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순종실록》의 편찬
경위
《순종실록》은 조선 왕조의 제27대
국왕이며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였던 순종(純宗)의 재위 기간(1907∼1910) 4년과 퇴위 후 17년간 (1910∼1926)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간략히 기록한 사서이다. 원명은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실록(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實錄)》 약칭 《순종황제실록(純宗皇帝實錄)》으로,
본문 4권 3책, 부록 17권 4책, 목록 1책을 합쳐 모두 22권 8책으로 간행되었다. 본문에는 순종이 황제로 재위한 기간(1907년 7월 ∼
1910년 8월) 4년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부록에는 그가 퇴위한 이후 서거할 때까지의 신변 잡사(雜事)를 기록하였다. 《순종실록》은
《고종실록》과 함께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의 주관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순종실록》은
《고종실록》과 함께 1927년 4월 1일부터 1935년 3월 31일까지 이왕직(李王職)의 주관 하에 편찬, 간행되었다. 따라서 그 편찬 경위는
《고종실록》과 같지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26년 4월 순종이 서거하자 이왕직에서는 익년(1927) 4월 역대 실록의 예에 따라 고종과
순종의 실록을 편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준비실을 설치하여 임시고용원 10명과 필생(筆生) 26명을 배치하고
실록편찬에 필요한 사료를 발췌하여 등사하였다.
|
1930년 3월까지 3년간에 걸쳐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의 원고를 등사하였다. 자료의 등사가
끝나자 1930년 4월에 이왕직 내에 실록 편찬실을 설치하고 편찬위원을 임명하여 실록을 찬술하게 하였다. 실록 편찬실의 초대 위원장에는 일본인
이왕직 차관 시노다(篠田治策)가 취임하였으나, 1932년 7월 그가 이왕직 장관에 승진되자 부위원장 직제를 신설하여 이왕직
예식과장(禮式課長)이었던 이항구(李恒九)를 차관으로 승격시켜 부위원장으로서 실록 편찬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 편찬의 총책임자는
1930년 4월에 감수위원으로 임명된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쇼고(小田省吾)였다. 편찬위원들은 실록의 기술(記述)과 체제 및 편집을 역대 실록,
특히 《철종실록》의 예에 따른다는 범례를 세웠다. 다만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기사 목록을 따로 작성하여 각 일자 밑에 중요기사를 요약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날짜를 간지로 적지 않고 일자(숫자)로 표기하였으며, 갑오경장 이후의 조칙과 약조 등은 원문 그대로 전재하였다. 당초의
계획에는 1년의 기사를 1권 1책으로 편찬하기로 하였으나, 기사의 양이 소략하여 17권 3책으로 완성되었다. 《순종실록》은 《고종실록》1934년
6월에 편찬이 완료되었고, 익년 3월에 영사본(影寫本)으로 간행되었다. 총 200부가 간행되어 40부는 원고 정부본(正副本)과 함께 이왕직
도서관에 소장되었고 나머지는 관계기관에 배포되었다. 《순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편차위원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위원장: 소전치책(篠田治策)
부위원장: 이항구(李恒九) 감수위원: 소전성오(小田省吾), 정만조(鄭萬祚), 박승봉(朴勝鳳), 성전석내(成田碩內), 김명수(金明秀),
서만순(徐晩淳) 편찬위원: 서상훈(徐相勛), 남규희(南奎熙), 이명상(李明翔), 조경구(趙經九), 홍종한(洪鍾瀚), 권순구(權純九)
사료수집위원: 박주빈(朴冑彬), 이원승(李源昇), 이능화(李能和), 국지겸양(菊池謙讓) 서무위원:
말송웅언(末松熊彦), 지하신광(志賀信光) 회계위원: 좌등명도(佐藤明道) 감수보조위원: 김석빈(金碩彬), 강원선퇴(江原善槌), 김영진(金寧鎭),
최규환(崔奎煥) 편찬보조위원: 빈야종태랑(濱野鍾太郞), 이병소(李秉韶), 이풍용(李豊用), 수교복비고(水橋復比古), 이준성(李準聖),
김병명(金炳明), 홍명기(洪明基) 사료수집보조위원: 북도경조(北島耕造)
2.《순종실록》의 내용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원고를 반드시 감수부의 총책임자인 경성제국대학 교수에 의하여 감책(監冊)·감증(監增) 등의 손질이 가해졌고, 실록의 최종 원고는 위원장인
일본인 이왕직 장관의 결재를 얻어 간행되었다. 이러한 편찬 과정을 보면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일본인들의 주도로 제국주의적 사관에 따라
편찬된 것이며, 조선왕조의 실록 편찬 전통이나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역사관에 의해 편찬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의 종합
정리나 자료 제공이라는 면에서는 일정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순종(1874~1926)의 이름은 척(坧),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으로 고종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이다. 탄생 다음 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로 고종이 제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아우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하고,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순종의 즉위 직후인 1907년 7월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丁未七條約)을 체결하여 국정 전반이 일본인 통감 이토(伊藤博文)의
간섭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 정부 각부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여 차관정치가 시작되었다. 그해 7월 19일 한국의 무장 군인 일부가 고종의
퇴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여 일본인들을 살상하는 일이 일어나자 일제는 재정 부족을 구실로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해 8월 1일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하여 9월 3일 북청진위대를 끝으로 모든 군대가 해산되었다. 사이에 서울과 지방의 각급 그리고 10월에는 한국
경찰을 일제 경찰에 강제 통합시켰다.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己酉覺書)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하였다. 이리하여 순종은 허수아비 황제가 되고
이토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어 소네(曾彌荒助)를 거쳐 군부 출신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여 대한제국을 합병하려는 공작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1909년 7월 각의(閣議)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한국 및 만주 문제를 러시아와 협상하기
위해 10월 26일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가 안중근(安重根)에 의하여 포살되자 합병을 실행하였다. 먼저 이완용·송병준·이용구(李容九)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합병을 청원하게 하였고, 갖은 위협과 매수로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이 합병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자주 독립을 위한 저항도 격렬하였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에 저항하여 서울의
시위대 군인들은 일본군과 맹렬한 전투를 벌인 후 병영을 이탈하여 의병에 합세하였고 해산된 지방의 진위대 군사들도 의병 부대에 가담하였다.
군인들의 의병군 가담은 사기를 높이고 조직적인 항전으로 발전하였다. 의병은 강원도·충청북도· 경상북도·경기도를 비롯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각처에서 일본인들이 살해되고 군아(郡衙)·면사무소·경찰분파소·우체국, 그리고 전당포 등이 파괴되었다. 이에 일본군이 대거 토벌 작전에 나서자
전국이 전쟁과 같은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1908년 음력 정월 전국 의병군 13도창의군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이 때 집결한 의병군은 모두 1만명에 달하였다.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이 국제법상 교전 단체임을
선언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선봉 부대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고, 본대는 동대문 밖에서 혈전을 벌인 끝에 화력의 열세로
퇴각하였다. 의병의 수도 탈환은 무산되었으나 이 작전은 한국민의 저항의지를 내외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후에는 간도 지역으로 옮겨 독립군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의병 활동과 함께 민족의 저력을 키우고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애국계몽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민족저항 운동은 통합되지 못하였고, 일부 친일매국노들의 훼방으로 독립의 전망은 어둡게 되었다.
순종은 제위(帝位)에 있는 동안 일제의 위협과 친일 관료들 틈바구니에서 위축되어 국가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종언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었다. 일제는 그를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으로 예우하고 허울뿐인 왕위를
세습토록 하였고, 이왕직(李王職)을 설치하여 왕실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4월 25일에
서거하였다. 그해 6월 10일 인산(因山)일에는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능호는 유릉(裕陵)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