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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순조실록》의 편찬 경위와
수찬관
《순조실록》은 조선 제 23대 국왕이었던 순조(純祖)의 재위 기간(1800년 7월 ~ 1834년 11월) 34년
5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본서 34권 34책과 부록 2책을 포함하여 모두 36책이며 활자로 간행되었다. 순조의 본래 묘호는
순종(純宗)이었고, 그 실록의 명칭도 《순종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실록(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實錄)》 약칭
《순종대왕실록(純宗大王實錄)》 이라고 하였다. 1857년(철종 8) 8월에 묘호를 순조로 추존하면서 실록을 《순조대왕실록》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헌종 때 실록을 편찬할 때는 부록이 1책이었으나, 1865년(고종 2) 윤5월 《철종실록》을 편찬할 때 인릉(仁陵) 천장(遷葬) 비문과
지문(誌文)을 수록한 부록 속편 1책을 따로 만들어 붙였다.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일괄해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순조실록》은 헌종
원년(1835)에 편찬을 시작하여 헌종 4년(1838)에 완성하였다. 총재관(摠裁官)에는 이상황(李相璜)·심상규(沈象圭)·홍석주(洪奭周)·
박종훈(朴宗薰)·이지연(李止淵) 등이 차례로 임명되어 편찬을 주관하였다. 《순조실록》의 편찬은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이루어졌고, 특별한 난관은
생기지 않았다. |
본문은 재위 34년간의 역사를 일기체로 기술하였고, 부록 제1책에는
행록(行錄)·시책문(謚冊文)·애책문(哀冊文)·비문(碑文)·지문(誌文)· 시장(謚狀)·행장(行狀)을 수록하였으며, 제2책에는 철종
7년(1856)에 있었던 인릉(仁陵) 천릉비문(遷陵碑文)과 천릉지문(遷陵誌文)을 수록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摠裁官): 이상황(李相璜)·심상규(沈象圭)·홍석주(洪奭周)·박종훈(朴宗薰)·이지연(李止淵), 도청 당상(都廳堂上):
신재식(申在植)·조인영(趙寅永) 각방 당상(各房堂上):
조만영(趙萬永)·홍희준(洪羲俊)·김이재(金履載)·서준보(徐俊輔)·김로(金邱)·김학순(金學淳)·김난순(金蘭淳)·이익회(李翊會)·
홍경모(洪敬謨)·박회수(朴晦壽)·서희순(徐憙淳)·김매순(金邁淳)·이가우(李嘉愚)·서경보(徐耕輔)·김유근(金孵根)·정원용(鄭元容)·권돈인(權敦仁)·
서유구(徐有榘)·정기선(鄭基善)·이헌기(李憲琦)·박영원(朴永元)·김홍근(金弘根) 교수 당상(校讐堂上):
이헌위(李憲瑋) 각방 낭청(各房郞廳): 남헌교(南獻敎) 등 1백 16명
2.《순조실록》의 내용
순조(1790~1834)의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이다.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수빈(綏嬪) 박씨로
박준원(朴準源)의 딸이다. 정조 14년(1790)에 태어나 1800년(정조 24)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11세였으므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貞純王后: 英祖의 繼妃 慶州金氏)가 수렴청정하였다. 1802년(순조
2) 10월 정조가 간택하였던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王妃 : 純元王后)로 맞았다. 《순조실록》은 전대의 실록에
비하여 기사가 매우 짧고 내용도 소략하며 기사가 없는 날도 많다. 대략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800년 7월 순조의 즉위 초부터 1804년
12월까지 4년 반까지는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와 벽파 관료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1801년에는 궁방(宮房)과 관아(官衙)에 예속되어
있던 공노비(公奴婢)를 혁파하고 서얼허통(庶蘖許通)을 시행하였다. 그해 시파(時派)를 숙청하기 위한 구실로 사교(邪敎) 탄압을 시작하여 2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를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한다. 1804년 대왕대비의 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친정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때부터 국구(國舅) 김조순(金祖淳)을 비롯한 안동김씨 일문이 정권을 장악하여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농단하면서 매관매직을 일삼아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하게 되었다. 이에 도탄에 빠진 민중들은 각종 비기(秘記)와 참설(讖說)에 현혹하게 되고
불안이 팽배하게 되어 커다란 사회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1811년 12월 평안도 가산에서 홍경래(洪景來)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 평안도 일대를 유린하게 되었다. 난은 이듬해 4월 정주성(定州城)이 함락됨으로써 평정되었다. 그러나 1813년 제주도의 양제해(梁濟海)
난, 1815년 용인의 이응길(李應吉)의 난 등 소규모의 민란이 그치지 않았다. 1817년 유칠재(柳七在)·홍찬모(洪燦謨) 등의 흉서사건
(凶書事件), 1819년 액예(掖隷) 원예(院隷)들의 모반(謀叛), 1826년 청주 괘서사건(掛書事件) 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1821년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 전염병이 돌아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순조 연간에는 민란과 천재지변이 겹쳐 일어나 사회가 불안하였다. 순조
19년(1819) 왕세자[孝明世子: 후일 추존 翼宗]가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이고, 1827년에는
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자 풍양조씨(豊壤趙氏) 일문이 크게 등용되어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하였으나, 1830년 세자가 죽자
실세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 헌종(憲宗) 때 득세하여 세도를 잡게 되었다. 순조 때도 국가적인 편찬사업이 계속되어 《양현전심록
兩賢傳心錄》·《사부수권 四部手圈》·《대학유의 大學類義》·《정조어정홍재전서 正祖御定弘齋全書》·《서운관지 書雲觀志》· 《동문휘고 同文彙考》 등이
간행되었다. 순조는 34년을 재위한 후 1834년 11월 45세의 나이로 훙서하였다. 존호는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이며, 묘호는 처음 순종(純宗)으로 정하였다가, 1857년(철종 8) 8월에
순조(純祖)로 추존 개정하였다. 능호는 인릉(仁陵)으로 처음 교하군(交河郡: 현 파주군 탄현면) 장릉(長陵: 인조의 능) 경내에 조성하였으나,
철종 7년(1856)에 현재의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獻仁陵) 경내로 천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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