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살곶이 다리

鶴山 徐 仁 2006. 8. 5. 10:42
살곶이 다리

 
살곶이 다리를 옆에서 바라본 모습, 살곶이 다리의 윗 모습(왼쪽부터)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리만큼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도 많지 않을 것이다. 다리는 대개 강이나 하천 등 물이 흐르는 곳이나 깊은 협곡을 쉽고 편리하게 건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토목구조물을 말한다.
그런데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다리가 지금도 편리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은 그리 흔치 않다. 농경사회 때 만든 다리는 구조도 작고 약하기 때문에 산업사회인 현대에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문화유적이지만 지금도 우리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는 다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서울 성동구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여 흐르는 지점 살곶이 공원에서 뚝섬으로 건너는 작은 다리가 하나 있다. 산책을 나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무심코 많이 이용하는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면서 보면 다리의 모양이 중간 부분 양쪽방향이 완전히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살곶이 다리는 두 구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현재 뚝섬 쪽으로 물이 흐르는 위에 세워진 다리는 옛 다리가 아니다. 다리 가운데 섬처럼 경계를 이룬 곳에서 한양대학교 쪽의 부분이 옛 다리를 복원한 것이다.
이 옛 다리를 살펴보면 한 마디로 우직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돌다리다. 커다랗고 네모난 받침돌 위에 횡렬로 네 개씩 기둥을 세우고 다시 종대로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긴 장대석으로 건너지른 위에 다시 동틀돌을 놓고 그 위에 청판석을 깔았다. 기둥은 물 흐름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다듬었다. 다리에 쓰여 진 대부분의 돌들이 크고 질박하여 호쾌한 느낌을 준다.
이 다리는 조선 초기 세종 임금이 부왕인 태종의 행차를 돕기 위하여 공사를 시작했다고 하니 효심에서 만들게 된 다리다. 그러나 태종이 죽은 후에 다리공사는 흐지부지 중단되어 있던 것을 성종 6년에 다시 시작하여 14년에 완공 하였다. 완공 후에 성종이 살펴보고 반석처럼 튼튼하다 하여 제반교라고 불렀다는 다리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교통 통신상 중요한 구실을 하며 서민들의 이용이 빈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리의 일부를 해체하여 사용함으로서 훼손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은 본래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드는 삼각주 지역이어서 땅이 비옥하고 기름진 평야지대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었으며 왕의 매 사냥터로 이용되었다. 건국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위하여 근처에 고려 이궁을 세우고 객사로 삼아 지형을 살피곤 하였다.
하루는 응봉에서 사냥할 때 꿩 한 쌍이 날아오르자 태조가 활시위를 당겼다. 태조는 신궁이라 불렸던 대단한 활솜씨였다, 장끼 한 마리가 화살에 꿰어 떨어진 곳이 바로 뚝섬이었다. 그래서 뚝섬 일대를 살곶이 벌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다리이름도 거기에 유래한 것이다.
오랜 역사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다리가 바로 이 살곶이 다리다. 며칠 전 청계천에 나갔다가 이 다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주변도 말끔하게 정비되고 입구도 자전거를 타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안전시설까지 갖춰 놓고 있었다.
“이 다리 살곶이 다리잖아요, 그냥 다리지 뭐 특별한 게 있습니까?”
자전거를 타고 건너오는 30대 중반 쯤의 남자에게 이 다리가 어떤 다리인지 아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한 말이다. 무심코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반 다리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다리의 역사와 전설을 이야기해주자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역사유물을 깊이 있게 알고 이용하면 그 가치와 소중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이 살곶이 다리의 원형을 완전히 복원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아름답게 물려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출처 : 하이서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