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성문 중 유일하게 개방되지 않았던 북문이 시민에게 개방됩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군사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었습니다. 37년간 사람의 발길이 끊겨 있어서 송림이 우거져 볼 만합니다.
평창동 산언덕의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북문과 성벽, 소나무 숲이 서울 시가지와 어울린 모습이 펜화가의 눈에 옆으로 긴 구도로
다가왔습니다. 옛 건축물과 현대식 건축물에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장관을 보면서 ‘서울 사람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도시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1970년대 후반 홍익대 미대 학생들이 북악산에서 봉변을 당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졸업반 학생들이 사은회를 끝내고 2차로 북악산
팔각정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에 반한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스카이웨이를 걷게 되었지요. 그런데
느닷없이 “손들어!” 하는 구령과 함께 총을 겨눈 군인들이 나타났으니 학생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스카이웨이가 걸을 수 없는 도로인 것을
몰랐다”는 변명도 소용없이 여학생까지 쪼그려뛰기와 오리걸음 기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삼엄한 경비 속에 굳게 닫혔던 북문 지역이 내년 4월부터
개방이 되는데 하루 150명씩만 볼 수 있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제한없이 볼 수 있을까요?
서울의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1396년 도성을
쌓습니다. 이때 성문의 이름을 정도전(鄭道傳)이 짓습니다. 유교국가의 통치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맞추어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 지었으나 북문은 숙청문(肅淸門)이 되었습니다.
북문은 중종(中宗)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4대문 중에 규모가 가장 작아 대문이라기보다 소문의 격식이었습니다. 대신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이 북대문 대우를 받습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경도조(京都條)에는 혜화문을 북대문으로 적고 있습니다. 문을
지키는 출직호군(出直護軍)의 수가 대문은 30명, 소문은 20명인데 혜화문은 30명이었답니다.
숙정문은 형식상의 북대문이었습니다. 이용할 필요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대문 밖에 삼각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동쪽 길은 동소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서쪽으로는 창의문(彰義門)이 더 편리하였거든요.
이렇게 쓸모가 별로 없던 북문이 태종(太宗) 13년(1413) 최양선의 건의로 폐쇄됩니다.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좌청룡 지맥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순조(純祖) 때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속전된 바로는 북문을
열어두면 성 안에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 불어댄다 하여 이를 폐했다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상중하간지풍이란 부녀자의 풍기문란을 뜻합니다.

조선 초기 한양의
세시풍속 중 부녀자들이 숙정문을 1년에 세 번만 다녀오면 그 해의 액운이 없어진다 하여 장안 부녀자들의 숙정문 나들이가 빈번하였답니다. 북문
일대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네들로 꽃밭을 이루었으니 장안의 온갖 나비는 전부 몰려들었겠지요. 그런데 수요보다 공급이 적어서 ‘사내 못난 것은
북문에서 호강 받는다’는 속담이 생겼습니다. 요즈음도 주말이 아닌 평일에 온천 동네에 가면 비슷한 현상이 있다지요.
북문 밖에는 뽕나무가 많았답니다. 뽕나무는 넓은 잎이 많이 달리기 때문에 방음은 물론 시선차단이 잘되어 은밀한 데이트 장소로
끝내줍니다. 북문 밖 뽕나무밭이 울 안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 사대부집 부녀자들의 해방구(解放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소문에 좌불안석하던
양반들이 ‘풍수지리상 북문을 열면 장안에 음풍(陰風)이 들어온다’는 구실을 들어 북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이지요. 사실 풍수에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으로 봅니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가 서린 북문을 열어 우기(雨氣)를 맞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제
북문을 다시 개방한다니 서울의 나이트클럽 부킹과 호스트바의 영업이 호황을 이룰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의 성곽은 태조 때 토성으로 쌓은 것을 세종(世宗) 4년(1422) 석성으로 개축합니다. 숙종(肅宗) 35년(1709)에도
대대적으로 개축을 합니다. 돌을 가로 세로 2자(60㎝) 크기로 다듬어 튼튼하게 쌓은 것입니다. 성 위의 성가퀴(여장·女墻)도 이때 마무리가
됩니다. 영조(英祖) 19년(1743)에도 손을 봅니다.
현재 숙정문 주위의 성벽에 이용한 돌을 보면 자연석을 쌓은 곳과 숙종 때 사각으로 다듬어 쌓은 곳이 보입니다. 성벽 위의 성가퀴도 숙종
때 쌓았던 것을 1975년 복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가퀴는 군사들이 몸을 숨기고 싸울 수 있도록 성벽 위에 사고석(四塊石·사괴석)을 쌓은
것입니다. 높이 4자(1.2m), 길이 15자(4.5m)로 쌓고 3곳에 총안(銃眼)을 냅니다. 가운데 세로로 길게 보이는 것이
근총안(近銃眼)으로 성 밑에 접근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아래로 경사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좌우의 총안은 수평으로 멀리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으로 원총안(遠銃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진(왼쪽위)을 보면 가로로 넓게 뚫린 총안이 군데군데 보입니다. 듣도 보도 못한
모양으로 요즈음 만든 현대식 총안입니다. 좌우상하로 기관총을 쏠 수 있으니 전방위기관총안(全方位機關銃眼)이라고 할까요. 내년 공개 이전에
원상복구가 되겠지요.
성가퀴의 양 끝을 ‘ㅅ’자 모양으로 만든 것은 좌우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가퀴는 총이 이용되기 시작한 이후에
만든 것입니다. 총안으로 활을 쏘기에는 불편합니다. 총이 없었던 삼국시대나 고려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총안이 보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1975년 숙정문을 복원할 때 ‘문루가 본래부터 없었다’는 주장과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에 복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다른 성문과 달리 앞뒤 홍예석 사이에도 같은 홍예석으로 천장이 막힌 구조라 판단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성 앞에 여러 겹으로 쳐진 철조망이 보기 흉하여 빼놓고 그렸습니다. 언제쯤 전국에서 이런 철조망을 안보고 살까요.
문화재청은 숙정문 개방과 함께 서울 성곽과 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역사도시로 등재하도록 추진할 계획이랍니다.
숙정문과 성벽 그림은 2주일에 걸쳐 무척 꼼꼼하게 그렸습니다. 펜화가가 당분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작별의 인사로 정성을 쏟은 것입니다.
그동안 1주일에 한 장씩 펜화를 그리다 보니 오른팔에 무리가 왔습니다. 더 망가지기 전에 쉬면서 치료를 받으랍니다.
그동안 부족한 그림과 글을 애정으로 대해주신 주간조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작년 창간 36주년 기념호에 별책부록으로 나간
‘펜화도록’은 큰 영광이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화가가 시사주간지의 별책부록으로 10만부가 넘는 도록을 전국에 배포해 보았겠습니까? 주간조선에
연재하면서 보낸 시간들은 정말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항상 마음먹은 대로 이루시고 늘 건강하십시오.
사진=이명원 조선일보 사진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