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전건축

鶴山 徐 仁 2006. 8. 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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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정전 宗廟正殿



 
국보 제227호로 지정된 종묘 정전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사당건축이다. 
종묘는 1392년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 후보로 
계룡산ㆍ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태조 3년(1394) 8월 최종적으로 
한양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이 해 10월 28일 고려의 옛 도읍지 개성을 벗어나 
천도를 한 해에 터를 개척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인 태조 4년 9월 29일에 새 궁궐과 함께 준공된다. 
준공된 종묘는 대실(大室)이 7칸인데, 대실 안에는 석실(石室) 5칸을 만들고. 
좌우에는 익랑(翼廊)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으며,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功臣堂)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神廚) 7칸, 향관청(享官廳) 5칸, 좌우 행랑(行廊)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齋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즉위 4년인 1395년 10월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와 효비(孝妃), 
익조(翼祖)와 정비(貞妃), 도조(度祖)와 경비(敬妃), 환조(桓祖)와 의비(懿妃)의 
4대 신주를 개성에 옮겨와 봉안하였다.
종묘는 태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하게 된다. 태종은 종묘 정전 건물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서월랑(東西月廊)을 건설하고,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공신당을 종묘 담 안 묘정(廟庭) 아래, 즉 동쪽 계단 아래로 옮기고, 
또 제기고(祭器庫)와 재생방(宰牲房) 등 부속건물을 지어 종묘의 제례 기능상의 정비를 한다. 
또 태종은 향관이 재계하는 처소를 재전(齋殿) 동남쪽 낮은 곳으로 옮기게 하여 
건축물 상호간의 위계를 확립하고, 둘레담과 하마비를 세워 종묘건축의 격식을 갖추게 만든다. 
명종 때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해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된다. 
그 후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년(1608)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이 때 재건된 종묘 정전은 임진왜란 전의 규모인 11칸이다. 종묘 정전은
그 후 1726년(영조 2) 4칸 증축, 1836년(헌종 2) 4칸 증축을 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 싸여 있고, 묘정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 신문(神門), 
동ㆍ서쪽에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東門)과 악공(樂工)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西門)이 각각 나 있다. 
신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이중량(二重梁)을 한 5량가(五樑架)이고, 초익공이다. 
각 칸에는 두 짝의 판문을 달았고 상부는 홍살로 되어 있다. 정전 동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초익공의 5량가 가구(架構)로 신문과 거의 동일한 법식과 크기로 되었다. 
다만, 기단 높이가 차이를 보인다. 정전 서문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초익공 5량가 건물로 
두 짝의 판문이 나 있으며, 상부에 홍살을 달았다. 남신문, 동문과 달리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 재건 당시의 건물로 추정되며, 남문·동문과 달리 기둥에 약한 배흘림이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 있다. 
이 공간은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軒架)가 자리잡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묘정 월대는 단(壇)의 일종인데, 지면으로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이 다르게 
천상(天上)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궁궐의 정전 앞에 돌로 깔고 단을 올리지 않은 것과 대조가 된다. 
묘정 월대의 중앙에는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신문에서 상월대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다. 
신로와 접한 동쪽 한 곳에는 전(塼)을 깐 방석 모양의 부갈위판(簿喝位版)을 두었고, 
동문 밖과 동월랑 남쪽 아래 묘정에는 사각형으로 된 전하판위(殿下版位)와 
세자판위(世子版位)가 각각 자리를 달리 하며 위치하고 있다. 
묘정 월대는 장대석으로 쌓아 끝을 두르고, 그 상면은 박석(薄石)을 깔았고, 
신로는 전(塼)을 깔았으며, 곳곳에 차일(遮日) 고리가 박혀 있다. 
상월대 위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정전은 매 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 나온 동·서 월랑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정 월대 남쪽 아래에는 동ㆍ서에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후 축(祝)과 폐(弊)를 불사르는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하는 예감이 있으며, 
동문 북으로 수복방(守僕房)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典祀廳)과 제정(祭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측으로는 악공청(樂工廳)이 있고, 정전 서측 북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기단은 장대석 바른층쌓기로 하였으며, 그 위에 주좌(柱座)를 둥글게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전면 반 칸은 퇴(退)로 모두 개방하였고,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이익공으로 결구하였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툇간과 각 실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천정은 넓게 방형으로 귀틀을 짜고 
그 위에 판장으로 천장을 설치해서 칸이 넓은 우물천장이 되었다. 
측면과 배면은 모두 전으로 두껍게 벽체를 쌓았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지붕은 맞배지붕을 이루었다. 
용마루와 기타 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와 잡상(雜像)들을 늘어놓아 장식하였다. 
정전 전면(前面)은 각 칸마다 두짝씩 판문(板門)을 달아 안으로 열고 닫히도록 하였으며, 
중앙 칸에는 밖으로 빗장을 달았다. 문하방 좌우에는 신방목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에 판문을 열고 발을 널어 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내부는 전체를 벽체로 칸막이를 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후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감실에는 신주가 서측에 왕, 
동측에 왕비의 위치로 봉안되어 있고, 감실 전면에는 신탑(神榻)이 있어 제향 때 신주를 모시도록 하였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측을 상(上)으로 하여[以西爲上]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동쪽으로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대)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 있다.
종묘 일곽은 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는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종묘제례와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제례는 조선시대에는 종묘 정전에서 
매년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과 섣달에 날을 잡아 5대향(五大享)을 지냈으나, 
1971년 이후로는 전주(全州) 이씨(李氏)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한 차례 올리고 있다. 
지정연월일 : 1985년 1월 8일 
시 대 : 조선 태조 4년(1395) 창건, 광해군 즉위년(1608) 재건 
규모·양식 : 정면 태실 19칸 익랑 2칸, 동·서월랑 정면 5칸, 측면 1 칸, 단층 이익공 맞배지붕 
재 료 : 석조 월대(기단), 목조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5-1 



삼년산성



사적 235호로 지정된 삼년산성은 충북 보은에 있다.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평가된다.

세계적 유산으로 지정된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은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만에 완성하고, 소지왕 8년(486년)에 개축한 석축산성이다.
『三國史記』에는 축성기간이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 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의 길이는 1,680m이고 성의 내외벽은 납작한 자연석으로 한층은 가로쌓기를 하고
한층은 세로쌓기를 하여 매우 견고하며, 높이는 13∼20m로 지형에 따라 다르다.
성 내외벽은 돌을 이용하여 쌓거나 흙을 다져 쌓는 두 가지 축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성벽의 군데군데에 곡성이 있어 우리 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에 매우 중요시 되고 있다.  
성내에는 아미지란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전해오고 있다.
성안에는 형식이 다른 문지(門址) 4개소와 옹성 7개소, 우물터 5개소, 수구지(水口址) 등의 시설이 있다.

1983년 발굴조사 당시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이 성이 신라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삼년산성이 위치한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성의 견고함과
수성의 용이함에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견고함은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을 통해 확인이 할 수 있으며,
삼년산성의 성벽축조방식은 우리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 자료로서 중요하다.

삼년산성은 지형의 특징을 고려해서 축조한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포곡(包谷)형 산성으로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견고하게 축성한 성벽은
우리나라 고대 산성의 축성법 연구 자료로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세계문화유산 등록기준 = (Ⅱ), (Ⅲ), (Ⅳ), (Ⅴ), (Ⅵ)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Ⅴ) 중요하고 전통적인 건축양식, 건설방식 또는 인간주거의 특징적인 사례로서
     자연에 의해 파괴되기 쉽거나 역행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
     혹은 경제적 변혁의 영향으로 상처받기 쉬운 것

(Ⅵ) 역사적 중요성이나 함축성이 현저한 사상이나 신념, 사진이나 인물과 가장 중요한 연관이 있는 유산
  


미륵산성(彌勒山城, 충북 괴산)


하나의 성에 4가지 공법을 사용하여 축성한 점이 특징

전체적으로 성벽의 잔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고려시기 대규모의 입보농성용 산성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화양동 남쪽에 있는 낙영산과 성암부락 동쪽에 있는 도명산 중턱을 둘러싼 성터로
‘도명산성’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무너져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남아있는 벽은 길이 700m에 높이가 약 2m이다.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과 고려 전기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또 건물터를 중심으로 도기조각,
자기조각, 돌로 만든 절구, 숫돌이 발견되었는데, 유물들의 성격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쌓은 성으로 보인다.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에 쌀개봉 능선을 따라 성벽의 형태가 남아있는
미륵산성(彌勒山城)은 낙영산(落影山, 685.2m)과 도명산(道明山650.1m)의
정상을 각각 남북으로하여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한 전체둘레 5.1km,
외성을 합한 석축만도 3.7km에 달하는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 이다.

서쪽으로 난 계곡에 수문과 서문을 내고 서문의 바깥 좌우의 기슭에 외성을 축조하여
계곡 방면을 공제하고 있으며, 성의 동문은 화양동 계곡쪽에 남문은 사담계곡쪽에 시설되었다.
성내에는 여러 개의 건물터가 있고 중앙부인 수정골에는 수정의 원석이 발견되고 있다.
이 산성은 고려 초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지난 96년에야 그 실체가 확인됐다.
현재 완전붕괴되어 그 원형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낙영산 마애불로 인하여
미륵산성에 비정되기도 하는데 성내에서 신라계 토기편과 고려초의 와편이 발견되었다.

현재는 중심성과 바깥성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안의 정상부근 바위에 도명산 마애불이 음각되어 있고 문터,
건물터 8곳, 성 안팎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장치인 수문터, 우물터 4곳이 남아 있다.

경부고속도로 청주 I.C → 보은 방면 미원 경유 → 19번 국도 → 미원면 구방리 →
592번 지방도 → 청천면 → 592번 지방도 → 도원 1교 → 화양동(1시간10분 소요)

중부고속도로 증평 I.C → 청안방면 592 지방도 → 부흥 → 금평 삼거리 → 도원 1교 → 화양동(1시간 )

                


은해사거조암영산전 (銀海寺居祖庵靈山殿)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는 은해사(銀海寺) 는 신라 헌강왕 원년(서기809년) 
해철국사가 창건한 절인데 처음에는 해안사라 칭했다고 한다. 이 일대 수십개 사찰들의 본사이며, 
팔공산 일대에 백흥암 등 많은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기도 하다. 
청통면 신원동에 있는 거조암 역시 은해사에 속한 암자지만 직선 거리가 4㎞ 이상 떨어지고 
입구도 아예 본절과는 달리 신령면에서 들어간다. 
거조사(居祖寺)라고도 하는데 738년(효성왕 2)에 승려 원참(元浚)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거조암에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靈山殿)이 있다. 경북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된 
은해사 거조암 삼층석탑도 있다.    
거조암의 영산전은 불규칙한 장대석과 잡석으로 건물의 기초를 잡았으며, 중앙에 
간단한 돌계단을 통해 내부로 출입하게 한, 엉성하리만치 길다란 목조건물이다. 
측면 중앙간을 형성하는 두개의 고주와 그 앞뒤의 평주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있고 
고주와 평주는 퇴보로 연결되어 평주위에 공포에 의하여 퇴보 안끝이 받쳐져 
이것이 주심도리를 받치게 되고 출목으로 된 첨자는 퇴보 끝을 받으면서 외목도리를 받쳤다.
고주머리에는 뜬 창방을 돌리며 기둥 뒤에는 주두를 두고 역시 포작으로 대들보 끝을 받아 
대들보 끝은 중도리를 받치게 하였다.이 마루돌이는 역시 내반된 소슬합장으로 받치고 있고, 
천장의 가구는 전혀 없이 주심포집의 특징인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의 세부를 보면 주두나 소루가 다포집과 같은 형태로 된 이외에는 
주심포집 양식의 초기 형태를 충실하게 나타낸 매우 중요한 건축양식이다.
즉, 공포의 살미첨자 끝이 거의 수직으로 잘렸고 첨자 하단의 S자 모양 곡선이 2단으로 꺾인 
매우 간단한 곡선으로 되었으며, 대들보 또는 퇴보의 단면이 주심포집의 특징을 그데로 살렸다.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으나 일부 학자는 고려 말기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 건물의 공포의 형태나 마루도리를 받는 소슬합장의 내반된 곡율이 작은 점 등으로 보아 
국보 제13호인 무위사 극락전보다 앞서는 건물로 치는 것이다
한국 가람건축들은 내부공간보다도 외부공간이 더 짜임새있고 공간감있다고 인식돼 왔다. 
건물들의 규모가 작고 하나의 방으로 뚫린 단순한 구조여서 실내에는 별다른 공간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거조암 영산전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이 절에는 커다란 
영산전 건물만이 부각되어 다른 건물 사이의 마당이 형성되지 않고, 오히려 
영산전 안의 거대하고 높고 시원한 내부공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내부의 중앙 한칸에 작은 불단을 마련해 석가를 모시고, 주변에는 500 나한상들을 모셔 두었다.
 내부공간에 별다른 장식은 없다. 배흘림된 나무 기둥들과 서까래가 노출된 지붕틀, 
그리고 기둥들과 지붕틀을 연결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나무 부재들 뿐으로 모두가 구조적인 부분들이다. 
일절 불필요한 부재들은 없고, 단청도 되지 않은, 마치 뼈대들만 노출된 생명체의 골격을 보는 것 같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힘차고 박진감있는 아름다운 공간감을 형성한다. 
영산전의 내부공간이 주는 감동은 일체 가식없이 솔직하게 구조들을 노출시킨데서 기인한다. 
이런 면에서 구조미는 윤리적인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의 건축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구조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조를 노출시키기 위해서는 건물 전체를 마치 커다란 가구를 짜듯이 치밀하게 조립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에서 공예적인 아름다움이 솟아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 
 엉성한 지붕틀의 구조를 감추기 위해 천장을 씌우고, 화려하고 복잡한 단청문양들로 
내부를 감싸는 조선시대의 불전들과는 발상이 다른 공간들이었다. 단순하고 소박한 듯 하지만, 
고려 건축들은 적절한 비례와 섬세한 스케일로, 역동적인 구조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건강한 건축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거조암 영산전에서 본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위 세 건물 예와, 성불사 응진전, 
강릉 객사문 정도로 모두 꼽아야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거조암 영산전은 
시대적으로 중요한 유구일 뿐 아니라, 형태적으로 다른 고려시대 건물과 차이가 난다. 
이 건물은 7칸의 기다란 정면을 가졌지만 측면도 3칸으로 두꺼워 두툼한 외관을 가지며, 
무엇보다도 넓고 높은 내부공간이 특색이다. 정면에는 중앙칸에만 두꺼운 나무 판장문이 달렸고, 
다른 칸들에는 가로로 길게 고정된 붙박이 살창을 달았다. 정면 모두에 창호지 문들을 단 
일반적인 불전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외형이다.


각황전(覺皇殿)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覺皇殿)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지리산의 억센 맥을 누그러뜨리려 세웠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으로 국보 6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부처님의 몸을 가리켜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해서 본래 장육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만한 금색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장육전은 임진왜란때 불타버려 당시의 모습이나 불상은 찾아 볼수가 없다.

본래 이 건물은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의상대사가 3층,
사면 7칸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소실된후 30년만인 1636년(조선 인조 14년) 벽암선사에 의해
화엄사는 복구되었으나 각황전만은 복구되지 못하다 1699년(조선 숙종 25년)
계파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정면 7칸 (26.8m), 측면 5칸 (18.3m), 높이 15m로
내부 전체가 한칸의 방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안에 세워져 있는
기둥 하나 하나는 한그루의 나무로만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고
천장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주변이 경사지게 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다고 한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황전리(黃田里) 화엄사 경내에 있는 건물.
1703년(숙종 29)에 세워졌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이고 양식은 중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숙종 때 계파(桂波)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완공 후 숙종이 사액(賜額)하여 각황전이라 하였다.  

대석조 기단 위에 선 웅장한 건물로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끼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둘렸다.
평방 위에는 기둥 위와 주간(柱間)에 공포(?包)를 올렸으며 공포는 상하층 모두
2출목(二出目)으로 되었다. 현재 건물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경석(華嚴經石)이 수장되어 있으며 각황전은 그 거대함과 아울러 이것으로도 이름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