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전건축

鶴山 徐 仁 2006. 7. 28. 08:52

  sanho(http://sanho.new21.net/)  
 종묘_영전전.jpg (46.9 KB)
 종묘영정전2.jpg (81.9 KB)
 종묘영녕전 宗廟永寧殿 보물 제821호



 ▒ 지정연월일 : 1985년 1월 8일 
 ▒ 시 대 : 조선 세종 3년(1421) 창건, 광해군 즉위년(1608) 재건 
 ▒ 규모·양식 : 정전 정면 4칸, 좌·우 협실 각 정면 6칸, 동·서 월랑  
        각 정면 5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익공집 
 ▒ 재 료 : 석조 월대, 목조 
 ▒ 소 유 자 : 국유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2-1  
종묘 영녕전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別廟)다. 
서울에 있는 지금의 종묘는 태조 4년(1395) 건립되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로 완비된다. 
세종 원년(1419)에 이르러 2대 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목조·익조·도조·환조)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宋)나라에서 따로 별묘(別廟)인 
사조전(四祖殿)을 세워 4조(四祖)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지금의 종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영녕전(永寧殿)을 건립하게 된 근거이다. 
영녕전의 '영녕(永寧)'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 
세종 3년(1421) 10월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太室) 4칸, 
양옆 익실(翼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 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정전인 종묘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로 올려 모시고, 도조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왕조의 종묘건축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는 제도로 
기본적으로 완비를 보게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 하게 되고 또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종묘는 원래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영녕전은 별묘였다. 종묘 영녕전은 정전과 함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선조 41년(1608), 무신년 1월에 종묘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영녕전은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 영녕전은 현종 8년(1667)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년(1836) 좌우 협실 2칸을 각각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다.
헌종 때의 증축은 헌종 1년(1835) 6월 논의되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을 설치하여 시행하게 된다. 증건 규모는 정전은 4칸을 늘려 
지금의 규모인 19칸으로, 영녕전은 동·서 협실 각 2칸을 늘려 현재의 규모인 정전 4칸, 
동·서 협실 각 6칸으로 된다.
별묘인 영녕전은 네모나게 둘레담으로 쌓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묘정공간을 형성하고, 
남쪽 담에는 신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각 동문과 서문을 두어 제례시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영녕전도 정전과 마찬가지로 묘정 월대에 신로가 나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영녕전 건물은 중앙에 정전 4칸, 좌·우에 각각 협실 6칸씩을 두어 모두 1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 협실 양끝에 직각으로 덧붙여서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있다. 
내부 공간 구성과 이용은 종묘 정전과 기본적으로 같다. 영녕전 서남쪽으로는 영녕전 악공청이 있다.
건물은 지지체인 주춧돌과 원기둥을 두툼하고 굵게 만들고, 이 위에 가장 간결한 공포인 
초익공을 짜올려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 중앙계단의 섬돌과 문설주 양옆에는 
태극무늬를 새겨 놓았다. 단청은 붉은색과 청록색 2색만을 사용하였다.
영녕전과 정전이 서로 다른 점 몇 가지를 들면,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다. 
그리고 건축규모 면에서 정전의 건축 영역이 영녕전 보다 넓다. 
또 건축 형식면에서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 규모의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정전보다 규모가 작다. 이외에도 영녕전에는 정전에 있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다.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추존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는데,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이후의 왕도 도리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 갈 수가 없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또, 벽체와 기둥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정전에서는 전퇴의 열주(列柱)를 제외한 모든 기둥을 벽 속에 숨긴 데 반하여, 
영녕전에서는 원기둥을 노출시켜서 벽면을 나누고 있다. 
영녕전 정전에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순으로, 서협실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동협실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英王)과 
각 왕의 비를 합쳐 모두 34위의 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종묘에는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부석사[浮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한다. 〈송고승전 宋高僧傳〉 의상전(義湘傳)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鄕音)으로 보기도 한다.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의상 이후 혜철(惠哲)을 비롯하여 신라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無染)과 징효(澄曉)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이곳에 머문 원융(圓融)은 대장경을 인쇄했는데 지금 부석사에 전하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72년(공민왕 21) 원응(圓應)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하여
원각전·응진전·안양루·선묘각·범종루·자인당 등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고려판각(보물 제735호)·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있는 석룡(石龍)·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 등이 전해지고 있다.


초 암 사 (영 주)




초암사는 소백산의 남쪽자락 국망봉 아래 죽계구곡 끝자락에 있는 작은 사찰이다.
규모나 명성에 비해 역사가 오래돼 찾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초암사의 역사는 무려 천년이 넘는다.
의상대사가 호국사찰을 짓기 위해 이곳에 초막을 짓고 땅을 찾다가 결국 부석사를 짓게 되었다는 곳이다.
의상은 부석사를 지을 때까지 초막에 머물다가 부석사가 완성된 후에 초막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초암사라 했다.
그후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모든 건물이 다 없어졌다가 1
970년중반에 보원(寶元)스님이 주석하면서 새로이 법당을 짓고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였다.
절 아래까지 시멘트 길을 놓아 절을 찾아가는 아기자기한 산길의 묘미는 없어졌지만,
소백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에겐 더 없는 중간 기착점이 되어주기도 한다.

초암사로 오르는 길은 소백산 매표소에서부터 줄곧 죽계구곡을 끼고 오른다.
8곡을 지나고 5곡의 목욕담에서 잠시 계곡에 손이라도 담그로 일어서면 곧이어 3곡앞의 나무 다리다.
이곳을 지나면 왼쪽 언덕위로 화장실이 나오고, 그 너머로 울창한 나무사이로 초암사 종각의 단청이 얼핏 내비친다.

초암사 바로 옆은 죽계구곡 중에서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청운대다.
종각옆으로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그 위쪽으로 대웅전이 제법 큰 위용을 내보인다.
종각 아래쪽 요사채로 들어가면 작은 삼층석탑을 보게 된다.
초암사의 옛 영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때의 석탑이다.
석탑옆으로 서 있는 두개의 부도 또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3층석탑
통일신라때의 석탑으로 높이는 3.5m이다. 사각형의 받침석위에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석탑 사면에는 우주(隅柱)와 일주(一柱)씩의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다..

■ 동부도
팔각원당형의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부도로 요사채 앞에 세워져 있는데 부숴진 것을 다시 복구했다.

■ 서부도
방형의 지대석 위에 단엽의 복련을 돌린 하대석을 얹었는데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 돌에 새겼다. 중대석은 8각 모서리에 우주를 표시하고 각 면은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1.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원주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탄 뒤
   풍기나들목에서 나가 931번 지방도를 달린다. 순흥면소재지 지나자마자,
   소수서원·선비촌 못미쳐 순흥사거리에서 초암사 팻말 보고 좌회전,
   저수지를 보고 3㎞쯤 들어가면 배점리 초암사 주차장이다.
   여기서 왼쪽 시멘트길로 300m쯤 올라가면 상수도수원지 밑에 제9곡이 있고,
   여기서 좀더 가면 매표소가 나온다.  

2. 영주쪽에서 간다면, 영주시내에서 풍기쪽으로 진입하면 서천교 바로 직전에서
   소수서원이정표가 나온다. 이를 따라가면 순흥으로 바로가는 길. 순흥읍내를 지나면서
   바로 만나는 순흥사거리에서 초암사 이정표를 따라 직진해 들어가면 된다.

3.부석사쪽에서 접근한다면, 부석사에서 풍기방향으로 길을 잡고 나오면 선비촌입구와
  소수서원을 지나면서 곧바로 순흥사거리를 만난다. 여기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초암사로 오르는 길이 죽계구곡이다. 매표소아래에 9곡이 있고,초암사 바로위에 1곡이 있다.
초암사 대웅전을 지나 국망봉방향으로 200미터만 가면 왼쪽 계곡아래가 제 1곡인 금당반석이다.
넓은 바위위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작은 폭포까지 있다.  


개 심 사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상왕산 자락에 있는 사찰.

개심사에서 발견된 목불이 국내 최고의 목불로 알려져있다.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또는 백제 의자왕 14년(654년)에
혜감국사가 개원사(開元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000년이 넘은 사찰인 셈이다.
고려 충정왕 2년(1350년) 중건하면서 이름을 개심사로 고쳤다 한다.
조선 성종실록에 성종 6년(1475년) 개심사가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성종 15년(1484년에)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지금의 고풍어린 건물들은 이때 재건축된 건물이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단아하며
수수하면서도 건축미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는다.


개 심 사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상왕산 자락에 있는 사찰.

개심사에서 발견된 목불이 국내 최고의 목불로 알려져있다.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또는 백제 의자왕 14년(654년)에
혜감국사가 개원사(開元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1000년이 넘은 사찰인 셈이다.
고려 충정왕 2년(1350년) 중건하면서 이름을 개심사로 고쳤다 한다.
조선 성종실록에 성종 6년(1475년) 개심사가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성종 15년(1484년에)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지금의 고풍어린 건물들은 이때 재건축된 건물이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단아하며
수수하면서도 건축미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는다.


월 정 사



위    치 :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오대산국립공원내)

월정사 www.woljungsa.or.kr

관 리 청 : 월정사(033-332-6664/5)

           월정사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
           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보살이 상
           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 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일천사백여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 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 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불교의 중요한 버팀
           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이며, 60여개의 사찰과 8여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신
           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월정사에는 국보 48호인 팔각9층석탑 및 보물 139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등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1Km에 달하는 500년 수령의 전나무 숲과 함께 오대산을 상징하는 사찰이다.


도로안내 : 영동고속도로 -> 진부 IC -> 6번 국도 -> 4km -> 월정 3거리 (월정주유소) -> 좌회전 ->
           4km 북상 -> 간평교 -> 삼거리 -> 좌회전 -> 4km -> 월정사 앞 주차장 -> 8.3km 북상 ->
           상원사 앞 주차장

현지교통 : 진부-월정사 경유 상원사행 시내버스이용/ < 12회 운행 >/ 20분소요

현지숙박  : 업소명                     전화번호         객실수   소재지
            -----------------------------------------------------------
            호텔 오대산                033-330-5000      306     진부면
  
           (민  박) 동산리 일대 40여 가구
           (야영장) 오대산 단지내, 캠프파이어 금지
           (산  장) 오대산장여관(332-6578)

주요문화재 : 1) 월정사 8각9층석탑(국보 제48호)      
             2)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주변명소 : 용평스키장, 방아다리약수, 휘닉스파크, 경포도립공원

정보제공자 : 1) 월정사 (033-332-6664/5)
             2) 평창군청 문화관광과 (033-330-2399)




'歷史. 文化參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조실록> 해제  (0) 2006.07.29
<정조실록> 해제  (0) 2006.07.29
[스크랩] 대마도는 ??  (0) 2006.07.27
<영조실록> 해제  (0) 2006.07.26
<경종수정실록> 해제  (0) 2006.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