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기자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때의 얘기 한 토막.
지은 지 100년이 넘었고 수십년 묵은 고물 가구로 채워진 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집안에 새 것이 두 개 있었다. 바로 소파와 보일러였다.
이사한 직후 집주인은 낡긴 했지만 아직 멀쩡한 소파를 바꾸겠다고 했다. 불이 붙으면 유독가스를 내는 소파를 불연재(不燃材)로 바꾸라는 법규가 새로 시행된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수십년 된 고물 보일러가 고장났다. 수리공은 보일러를 고친 후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용은 보일러를 덮고 있는 목재 박스의 환기창이 규정에 비해 작아 보일러 내부 과열로 화재의 우려가 있다는 것. 집 주인은 즉시 보일러 회사에 연락해 박스 뚜껑을 교체하고 보일러까지 신형으로 바꿔주었다.
런던 지하철은 개통한 지 140년이나 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이지만 안전면에서는 최근에 개통한 여느 지하철 못지않다. 모든 역에는 비상계단이 별도로 설치돼 있고 비상시를 제외하곤 이 계단을 사용할 수 없다. 평상시 이용하는 계단에 비해 빠르게 역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계돼 있음은 물론이다.
정부기관인 ‘건강 및 안전청(Health & Safety Executive)’에서 지하철과 철도의 안전시스템을 전문적으로 점검하고 법 제정 및 개정 방안을 연구하는 공무원만 300여명이다. 이는 각 철도회사에 고용된 민간 안전요원을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국민소득을 높이는 것이 경제발전의 중간목적이라면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경제발전의 최종 목적”이라고 말했다. 안전한 사회, 빈곤의 해소, 의료·교육서비스 향상 등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경제발전이라는 설명이다.
1인당 1만달러 소득을 자랑하는 한국 사회의 안전시스템은 1인당 소득 5000달러, 아니 1000달러 시절에 비해 얼마나 개선되었나?
대구 참사를 보면서 ‘진짜’ 경제발전은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임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김용기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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