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김교신(金敎臣)과 성서조선(聖書朝鮮) ⑥

鶴山 徐 仁 2007. 2. 3. 07:47
 
   
   
  서정후님께 드립니다.
     
김교신(金敎臣)과 성서조선(聖書朝鮮) ⑥

김교신 선생이 함경남도의 흥남질소비료공장에 기숙사 사감으로 입사한 때는 1944년 7월이었다. 어제 글에서 적은 것처럼 기숙사에 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얼을 깨우치기 위하여 선생은 글자 그대로 노심초사(勞心焦思)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해를 넘긴 1945년 기숙사에 장질부사 돌림병이 돌게 되었다. 병에 감염된 노동자들이 연 이어 시체가 되어 나갔다.

자신이 돌림병에 감염 되지 않으려고 회사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환자 곁에 가까이 오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교신 선생은 달랐다. 환자들을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이, 한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성을 다하여 간호하는 것이었다.
선생을 아끼는 사람들이 그러다가 감염 되어 선생께서 쓰러지게 되겠다는 염려에서 김교신 선생께 환자들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 것과 과로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막무가내였다.

“크리스천으로써 이런 때에 몸을 사리고 피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손사래를 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환자들 곁에서 혼신의 정성을 쏟으며 돌보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선생 자신이 장질부사에 감염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렇게 눕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4월 25일에 선생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국이 해방되기 불과 4 개월 전이었다. 그의 나이 겨우 44세였다.
누군가가 이르기를 비범(非凡)하게 훌륭한 인재는 하늘나라에서 쓰려고 이른 나이에 불러 간다고 하였던가? 선생이 그렇게 가고 난 빈 자리가 조국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와 겨레의 역사에 채워지지를 못한 채로 오늘에까지 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