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고대건축

鶴山 徐 仁 2006. 7. 21. 12:54

  (http://sanho.new21.net/)  
 구례화엄사.jpg (73.8 KB)
 구례화엄사_2.jpg (99.2 KB)
 화엄사 (구례)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다하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고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가 또다시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 완성 하였다.

사찰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로 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金剛力士),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문은 금강문과는 서쪽방향으로 벗겨놓는데 독특한 특징.

두산의 정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오다 다시 솟았다 하여 두류산이라 불리는 지리산 화엄사.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서기 544)에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서 온 연기스님에 의해서 창건된 천년의 고찰이다.

이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셔와 4사자 3층석탑(불사리공양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후 의상대사가 화엄사에 주석하시면서 문무왕 10년(서기 670)에 3층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면을 화엄석경으로 둘렀는데 이로써 화엄사는 대도량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어 나말여초에 화엄사에 주석하셨던 도선국사가 화엄사를 총림으로 키워
개창이래 최대 규모를 가진 대총림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광종의 어명을 받은 홍경선사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중수 및 보수가 이루어졌고,
문종대(1047~1083)에도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으며 의상대사의 덕을 흠모한 대각국사가
화엄사에 주석했던 때도 바로 이 때였다.

그후 화엄사는 인종(1126~1146)때 정인왕사(定仁王師)에 의해 중수되었고
명종2년(1172)에는 도선국사비가 건립되었고 충렬왕(1313~1330)때 원소암(圓炤庵)이 중건되었다.
조선초인 세종 6년(1462)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8가람 81암자의 모든 당우와 보물들이 일시에 불타버렸고
인조 8년(1699)에 벽암선사와 그 문도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화엄사의 가람배치는 효종원년(1649)에 화엄사가 다시 선종대가람으로 승격된 직후
계파선사에 의한 장육전 중건(1699)부터이다. 장육전이 각황전으로 중건되자
숙종은 친히 각황전이라 사액하였다.

화엄사가 오늘의 대화엄사로 발전하기까지는 도광(導光)선사에 의해서이다.
도광선사는 대웅전 및 각 요사를 중수하는 등 퇴락한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1995년에는 서5층석탑(보물 제 133호)의 보수공사 도중에 부처님 진신사리 22과와
성보유물 16종 72점이 발굴되어 화엄사는 선교양종 대본산으로서의 사격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통도사 [通度寺]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下北面) 영축산(靈鷲山)에 있는 사찰.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경내의 건물들은 대웅전과 고려 말 건물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영산전(靈山殿)·극락보전(極樂寶殿) 외에 12개의 법당과 보광전(普光殿)·감로당(甘露堂) 외에
6방(房), 그리고 비각(碑閣)·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
65동 580여 칸에 달하는 대규모이다.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과
41년(인조 19)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대광명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세의 건물들이다.

이 사찰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어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는 대웅전이
보물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밖에 보물 제334호인 은입사동제향로(銀入絲銅製香爐),
보물 제471호인 봉발탑(奉鉢塔)이 있고, 보물전시관에는 병풍·경책(經冊)·불구(佛具) 및
고려대장경(해인사 영인본) 등의 사보(寺寶)가 소장되어 있다.
소속 암자로는 선원(禪院)인 극락암을 비롯하여 백운암·비로암 등 13개의 암자가 있다.  


팔달문 [八達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있는 수원성곽의 남문.

지정번호  보물 제402호
지정연도  1964년 9월 3일
소장  경기 수원시
소재지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
시대  조선시대
크기  정면 5칸, 측면 2칸
분류  성곽건축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1794년(정조 18) 세워졌으며 규모는 문루의 정면이 5칸,
측면이 2칸이고 양식은 중층 우진각지붕이다.
석축의 홍예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는데 주위 4면에는 여장(女墻)을 돌리고,
전면에는 반월형으로 옹성(甕城)을 축조하였으며 한국의 성문 건축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을 모두 갖추었다.

문루 내부에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한 줄로 배치하였는데
상하층 대량(大樑)은 전부 이 고주에 연결된다.
공포(栱包)는 상층이 내외 삼출목(三出目)이나 하층은 외이출목,
내삼출목이며 내부는 모두 초화문(草花文) 장식으로 되어 있다.


백련사 {강진}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번지 
            839년 신라 문성왕 때 무주 무염이 창건했다. 그 뒤 고려 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건
           물 80여칸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 120년 동안 고려의 여덟 국사를 배출했다. 이 절은 천태
           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을 개설하여 침체된 불교의 중흥을 꾀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고려 고종 19년에 백련 결사문을  발표하여 참회와 정토를 강조한 백련결사 운동은 송광사의
           정혜결사운동과 함께 고려 후기 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절을
           가리켜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며 동백 또한 곁들여서 창취가
           사계절을  통해  한결 같은 절경"이라고 할 만큼 주위의 경관 또한 아름답다. 특히 백련사는
           인근 다산초당과 산 고갯길을 두고 연결되어 있어 다산초당도 같이  방문하면 더욱 좋다.
           백련사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  되어
           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다산 초당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
           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
           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의 재취가 남아있는 다산4경이 있다.
           다산선생 직접 병풍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다산은 1818년 57세로 강진에서 유배가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산의 독백서를 보면 고향에 가서도  다산에서의 추억
           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Free Opin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을 잘 쓰려면 이렇게 하라  (0) 2006.07.22
현대건축  (0) 2006.07.21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0) 2006.07.21
현대건축  (0) 2006.07.19
고대건축  (0) 2006.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