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58) 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후금이 대릉하 원정에 앞서 평안도 일원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자 조선의 위기의식은 바짝 높아졌다. 인조는 강화도 정비에 몰두하는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 방책 마련에도 신경을 썼다.1631년 8월, 인조는 서쪽 교외로 나아가 무사들의 훈련을 참관하는 열무(閱武)를 행하고 관계자들을 격.. 歷史. 文化參考 2008.03.26
[병자호란 다시 읽기] <59> 곤혹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다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1630년 무렵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후금이 요구했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들과의 교역에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도( 島)의 한인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들에게 물자를 공급하지도 말라는.. 歷史. 文化參考 2008.02.23
[병자호란 다시 읽기] (58) 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후금이 대릉하 원정에 앞서 평안도 일원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자 조선의 위기의식은 바짝 높아졌다. 인조는 강화도 정비에 몰두하는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 방책 마련에도 신경을 썼다.1631년 8월, 인조는 서쪽 교외로 나아가 무사들의 훈련을 참관하는 열무(閱武)를 행하고 관계자들을 격.. 歷史. 文化參考 2008.02.23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명이 조대수를 시켜 대릉하성을 쌓은 목적은 명확했다. 산해관의 방어를 확고히 하면서, 후금에 빼앗긴 요서(遼西)와 요동을 수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후금군은 성의 방어 시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조대수는 분투했지만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집요한 포위 끝에 .. 歷史. 文化參考 2008.02.07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은 만주병과 몽골병, 그리고 한인으로 구성된 .. 歷史. 文化參考 2008.02.07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은 만주병과 몽골병, 그리고 한인으로 구성된 .. 歷史. 文化參考 2008.02.02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후금군이 침략해 오고, 사신을 보내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의 위기 의식은 높아졌다. 조정은 김시양(金時讓)을 도원수로, 이완(李浣)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서북으로 내려보내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금과 맞설 수 없는 처지에서 계속 강경책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 歷史. 文化參考 2008.01.23
[병자호란 다시 읽기] (54) 후금,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아슬아슬했다. 조선은 후금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바로 명과 가도라는 바깥 변수 때문이었다. 유흥치가 피살된 뒤, 가도를 탈출하여 후금으로 귀순한 자들 가운데는 홍타이지에게 가도를 .. 歷史. 文化參考 2008.01.23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인조가 원종 추숭을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가도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켜 조선의 정벌 대상이 되었던 유흥치(劉興治)는 조선에 대한 물자 징색(徵色)을 멈추지 않았다. 유흥치를 토벌하려 했던 ‘원죄’ 때문에 조선은 그의 보복을 받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 병자호란 당.. 歷史. 文化參考 2008.01.23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명 조정이 후금의 반간계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등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무렵, 조선에서는 인조의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뒤 시기에 올려 주는 것)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 歷史. 文化參考 2008.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