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온달산성 전경.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국내에 수많은 성곽이 있지만
이만큼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전국이 고구려 이야기로 들썩인다. 고구려를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유례없는 ‘고구려 다시읽기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국민의 심기를 건드린 탓일 게다. 고구려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국가다.
강대국의 기세에 눌려 기세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우리 민족에게 고구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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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땅이나 만주벌판에만 존재할 것 같은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충북 단양이다. 남한강이 흐르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일대는 4세기 말에서 6세기 중반까지 170여년에 걸쳐 고구려와 신라와의 영토전쟁이 있었다.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삼국을 통일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온달산성(사적 264호)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자 평강공주의 남편인 온달장군이 축성했고,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온달장군이 숨진 곳은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아 역사적 진위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성곽인 것만은 분명하다.
산성이 자리잡은 성산은 해발 427m에 불과한 나지막한
산이다. 입구에서 성까지의 거리도 700m 남짓. 반면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파른 경사의 오르막길을 30분 가량 어렵게
오르면 산성과 맞닥뜨린다.
화강석으로 겹겹이 둘러싼 산성은 언뜻 봐도 단단함을 느껴진다. 내벽과 외벽을 같이 쌓아 올린
흔적이 보인다. 둘레 682m로 북방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축성기법이다.
적군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성곽 밖으로 돌출된 외성의 일종인 치성(雉城)을 쌓은 것도 고구려만의 축성기법. 훼손된 치성의 복원작업이 최근 마무리돼 완벽한 성의
모습을 갖췄다.
성을 따라 정상 부근에 오르면 반달형 석성의 윤곽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성 위에 서면 발 아래로
남한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장관이다. 뒷편으로 소백산 연봉이 펼쳐진다.
산기슭에 한가로운 전원마을이 보인다. 최가동,
최고로(最) 아름다운(佳) 마을(洞)이라는 뜻이다. 배수진을 치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을 병사들에게 산아래 마을에서 저녁
밥짓는 풍경이야말로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성내에는 한때 우물까지 발견될 정도로 규모가 큰 마을이
있었다. 이제 사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물봉선화, 달맞이꽃, 달개비 등 야생화들이 앞다퉈 핀다. 성 둘레를 감싸고 있는
등수국, 화려한 색깔의 나비들이 합쳐지면 제법 괜찮은 야생식물원이 만들어진다.
단양군 단성면 적성산성(사적 265호)은 지리한
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고구려 세력이 쇠락한 현장이다. 고구려군을 몰아낸 신라가 6세기 중반에 축조한 이 산성은 이후
고구려공격의 전초기지로 이용됐다.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고구려인을 회유하기 위한 신라 진흥왕의 적성비(국보 198호)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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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은 풍산 류씨들이 600년간 살아온 집성촌이다. 징비록(懲毖錄)의 저자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곳이다. 양진당, 북촌댁을 비롯한 130여채의 고택에는 지금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하회마을은 하회탈춤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탈춤의 주인은 류씨가 아니라 김해 허씨이다. 류씨보다 200년 앞서 이 곳에 터를 잡고 탈춤을 전승해왔다. 신의
노여움을 풀고 마을의 안녕을 빈다는 내용의 하회탈춤은 양반에 대한 질펀한 풍자가 압권. 하지만 탈춤이 지금까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세도를 자랑하던 풍산 류씨의 재정지원 덕분이었다.
조선시대 서원건축미학의 백미인 병산서원 만대루 누각에 들면
병풍처럼 펼쳐지는 병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진다. 시 한 수가 절로 나올만한 절경이다.
신들에게 욕을 많이 먹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다소 황당한 논리가 담겨있지만, 전도된 세상을 통해 춤꾼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준 그들의 여유가 부럽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낙동강줄기를 따라 4㎞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조선시대 세워진 수많은 서원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명성으로 따지자면 1,000원짜리 지폐의 뒷면을 장식한 도산서원이 단연 앞서지만 건물의 운치와 주변 경관은 병산서원을 따라갈 수
없다.
정문인 복례문을 지나면 만대루와 만난다. 가로로 길게 뻗은 23m길이의 누각이 압권이다. 누각에 오르면 낙동강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병산이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이 곳에서 만난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이 맛깔스럽다. 누각은 글읽기에
지겨워진 유생과 가야금을 켜는 기생들의 음풍농월의 현장이었다. 취기가 돌면 누군가가 종이 위에 일필휘지로 운을 띄웠고, 다음 유생이 글을
이었다. 강가에는 인근 부용대까지 실어나르는 나룻배가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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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삼척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누각. 지정번호 : 보물 제213호 소재지 : 강원 삼척시
성내동 시대 : 조선 전기 크기 : 정면 7칸, 측면 2칸 종류 : 누각
보물 제213호.
정면 7칸, 측면 2칸, 팔작지붕.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있으며, 옛날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하였는데, 그 후 1403년(조선 태종 3)에
삼척부사(府使) 김효손(金孝孫)이 구기(舊基)에 의거하여 중창(重創)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정면이 5칸이었던 것을 후일
좌우 양단에 1칸씩을 늘린 것 같고, 그 부분만은 공포(拱包)의 형식을 달리하고 있다. 내부의 천장을 보면 당초의 건물의 측면
외부에 나와 있던 도리의 뺄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 누각이 전에는 맞배지붕 건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포는 주두(柱頭)
뒤의 두공(頭工)으로써 대들보를 받도록 한 후 그 보머리가 그대로 길게 나와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직접 받고 있다.
제일
밑에 있는 첨차(遮)는 기둥머리에 꽂혀 있는데, 이는 주심포(柱心包)집 계통에서 볼 수있는 수법이다.
그러나 그 첨차의
형태는 오히려 다포(多包)집 계통의 것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조선 초기의 건축이지만 몇 번에 걸친 수리 때문에 원형이 손상된
부분이 많다.
장흥 보림사는 9산선문 중 첫째 개창 사찰이다. 대적광전 앞 국보 44호 쌍탑과 석등은 9세기 전형적인
양식으로 우리나라 삼층석탑 복원의 기준이 되고 있다.
한국미술사 내지 한국문화사에서 장흥 보림사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한다. 보림사는 9산선문 중 첫 번째 개창 사찰이고, 철조비로자나불, 보조선사의 부도 및 비석, 대적광전 앞의 쌍탑과 석등
모두가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 이 유물들은 하나같이 절대연대를 갖고 있는 명작이어서 9세기 불교미술의 한 기준이
된다.
보림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의 비문에 자세하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래
원표(元表)대사가 창건한 절로 체징이 당나라 유학 후 설악산 억성사의 염거화상 문하로 들어가 정진한 다음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이곳 가지산 보림사에 와 선종을 일으키니 여기는 오늘날에도 그 맥이 전해지는 가지산문의 본가이며, 도의선사, 염거화상,
보조체징으로 이어지는 한국 선종의 종가로 된 것이다. 그래서 9산선문 중에서도 제1가람이라는 명예를 얻은 것이다.
체징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헌강왕은 스님의 시호를 보조라 내리고 그 사리탑의 이름은 창성(彰聖)이라 지어주며 김영(金潁)에게 비문을 짓게했다. 그것이
지금 보물 157호와 158호로 지정된 보조선사의 부도와 비석이다. 비문의 글씨는 무슨 사연에서인지 첫 행부터 7행 중간
선(禪)자까지는 김원(金)이 해서체로 쓰고 그 뒤에는 김언경(金彦卿)이 행서체로 이어 썼다. 이런 비문은 세상에 다시없다는
것이다.
보림사의 최고 명품은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117호)이다. 앉은키가 2.74m나 되니 그
장대함을 능히 알만한데 무쇠를 녹여 이처럼 거대한 불상을 주조했다는 사실 자체로 당시 지방문화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
불상에는 왼쪽 팔꿈치 위쪽에 8행 60자에 이르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어 858년에 김수종(金遂宗)이 왕명을 받들어 1년에 걸쳐 만든
것임을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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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즉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대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대사성(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좨주(祭酒)·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儒生)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에의 입학 기회를 주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부터 200명으로 정착되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였으며, 소정의 선발 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蔭敍)에 의해 입학한 유생들을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성균관 유생은
기숙사격인 동재와 서재에서 생활하였으며, 출석 점수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취득해야만이 대과 초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유생의 생활은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자치적인 활동기구로 재회(齋會)가 있었다.
유생은 기숙사생활을 하는 동안 국가로부터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제공받았으며, 교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하였다. 유생은 또한 당대의
학문·정치현실에도 매우 민감하여 문묘종사(文廟從祀)나 정부의 불교숭상 움직임에 대해 집단 상소를 올렸으며,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권당(捲堂:수업거부) 또는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학문의 전당으로서 관리의 모집단으로 주요한 기능을 한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교육재정이 궁핍화하고 과거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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