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정연월일 : 1985년 1월 8일
▒ 시 대 : 조선 세종 3년(1421) 창건, 광해군 즉위년(1608) 재건
▒ 규모·양식 : 정전 정면 4칸, 좌·우 협실 각 정면 6칸, 동·서 월랑
각 정면 5칸 측면 1칸 맞배지붕 익공집
▒ 재 료 : 석조 월대, 목조
▒ 소 유 자 : 국유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2-1
종묘 영녕전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別廟)다.
서울에 있는 지금의 종묘는 태조 4년(1395) 건립되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로 완비된다.
세종 원년(1419)에 이르러 2대 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목조·익조·도조·환조)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宋)나라에서 따로 별묘(別廟)인
사조전(四祖殿)을 세워 4조(四祖)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지금의 종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영녕전(永寧殿)을 건립하게 된 근거이다.
영녕전의 '영녕(永寧)'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
세종 3년(1421) 10월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太室) 4칸,
양옆 익실(翼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 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정전인 종묘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로 올려 모시고, 도조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왕조의 종묘건축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는 제도로
기본적으로 완비를 보게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 하게 되고 또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종묘는 원래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영녕전은 별묘였다. 종묘 영녕전은 정전과 함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선조 41년(1608), 무신년 1월에 종묘 중건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영녕전은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 영녕전은 현종 8년(1667)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년(1836) 좌우 협실 2칸을 각각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다.
헌종 때의 증축은 헌종 1년(1835) 6월 논의되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을 설치하여 시행하게 된다. 증건 규모는 정전은 4칸을 늘려
지금의 규모인 19칸으로, 영녕전은 동·서 협실 각 2칸을 늘려 현재의 규모인 정전 4칸,
동·서 협실 각 6칸으로 된다.
별묘인 영녕전은 네모나게 둘레담으로 쌓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묘정공간을 형성하고,
남쪽 담에는 신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각 동문과 서문을 두어 제례시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영녕전도 정전과 마찬가지로 묘정 월대에 신로가 나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영녕전 건물은 중앙에 정전 4칸, 좌·우에 각각 협실 6칸씩을 두어 모두 1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 협실 양끝에 직각으로 덧붙여서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있다.
내부 공간 구성과 이용은 종묘 정전과 기본적으로 같다. 영녕전 서남쪽으로는 영녕전 악공청이 있다.
건물은 지지체인 주춧돌과 원기둥을 두툼하고 굵게 만들고, 이 위에 가장 간결한 공포인
초익공을 짜올려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 중앙계단의 섬돌과 문설주 양옆에는
태극무늬를 새겨 놓았다. 단청은 붉은색과 청록색 2색만을 사용하였다.
영녕전과 정전이 서로 다른 점 몇 가지를 들면,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다.
그리고 건축규모 면에서 정전의 건축 영역이 영녕전 보다 넓다.
또 건축 형식면에서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 규모의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정전보다 규모가 작다. 이외에도 영녕전에는 정전에 있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다.
목조, 익조, 도조, 환조는 추존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는데,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이후의 왕도 도리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 갈 수가 없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또, 벽체와 기둥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정전에서는 전퇴의 열주(列柱)를 제외한 모든 기둥을 벽 속에 숨긴 데 반하여,
영녕전에서는 원기둥을 노출시켜서 벽면을 나누고 있다.
영녕전 정전에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순으로, 서협실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동협실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英王)과
각 왕의 비를 합쳐 모두 34위의 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종묘에는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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