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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헌종실록》의 편찬 경위와
찬수관
《헌종실록》은 조선 왕조 제24대 국왕 헌종(憲宗)의 재위 기간(1834년 11월 ~ 1849년 6월)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정식 이름은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실록(憲宗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實錄)》이다. 본문은 16권 8책이며,
행록(行錄)·애책문(哀冊文) 등을 수록한 부록이 1책이다. 활자로 간행되었으며,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헌종실록》은 헌종이 죽은 6개월 후인 1849년(철종 즉위년) 11월 15일에 교서관(校書館)에 실록청을 개설하고,
총재관(實錄廳摠裁官)·당상(堂上)· 낭청(郞廳) 등을 임명하여 편찬을 시작하였다. 실록청은 전례에 따라 도청과 3방(房)으로 나누어 각각 당상과
낭청을 배정하였다. 실록의 편찬은 먼저 기본 자료인 《시정기(時政記)》·《일성록(日省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을 가져와 당상들이
수록할 기사에 표시를 하여 이를 발췌하게 하였다. 이후 각 방의 낭청들이 이 발췌한 부분을 등사하여 그해 9월 5일까지 ‘산절등본(刪節謄本)’을
완성하였다. 10월 26일에는 찬수당상(纂修堂上)과 찬수낭청(纂修郞廳)을 임명하였다. 당상들은 ‘산절등본’과 각사의 문서에서 뽑은 자료를
바탕으로 초절본(抄節本)을 찬수(纂修)하고, 그것을 낭청들이 등사하여 ‘찬수 등본(纂修謄本)’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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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헌종실록》의 초초(初草)로써 철종 2년(1851년) 3월 11일에 완성되었다. 초초가 완성된 후 다시 그
달 24일에 교정당상(校正堂上)과 교정낭청(校正郞廳)을 임명하였다. 당상은 ‘산절등본’과 ‘초절본’을 교정하고 낭청이 이를 정서하여
교정본(校正本)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실록의 중초(中草)이다. 이후 도청당상(都廳堂上)이 전체를 교정하였다. 그 해 8월 4일에는 다시
교수당상(校讐堂上)과 교수낭청을 임명하여 그들이 찬수본[초초]와 교정본[중초]를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정초(正草)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곧
《헌종실록》이다. 이렇게 완성된 《헌종실록》은 그 해 1851년(철종 2년) 9월까지 인쇄되어 각 사고(史庫)에 봉안되었다. 익년(1852)
7월 27일에는 관례에 따라 초초와 중초 등을 세초(洗草)하고 잔치를 벌임으로써 실록 편찬 사업이 끝나게 되었다. 《헌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摠裁官): 조인영
(趙寅永)·정원용(鄭元容)·권돈인(權敦仁)·김도희(金道喜)·박회수(朴晦壽)·김흥근(金興根)·박영원(朴永元) 도청 당상(都廳堂上):
조두순(趙斗淳)·서기순(徐箕淳) 찬수 당상(纂修堂上):
김좌근(金左根)·이가우(李嘉愚)·윤정현(尹定鉉)·김학성(金學性)·조학두(趙鶴斗)·김보근(金輔根)·조병준(趙秉駿)·김수근(金洙根)·이경재(李景在)·김정집(金鼎集),
교수 당상(校讐堂上): 서헌순(徐憲淳)·김병기(金炳冀)
2.《헌종실록》의
내용
헌종(1827~1849)의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으로 순조(純祖)의 손자이며 익종(翼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로
풍은부원군(淵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이다. 1830년(순조 30) 세자였던 아버지 익종이 죽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834년 6월
순조의 사후에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8세였으므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純元王后: 純祖의 妃)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실록》도
《순조실록》과 같이 기사가 매우 짧고 내용도 소략하며 기록이 없는 날도 많다. 대략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헌종의 즉위 초에는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유지되었으나, 1837년(헌종 3) 3월부터 익종의 외척이었던 풍양조씨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다. 특히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고 헌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된 1841년부터 정치의 주도권이 그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1846년 조만영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안동김씨
일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도정치의 여파로 과거·인사·재정의 운용에 모순이 누적되고,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하여 국정의 혼란과
민생의 피폐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해마다 수재(水災)가 발생하고 전염병이 만연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1836년에는
남응중(南膺中), 1844년에는 이원덕(李遠德)·민진용(閔晉鏞) 등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동요하고 사회가 불안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제언(堤堰)을 수축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풍양조씨 세도정권은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천주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1839년에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는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이었던 주교
앵베르(Imbert,L.J.M.), 신부 모방(Maubant,P.P.)과 샤스탕(Chastan,J.H.)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이때
학살되었다. 조정에서는 천주교도들을 적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하고, 1846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였던 김대건(金大建)을
처형하였다. 1845년(헌종 11년) 이후에는 이양선(異樣船: 서양 선박)의 출몰이 빈번하여 불안을 조성하였다. 그해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에 나타났고, 1846년 6월에는 프랑스의 동양 함대 사령관 세실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의 외연도(外煙島) 앞 바다에 나타나
기해사옥 때 프랑스인들을 죽인 것을 항의하였고, 다음 해에 다시 와서 통상과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1848년(헌종 14년)에는 함경도
해안에 이양선이 나타났고, 1849년에는 3척의 이양선이 이원(利原)에 상륙하여 벌목을 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이양선들이 나타났는데,
북청(北靑)에 나타난 이양선은 나포되기도 하였다. 헌종 대에는 《열성지장 列聖誌狀》·《동국사략 東國史略》·《문원보불 文苑螺慮》·《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삼조보감 三朝寶鑑》 등이 편찬 간행되었다. 헌종은 1849년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23세로 후사 없이 죽었다. 존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經文緯武明仁哲孝), 묘호는 헌종(憲宗),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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