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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철종실록》의 편찬 경위와
찬수관
《철종실록》은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의 재위 기간(1849년 6월 ~ 1863년 12월) 14년 7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정식 이름은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실록(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實錄)》이다.
본문이 15권 8책이며, 행록(行錄)·시책문(諡冊文) 등을 수록한 부록이 1책이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합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철종실록》은 철종이 승하한 다음해인 1864년(고종 1) 4월 29일 북영(北營)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총재관(摠裁官) 등의 관원을
임명하여 편찬을 시작하였다. 실록의 편찬은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이루어졌고 특별한 난관은 없었다. 먼저 《시정기(時政記)》·
《일성록(日省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기초로 실록에 수록할 기사들을 선택하여 7월 2일 ‘산절등본(刪節謄本)’을 완성하였다. 여기에
각사의 문서들을 참고하여 10월 4일에 ‘찬수등본(纂修謄本)’을 작성하였다. 이것이 실록의 초초(初草)이다. 이후 교정본(校正本)인
중초(中草)를 작성하고, 초초와 중초를 바탕으로 1865년(고종 2년) 윤5월에 정초(正草)가 완성되었다. 이것이 곧 《철종실록》이다. 이
정초를 4벌씩 인쇄하여 각 사고에 봉안하고, 초초·중초 등은 세초(洗草)하였다. |
이로써 《철종실록》의 편찬 사업은 모두 끝났다. 《철종실록》의 본문에는 재위 14년 7개월간의 역사를 일기체로
기록하였으나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부록에는 행록(行錄)·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비문(碑文)·지문(誌文)·시장(諡狀)·행장(行狀)
등을 수록하였다.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의 주요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摠裁官):
정원용(鄭元容)·김흥근(金興根)·김좌근(金左根)·조두순(趙斗淳)·이경재(李景在)·이유원(李裕元)·김병학(金炳學) 각방 당상(各房堂上):
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홍재철(洪在喆)·윤치희(尹致羲)·조득림(趙得林)·이돈영(李敦榮)·홍종응(洪鍾應)·
윤치정(尹致定)·조석우(曺錫雨)·이승익(李承益)·김보현(金輔鉉)·조구하(趙龜夏)·김병지(金炳地)·조병협(趙秉協)·박규수(朴珪壽)·
이재원(李載元)·조성하(趙成夏) 교정 당상(校正堂上):
강시영(姜時永)·조휘림(趙徽林)·이우(李稅)·김병덕(金秉德)·신석희(申錫禧)·홍종서(洪鍾序) 교수 당상(校讐堂上):
김학성(金學性)·정기세(鄭基世)·김병주(金炳酩)·남병길(南秉吉) 도청 낭청(都廳郞廳): 이기정(李基正) 등 6명 각방 낭청(各房郞廳):
홍승억(洪承億) 등 53명 분판 낭청(粉板郞廳): 홍종학(洪鐘學) 등 10명.
2.《철종실록》의 내용
철종(1831~1863)의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聘)
광(?)의 셋째 아들이며,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다. 생모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였으나,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아들[양자]로 삼고 순조(純祖)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는 선왕인 헌종(憲宗)의 숙부 항렬이었으므로 그의 대통을 잇기는 하였으나, 가계(家系)는
순조를 잇는 것으로 되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영입되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9세였고 미혼이었다. 철종의 선대(先代)는 여러 가지 하자가 있어 그가 왕실의 대통을 잇기에 문제가 많았으나, 당시 영조의 혈손
(血孫)으로 남아 있었던 사람은 그가 유일하였기 때문에 왕위에 추대되었다. 은언군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서자로, 부채를 많이 진 일 때문에
영조 때 제주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고, 정조 때는 아들 상계군(常溪君) 이담(李湛)이 모반죄로 몰려 자살했을 때 연루되어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1801년(순조 원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그의 처와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로 처형되자, 그도 사사되었다. 철종의 형인 원경(元慶: 懷平君
明)도 1844년(헌종 10년) 이덕원(李德遠)의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이 때문에 철종 일가는 왕족으로서의 관작과 특권을 모두 박탈당하고
강화도에 귀양가서 어렵게 살았다. 1849년 헌종이 죽자 그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血孫)이라는 명분으로 왕실에 영입되어 대통을 잇게 되었으나,
이는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장기집권 책략과 결부되어 있었다. 철종은 서울로 봉영된 후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 관례(冠禮)를
행한 후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친족 김문근(金汶根)의 딸(明純王后)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순조 때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확고하게 되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으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이 좌우하였다. 이 때문에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탐관오리가 수탈을 일삼았고,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국왕은 1853년 관서지방의 기근 때 11만냥을 풀어 진대(賑貸)에 힘쓰고,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민가와 수재지역의 빈민들에게 많은 내탕금을 내려 지원하였으나, 고식적인 방책에 지나지 않았고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였다. 결국 1862년(철종 13) 봄 진주민란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민란과 소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는 등 난의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해 때문에 사회 경제적인 개혁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렇게 불안한 사회현상 때문에 민심이 동요되어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동학(東學)이 일어나게 되었다. 1860년(철종 11) 4월 최제우(崔濟愚)가 창도한 동학(東學)이 급속하게 전파되어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자, 조정에서는 1863년 11월에 그를 체포하여 다음 해 3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철종은 1863년 12월 8일
군림한지 14년만에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존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 묘호는 철종(哲宗),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 서삼릉(西三陵)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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