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3호로 지정된 무위사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남동쪽에 있는 고찰로서 [사지(寺誌)]에 의하면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946년(고려 정종 1)에는 선각 형미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하였다가,
1550년(명종 5) 태감이 4창하고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렸으므로 [사지]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그 후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당우는 극락전과 명부전 및 요사(寮舍)뿐이었는데, 1974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千佛殿)·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중 국보 제13호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극락전은 조선 초기의 목조 불전으로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이 사찰의 4번째 중건인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이 극락전만은 1956년경의 수리공사 때 본존(本尊)
뒷벽의 벽화 명문(銘文)에서 “十二年 丙申 三月初 吉畵成”이란 기록을 통하여 적어도 1476년(성종 7)보다 앞서는 건물임이 밝혀졌다.
건물의 전면 3칸에는 모두 4분각(四分閣)의 빗살문을 달고, 좌우 측면에는 앞칸에 분각의 정(井)자
살문을 달았으며, 뒷면에는 중앙칸에 판자문(板子門) 출입구가 있고, 그 좌우 칸에는 판자창문이 있다. 건물 내부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이다. 불단 위쪽에는 담집모양의 보개(寶蓋)를 올리고, 단상에는 아미타(阿彌陀) 3존을
모셨다. 법당 안의 뒷벽과 좌우 벽에는 여러 불보살(佛菩薩) 및 천인상(天人像)을 그린 벽화가 있고, 이들의 원벽면(原壁面)에는
시대가 오래된 또 하나의 벽화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락전은 주심포식의 대표적인 불전으로 맞배지붕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알맞은 평면 구성에 현저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우고 간결하고 아름다운 조각의 공포를 얹어
가구를 짰는데 그 수법이 고려양식보다 세련미가 있다. 이 건물의 주요 특징은 공포의 외포(外包) 및 출목(出目)의 첨차(墅遮) 끝
절단면이 심하게 경사지지 않고 첨차 하단의 S자형 곡선이 부드럽고 힘찬 선으로 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삼존을 안치하고
후불벽 양측벽에는 성종 7년(1476)에 그린 벽화가 있어 더욱 내부공간을 장엄하게 하였다. 고려
말기 건축에 곡선재를 많이 쓴 데 비하면 이 건물은 직선재를 써서 측면관이 간결하면서도 짜임새가 균형을 잘 이루었고 조선 초기
양식을 어느 건물보다 유감 없이 발휘하고 있어 주목받는 건물이다. |
안악 고분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것이 1호이며, 이것을 계기로 2.3호가 발견되었다.
1호는 1949년
3월에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상산리 상지 부락 농민들이 도로수리용 잡석을 채집하다가 석곽을 쌓은 돌 한 장을 뽑아낸 것이 발견의 단서가
되었다.
1949년 4월 13일부터 15 일까지 3일간에 걸쳐 학술적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5월 7일부터 15일까지
재조사가 진행되었다.
분릉 외형의 크기는 주위가 약 50m이고 높이는 남쪽 3.5m,북쪽이 2.5m,동쪽은 분릉 꼭대기에서
약 1m 내려와서 깎여졌으며, 분릉 기저직경은 남북이 17m, 동서가 13m이다.
묘실의 구조는 석회암. 화강암 등으로 한
면이 평탄한 대소 편석을 진흙과 섞으면서 정연하게 쌓아 올리고, 그 위에 4~5cm 두께로 면회를 바른 단실분이다.
벽화의 내용은
고분 주인공의 호화로운 생전의 생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천장에는 인동 무늬, 불꽃 무뉘, 연꽃 무뉘, 구름 무뉘 등이 나타나며 이형 동물도
보인다.
북벽에는 전각도가 그려져 있으며,서벽에는 수렵도와 7 명의 여인 입상이 있다. 동벽에는 붉은 깃발을 든 의장행렬과 3대의
우교차가 보인다. 남벽에는 계속되는 행렬도의 일부와 기수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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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永川市) 청통면(淸通面) 신원리(新源里)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809년(헌덕왕 1) 혜철국사(惠哲國師)가 창건, 해안사(海眼寺)라 하였고, 1485년(성종 16)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묘봉암(妙峰庵)을 중창하였다. 1546년(명종 1) 천교(天敎)가 지금의 장소에 절을 세우고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 하였다.
그 뒤 1651년(효종 2) 백흥암(百興庵)·명부전(冥府殿) 등을
신축하고 기기암(奇奇庵)·서운암(瑞雲庵) 등을 중수하였으나, 1847년(헌종 13) 큰불이 나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해
팔봉(八峰) 등이 법당·향실(香室)·설현당(說玄堂) 등을 새로 지었고, 48년 보화루(寶華樓), 58년 영산전, 69년(고종 6) 명부전
등을 세웠다.
이절은 동화사(桐華寺)와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 홍진국사(弘眞國師)가 머문 뒤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이 되었다.
배흘림기둥과
주심포양식이 특징이며 중국식 건축양식이 수용된 거조암영산전(국보 14), 백흥암극락전수미단(보물 486), 깊게 팬 보조개가 있고
목에 삼도(三道)가 있는 운부암청동보살좌상(보물 514)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경내에 200년 된 노송 수림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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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지정번호 사적 제124호
지정연도 1963년 1월 18일 소재지 서울 중구 정동 5-1
시대 조선시대 면적 6만 1,500㎡ 분류 궁지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6만 1500㎡. 덕수궁이란 궁명(宮名)은 조선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讓位)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定宗)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태종(太宗)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昌慶宮)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도 역시 덕수궁이라 하였다.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世祖)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婷)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세자빈(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둘째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成宗)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하여 두었다가 점차 목책(木柵)을 넓혀 세우고 문을
달아 임시 궁성을 형성하여 여러 관청과 위사(衛士) 등을 모두 궁궐 내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1597년에는 담을 둘러
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후 1608년 2월
정침(正寢)에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 역시 이곳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초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또한 창덕궁(昌德宮)을 대대적으로 복구하여 그의 재위(在位) 2,3년에는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기 전의 건축보다 더 훌륭한
법궁(法宮)을 이룩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 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하게 된
것은 1615년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仁祖)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배알하고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7월에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 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후
영조(英祖)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60년이 3번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월 1일
세손(후의 正祖)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高宗)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또한 공역(工役)을 일으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1896년(건양 1)에는
공역의 준공이 있었고, 그해부터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때 태후(太后)·태자비(太子妃)는 경운궁에 이어(移御)하였으며
열성어진(列聖御眞)과 명성왕후의 빈전(嬪殿)도 경복궁에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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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12.20 국보 51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후기의
관아건축물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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