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현대건축

鶴山 徐 仁 2006. 7. 19. 08:59

  (http://sanho.new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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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흥은행 대전지점 (근대문화유산 지정 제20호)



대전 동구 원동 51-3

지정일 : '02.5.31
건축일 : 1951  
구 조 : 지상 2층 철근콘크리트 라멘조로 무장식 화강석 평판붙임으로 마감
          근대의 권위적인 모습을 탈피한 현대적 분위기의 건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민족자본의 상업적 은행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 (근대 건축지정물 제21호)




위 치 : 강원 태백 철암동 365-1 외 6필지
지정일 : 2002.5.31
건축일 : 1935  

철구조물의 무연탄 선탄시설
국내 최초의 석탄산업시설로서 동 시설의 원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음.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상징인 강원도 태백 철암역두 선탄장.
1935년대부터 2005년대까지 70여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현장이다.

청량리에서 태백선을 타고 제천을 거쳐 아우라지 동강이 흐르는 영월을 지나면
‘카지노의 도시’로 변장한 사북과 고한을 만나고,마침내 한때 한국 최대의 탄광도시였다가
지금은 ‘고원의 관광도시’를 꿈꾸는 태백에 닿는다.

마치 미로와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길을 잃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는
폐광촌 태백시 삼방동 산자락에서 바라본 선탄장(원탄에서 이물질을 걸러내는 곳)
은 생기 잃은 항구를 연상케 한다.

국내 최초의 선탄장. 정확이 말하면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철암분소.
일제 강점기와 20세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태어나 세기가 바뀌도록
변함없이 선탄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의 석탄산업발전사를 반추하는 문화유산임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바람의 전설’과 ‘인정사정 볼것없다’가 액션 장면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선탄장은 철암역 뒤 우금산 일대 2만9000여 평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왼편 산자락 저탄장엔 정부 비축분 석탄 200만?U이 보관되어 있고
오른쪽 절반은 폐석장으로 뒤덮여 있다.

선탄시설은 저탄장과 폐석장 아래 가운데 부분 4000여 평에 우뚝 서있다.

철암선탄장은 살아있는 석탄박물관이다.

우리나라 근대 석탄산업의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일한 탄광이다.

만약 이 탄광이 문을 닫게 되면 탄광촌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철암살리기’라는 시민단체가 힘들게 벌이고 있는 ‘탄광촌문화 보존사업’도 이러한 우려에서 출발했다.

인터넷 ‘철암세상’을 통해 6년째 이 운동에 동참하고 주대관(49·건축가)씨는
철암선탄장에 대해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강재를 사용한 지붕틀(truss)을 사용하는 등
근대 재료와 공법으로 만든 대표적인 산업시설”이라며 “무연탄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던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초반의 구조물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곳에는 근·현대의 역사가 함께 숨쉬고 있다.

길게는 70년을 바라보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고,
그 옆에는 한국전쟁 직후에 건립된 낡은 시설,
1972년 5월에 건립된 정탄3호 컨베이어가 공존한다.

주씨는 “근대화의 상징인 철암선탄장은 외형적인 구조물만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물 안에 있는 각종 기계 등 시설물이 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채탄장 뿐만 아니라 아낙네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피킹장(손으로 돌을 골라내는 곳) 등을 보면
우리의 근·현대사의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가동 중인 선탄장은 막장에서 채굴된 원탄을 운반하고 이를 수요자에게 맞게 가공해
기차로 운반하기까지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곳. 주요 시설물은 화차에 분탄을 쏟아붓는
홉빠와 보일러실,하부 침전지 등 20여개가 집중돼있다.

2002∼ 2003년 태풍 루사와 매미의 상처 탓인지 요즘 선탄시설의 상태는 예전 같지 않다.

50여년 넘게 사용하는 바람에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에 균열이 생기고,
컨트롤타워 지붕이 심하게 부식되는 등 노화일로를 걷고있다.

이때문에 태백시는 안전진단을 실시한 끝에 계속 사용할 경우 작업능률이 떨어짐은 물론
구조물 붕괴등 안전사고가 우려될 뿐만아니라,문화재적 가치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난해부터 정탄3호 교각 등에 대한 보수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때 땅속에 무진장 묻혀있는 ‘검은 진주’나 다름없던 석탄은 캐내는 즉시 돈이 됐다.

한때 철암은 ‘길거리에 어슬렁거리는 개도 배춧잎(1만원권 지폐)을 물고 다녔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돈이 가장 많이 도는 지역이었다.

더불어 철암에서 생산된 석탄은 석유와 함께 국가 산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고
이것이 결국 한강의 기적의 낳았다.

근대화의 애환이 서린 철암선탄장은 성장기의 고단했던 삶을 흑백필름처럼 간직하고 있다.

연탄불은 사람들을 키웠고 그들은 근대화란 꽃을 피웠다.

철암역두 선탄장은 아직도 ‘검은 노다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오늘도 계속 돌아가고 있다.


철원 노동당사 (근대 문화유산 제22호)




위 치 :  강원 철원 철원읍 관전리 3-2외 4필지
지정일 : 2002.5.31
건축년도 : 1946
구 조 :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및 벽식구조로
        6.25사변때 파괴되어 일부 흔적만 남아 있음
        공산치하(1946)에서 지역주민의 강제노력동원 및
        모금에 의해 완공,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성 반영

노동당사 건물은 철원군이 북한 땅이었던 1946년 초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당시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리(里)당 쌀 200가마씩 거두는 한편
지역 주민들로부터의 강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했는데,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그때의 참상을 짐작케 하고 있다.

2001년 2월 통과된 ´문화재보호법 중 개정법률안´에 의하여
근대문화유산 등록이 됨으로써 정부 차원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KBS 열린음악회가 녹화되기도 하는 등 현재는 문화공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철원 감리교회(제23호)



강원 철원 철원읍 관전리 100-2외 1필지

지정연도 : 2002.5.31
건축연도 : 1936  
구     조 : 지상 3층 석조 건축물로

6.25사변때 파괴되어 일부 흔적만 남아 있음
일제 강점기 당시 기독교 반공청년의 활동장소로서 항일운동 및 반공투쟁의 역사성이 있음


철원 얼음창고 (근대 문화재 지정 제24호)



강원 철원 철원읍 외촌리 603-1

지정연도 : 2002.5.31
건축연도 : 1946  
구      조 : 지상 1층 콘크리트 박스 형태 건축물로 6.25사변 때 파괴되어
               벽체 잔해만 남아 있음

              고대의 석빙고에서 현대의 냉동고까지 얼음 보관시설 변화상을 알 수 있음 .
철원 농산물검사소 (근대 문화유산 지정 제25호)


소   재 : 강원 철원 철원읍 외촌리 620-1

지정일 : 2002.5.31

일제시대  지상 2층 시멘트 조적조 건축물로
6.25사변때 원형이 많이 훼손됨

창호의 형태 등 근대건축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음

일제시에는 철원의 각종 농산물의 품질을 검사했던 기관의 건물이었다.
해방 후 불순분자 색출 범법자 및 반공인사들의 체포등 만행을 자행했던 검찰청으로 사용되었다.

작지만 잘 정돈된 비례를 가지고 있으며, 오르내림 창호, 출입구의 모접기,
기둥상부와 천장의 모서리 처리수법 등에서 근대건축의 특징 및
당시의 건축수법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방 후 인공치하에서는 불순분자색출, 반공인사들의 체포등
만행을 자행하던 검찰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철원 승일교 (현대문화유산 26호)


명      칭 : 승일교 (제26호)
소      재 : 강원 철원 동송읍 장흥4리,갈말읍 문혜리 읍계
지  정 일 : 2002.5.31
건축년도 : 1948년∼ 1958년  
공      법 : 소련식 유럽공법의 철근콘크리트 라멘조 아치교
               공산치하에서 6.25사변때 남측 교량공사를 남긴채 중단,
               1958 우리측에 의해 남측부분 완공
               남북분단의 특수성을 잘보여주고, 교량의 조형미가 돋보임

인공 치하의 북한에서 1948년 8월 군사도로로 활용하기 위해 다리건설에 착수했다.
철원읍을 가로지르는 한탄강의 남부와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공사였다.
설계는 일제 때 진남포 제련소 굴뚝을 설계한 김명여 철원농업전문학교 교사가 맡아
소련식 유럽공법으로 시공됐다.

당시 철원 및 김화지역 주민들이 5일간 교대제의 노력공작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됐다고 이곳 주민들이 전하고 있다. 2개의 교각설치로 다리가 절반쯤 완성될 즈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의 퇴각으로 공사는 중단되고 남쪽 부분은 교각도 없이 덩그러니 남게 됐다.
이후 국군이 임시 목조 가교를 설치했다가 1958년 12월 한국 정부에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마무리했으니
다리 하나에 두가지 공법이 어우러진,분단과 전쟁이 빚어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문혜리를 잇는 승일교는
이름에 얽힌 두가지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남북한이 시차를 두고 완성한 합작 다리라는 의미를 간직한 이름이다.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 가운데자를 따서 ‘승일교’라 불렀다는 것.
목조가교였을 때에는 ‘承日橋’로 표기됐으나 현재 ‘승일교’라고 새겨져 있다.
하지만 원래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되었고 지도상에도 ‘한탄교’라고 적혀 있다.

그러다 1985년 10월1일 국군의 날을 기해 다리 근처에 제5군단장 명의로
‘昇日橋’라는 이름이 새겨진 화강암 기념비가 세워졌다.
영천전투와 평양전투에서 공을 세운 뒤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다 장렬하게 전사한
육사1기 출신의 김승일(金昇日) 대령을 기리는 비석이다.

승일교는 2년전부터 바로 옆의 아치형 철교에 임무를 넘겨주고
‘통행금지’라는 꼬리표와 함께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2002년 5월31일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 제26호 문화유적이다.
‘철근콘크리트+라멘조 아치교’라는 두 가지 공법이 합작된 승일교는
사시사철 수려한 경치를 연출하는 한탄강과 더불어 철원의 명물로 부상했다.
얼마전 다리 근처에 새로 놓은 전망대용 ‘승일정’과 안내 표지판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승일교의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화천 인민군사령부막사 (근대 문화유산 지정 제27호)



강원 화천 상서면 다목리

지정 년도 : 20022.5.31

건축년도 : 1945  

구     조 : 1층 장방형 석조 슬레이트의 단순한 형태의 건축물
              당시의 인민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희귀성이 인정되는 군사 시설물


진안성당 어은공소 (등록 문화재 제28호)



위 치 :  전북 진안 진안읍 죽산리 453
지정일 : 2002.5.31
건축년도 : 1910  

亞자형 1층 전통가옥 형태의 목조건물이나 건물의 진입 및 집회공간 기능은
평면에 이를 반영하여 전통형태와 달리 시공됨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사 연구에 중요한 건물

전북지역 복음화의 초석으로 100년 전통의 신자마을 어은동 공소, 1예전에는 1000여명이 넘는 신자수가 있었다.

■ 기해박해 피해 터전 잡은 곳
줄줄이 쏟아지는 성탄절에 얽힌 추억만큼이나 어은동 공소는 신앙의 역사가 뿌리깊은 교우촌이다.
현재 진안본당(주임 현유복 신부) 산하 20개 공소 중 하나인 어은동 공소는
전주교구의 초창기 모태 본당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한때 두 차례나 본당으로 승격돼
진안 무주 장수지역 복음화의 초석이 된 곳이다.

고기 어(魚) 숨을 은(隱) 자를 사용,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숨어사는 동리라는 뜻의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 이곳은 1839년 기해박해때 충청도지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터전을 잡은 곳이다. 지금도 겨울에는 오전 10시가 지나서야 겨우 해가 들고
낮 4시께면 해가 질만큼 첩첩 산중의 협곡에 자리잡은 이곳도 박해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은동 모시골에선 성 이명서(베드로) 순교자가 은신해 있다 체포되는 등
많은 신자들이 잡혀가 문초를 받았고,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거지가 되는 고초를 겪었다.

어은동에 본당이 설립되고 성당이 들어선 것은 지금으로부터 만 100년 전인 1900년 9월이다.
전주교구 초대교구장인 김양홍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해 8칸 목조 너새지붕 성당을 지었다.
신자들이 너새(얇은 돌지붕)를 얻기 위해 산너머 백운면 미재의 험한 산속에서
넓은 돌을 캐다가 지게로 옮겼다. 또 이곳에 영신학교를 지어 신학문을 보급하기도 했다.
당시 어은동 일대 신자 수는 1000여명이나 되었다.

아직 어은동에는 100년전 성당이 보존돼 있다.
10여년 전 너새지붕에 비가 새 성당 건물 한 켠이 내려앉자 너새를 드러내고
지금은 슬레이트(함석) 지붕으로 변했다.
어은동이 한국전쟁 이후 공소로 전락하면서 진안본당으로 옮긴 100년 된 제대가
지난해 누전으로 진안성당이 소실되었다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 - 등록문화제 29호



건축년도 - 1902.05.31

소 재 지 전남   목포시

소 유 자 조흥은행

관 리 자 목포시장

지상 2층으로 건축된 조적조건물로  붉은 타일로 마감.

목포에 현존하는 유일의 근대 금융계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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