라고도 하고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연령으로 보아 전지왕의 서자로 보는 편이 타당할는지 모른다. 비유왕이 재위 二十九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제二十대 개로왕(蓋鹵王)이 즉위했다.
개로왕대에 이르자 백제와 고구려 사이는 대단히 악화되었다. 백제측에서 대륙의 강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비방하는가 하면 고구려측에서는 백제에 간첩을 보내어 국력을 탐지하고 침공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개로왕은 유난히 바둑에 취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바둑 잘 두는 사람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대국(對局)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둑쯤이나 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궁성 앞에 언제나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궁성 앞에 한 중이 나타났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로 도림(道琳)이라고 하오. 내 일찍부터 바둑을 두어 묘리를 깨달은바 있는데 듣자니 대왕께서 심히 바둑을 즐기시고 대국할 만한 자를 널리 구하다고 하십디다. 그래서 한 번 모시고 둘 수 있다면 평생 소원을 이룰 듯 싶어 이렇게 찾아온 것이외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즉시 도림이라는 중을 불러 들였다. "내가 바둑의 명수를 널리 구하던 참인데 그대가 바둑을 잘 둔다니 한판 두어 보기로 하자."
왕은 곧 대국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 아니해서 탄성을 올렸다. "과연 국수로군."
감탄한 왕은 곧 도림을 귀한 손님처럼 극진히 대접했다.
이날부터 왕이 있는 곳에 반드시 도림이 있었으며, 두 사람은 틈만 있으면 바둑판을 놓고 마주앉게 되었다.
도림에 대한 왕의 신임과 친분은 나날이 두터워 갔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도림이 잔언하는 말이면 왕은 한 가지도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 줄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도림이 정색을 하며 왕께 아뢰었다.
"신이 한 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만, 첫째 신의 본바탕이 딴 나라 사람이오니 대왕께서 신의 말을 들어 주실는지 걱정스럽습니다."
그러자 왕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릴 하는가. 과인은 그대를 친한 벗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오히려 섭섭하지 않은가?"
"황감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신이 아뢰는 말이 대왕과 이 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는지 염려스럽습니다."
"다름 아닌 대사가 하는 말인데 어찌 이롭지 않겠는가. 그렇게 너무 주저하지 말고 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
왕이 재촉하자 도림은 못 이기는 체하고 입을 열었다.
"이 나라로 말씀하자면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내와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실로 하늘이 베풀어 준 요지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생각도 못하고 있는 판국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바로 말씀드린다면 하늘이 베풀어 준 요지라는 것만 믿는 나머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치게 등한 한 듯 싶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가?"
"신은 이 나라에 와서 여러 곳을 샅샅이 둘러보았습니다만 모든 성곽(城郭)은 오래도록 손을 대지 아니하여 허물어져 가고 대왕께서 거처하시는 이 궁전마저 비가 오면 여기저기서 빗물이 새어 내릴 형편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하고 도림은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흐르는 물처럼 유창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는 선왕님의 능(陵)과 대신들의 묘(墓)까지 허물어져서 뼈가 땅 위에 드러날 지경이며, 강둑이 무너져서 웬만큼 큰 비만 오면 백성들의 집이 마구 떠내려갈 형편입니다. 대왕의 융성한 위세와 이 나라의 풍요한 자력을 가지고서 어찌 이런 일을 그대로 버려두시는지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도림이 말을 마치자 왕은 대답했다.
"큰 역사를 일으키면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단 말야."
그러자 도림은 정색을 했다.
"대왕께서는 이 나라의 어른이시며 주인이십니다. 그러한 대왕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누가 감히 반대하겠으며 설혹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자는 곧 나라의 죄인입니다. 무엇을 꺼리신단 말씀입니까?"
도림의 말에 왕은 마침내 설복되었다. 우선 전국에서 수많은 장정이 동원되어서 어느 마을 어느 집이고 장정 있는 집치고 동원되지 않은 집이라고는 없을 지경이었다.
역사는 실로 그 규모가 웅대하고 화려하였다. 높고 긴 성을 쌓고 그 속에는 으리으리한 궁궐을 짓는데 기둥마다 벽마다 모두 눈부신 장치를 했다.
부왕(父王)의 능을 꾸미는 데에는 한층 더 힘을 기울였다. 전국 각처 산과 내에 사람을 보내어 크고 단단한 돌을 구해다가 관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묻었다. 그리고 강변을 따라 나무 울타리를 만드는데, 그 길이가 또한 어마어마했다.
이러고 보니 국고(國庫)는 마를대로 말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갖은 명목을 다 붙여서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중 삼중으로 곯는 것은 백성들이었다. 장정들은 모두 부역을 나가서 생업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데다가 나라에 바치는 것은 엄청나게 불었다.
나라 안 방방곡곡에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드디어 백성들의 원성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런 불평분자들을 잡아 가두기도 하고 매질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원성은 더욱 높아가고 마침내는 불온한 기운이 온 나라 안을 뒤덮기까지 했다.
원성이 높아가고 불온한 기운이 충만하자 개로왕은 겁이 났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권한 도림이 원망스러워졌다. 원망은 차차 미움으로 변했다.
"그놈, 도림을 불러들여라!"
왕은 마침내 군졸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군졸들이 도림의 집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도림의 집은 텅비어 있었다.
도림은 바로 고구려의 간첩이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백제를 정벌할 생각으로 그 나라 국정을 살피고자 좋은 첩자(諜者)를 구하고 있었는데 이때 나타난 것이 도림이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진언했다.
"백제의 정세를 살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백제가 군비를 갖추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백성들은 생업에 충실해서 배부르게 지내고 있다면 간첩을 보내 국정을 살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간첩을 보내되 두 가지 일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한 가지는 그 나라 국정을 은밀한 속에 샅샅이 살필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며, 또 한 가지는 만약 그 나라가 부강하면 감언이설로 약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스스로 맡아 백제로 건너간 도림은 백제 개로왕을 농락해서 마침내 부강하고 검소한 나라를 허황하고 가난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개로왕 二十一년 九월, 간첩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간 도림의 보고를 받자 장수왕은 곧 군사 三만을 거느리고 백제 국경을 넘어섰다. 이 정보를 들은 백제 개로왕은 가슴을 치며 분통해 했다. 그리고 왕자 문주(文周)를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고구려의 대군을 맞아 싸울 힘이 없으니 신라에 구원병을 청해서 함께 싸우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왕자 문주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말이다. 너는 곧 신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도록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라에서 구원병이 도착될 때까지는 성문을 굳게 닫고 마주 싸우지 마십시오. 되도록 날짜를 끌다가 구원병이 도착한 후에 안팎으로부터 친다면 적을 무찌르기 조금도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문주는 곧 몇몇 장졸을 거느리고 구원병을 청하러 신라로 향했다. 그런 고구려군의 침공은 신속했다. 고구려의 장수 중에는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이란 두 장수가 있었다. 그들은 원래 백제 장수였는데 사소한 죄로 개로왕에게 혹독한 형벌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후 풀려나오자 그들은 개로왕에게 원심을 품고 고구려로 도망쳐 갔던 것이었다. 그들은 이번 싸움에 각각 고구려군의 장수가 되었는데 옛 원한을 풀게 될 때는 바로 이 기회라 생각한 그들은 "백제를 치려면 지금 국력이 몹시 쇠약해 있다고 하니 속할수록 좋을까 합니다." 이렇게 재촉했다.
그 말에 장수왕은 더욱 군사를 독려해서 단시일에 백제 서울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고구려군 여러 장수들 중에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의 분투는 특히 눈부셨다. 그들은 먼저 북성(北城)으로 침입하여 七일 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남성(南城)으로 돌아가서 맹렬히 공격을 가했다. 백제군은 신라의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리느라고 버틸대로 버티어 보기는 했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성중으로 뛰어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개로왕은 하는 수 없이 단기(單騎)로 궁성을 빠져나와 도망치려 했다.
이때였다. 저편으로부터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고구려 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지난날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던 재증걸루였다. 비록 지금은 적의 장수지만 지난 날에는 자기 부하였으니 구정을 생각해서라도 온정을 베풀 것이라고 개로왕은 생각했다.
개로왕은 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염치불구하고 재증걸루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하며 애걸 했다.
"재증 장군! 나요! 바로 장군이 왕으로 받들어 주던 개로요. 내 목숨 좀 살려 주오. 지난 일을 생각해서라도 내 목숨 좀 살려 주오."
그러나 재증걸루는 독기가 가득한 눈초리로 왕을 내려다보니 말했다.
"뭐라구? 지난 일을 생각해서 살려 달라구? 뻔뻔스럽군!"
재증걸루는 애걸하는 왕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나 뱉았다.
"오냐. 지난 일을 생각해서 네게 단단히 맛을 보여 주어야겠다. 지난날 너는 나와 고이만년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으니 이번에는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
이렇게 쏘아붙인 재증걸루는 즉시 왕을 결박해 가지고 아차성(阿且城)으로 끌고 갔다가 마침내 참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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