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 304호 여수시 군자동 472 지정연월일 : 2001년 4월 17일 규모 :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0m), 면적 240평, 단층 팔작 지붕 시대 : 조선
후기(1599)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에 위치한 진남관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 충무공 이순신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진해루 터에 세운 75칸의 대규모
객사이다.
객사는 성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관아와 나란히 세워지는 중심 건물로, 중앙 정청 내부 북쪽 벽 앞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함을 두고,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날마다, 또 나라에 국상과 같은 큰 일이 있을 때 이 전패에 절하는
'향궐 망배'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지방 관리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 듯 선정을 베풀 것을 다짐하던 곳이다.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鎭南館' 이라고 한 이 건물은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1716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이제면 수사가 다시 지었고, 이후 크고 작은 수리를 거쳤으나, 1718년 중창이 오늘날 건물의 뼈대가 되었다.
조선 후기 전라좌수영 내에는 600여 칸으로 구성된 78동(棟)의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남관은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0m), 면적240평의 대형 건물로 합천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과 몇 안 되는 우리 나라 대표적 목조 건축물이다.
직사각형 땅에 2줄로 반듯하게 기단을 쌓고 가장자리는 직사각형
다듬돌로 돌렸으며, 막돌(자연석) 덤벙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형 기둥 68개를 세웠는데, 막돌 초석에 맞게 기둥뿌리의 밑둥을 다듬어
기둥을 단단하게 유지시키려는 고급 기술 그랭이 수법을 사용하였다.
진남관의 규모가 장대하여 지붕쪽에서 내려오는 힘이 너무
크므로 이를 효과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을 가로지는 창방(昌枋)으로 연결하였고, 기둥 위에만 공포를 배치한 주심포
양식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기둥 위 주심 도리를 중심에서 공포 바깥쪽으로 2개의 가락(외 2출목)을 낸 점, 내부에 다시 2줄로
큰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도록 한 점, 건물 앞뒤 양쪽 끝칸(퇴칸)에 퇴보를 둔 점은 모두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고자 한
것이다.
장대한 건물의 지붕 측면을 박공모양으로 처리 한 후 그 밑을 잇고 지붕 면을 처마까지 경사지게 이음으로써 '八'자와
비슷하게 만든 팔작 지붕은 이 건물의 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또한 대들보는 용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했으며 색이 바래기는
했지만 정성스럽게 단청한 흔적이 남아있다. 순종 5년(1911)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교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53년 진남관 보수 공사 도중 1718년
이제면 수사가 쓴 현판이 발견되었다.
1959년 5월 30일 보물 제 32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4월 17일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
담장과 정전의 지붕선-용마루-처마선의 수평선이 어우러진 건축물
종묘는 조선의 임금들이 직접 납시어
선대왕들에게 예를 올리던 제사 공간이었다.
정전 안엔 그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다. 제사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함께 만나는 행위이자 그 공간이다. 지속이 최고의 가치를 발하는 종묘의 지붕과 처마의 선이다.
담장도, 정전 툇간 앞의 두
줄로 도열한 기둥도 그러하다.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이다.
사적 제125호. 총면적 5만 6503평. 서울 종로구 훈정동 소재. 원래는 정전(正殿)을 가리키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중국의 우(虞)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종묘제도는 은(殷) ·주(周) 시대에는 7대조까지 묘(廟)에 봉안하는 7묘제가
시행되다가 명(明)나라 때에는 9묘제로 바뀌었다. 한국의 경우 종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92년(고구려 고국양왕 9)에 보이며,
신라에서는 5묘제, 고려에서는 7묘제로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7묘제도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 부터는 치적이 많은 왕은
7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으며, 그 밖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는데, 이를
조천(遷)이라고하였다.
종묘의 정전에는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주를 모셨으며,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및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모셨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上)으로 하고 제1실에 태조가 봉안되어 있고, 영녕전에는 추존조(追尊祖)인 4왕(목조 ·익조 ·탁조 ·환조)을
정중(正中)에 모시고 정전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상으로 하여 차례대로 모셨다. 이를 소목제도(昭穆制度)라고 한다.
종묘의 조영(造營)은 1394년(태조 3) 12월 태조가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때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동쪽에
영건(營建)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1차 완공하였다.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정전의 남문을
들어서면 문의 동쪽으로 공신당(功臣堂), 서쪽으로 칠사당(七祀堂)이 있고, 곧바로 정전에 이른다. 정전의
서문을 나서면 영녕전의 동문과 이어지고, 영녕전에도 정전과 같이 서문 ·남문 ·동문이 있으며, 영녕전의 북동쪽에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정전의 북동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그 주위에 제정(祭井) ·판위대(版位臺) ·수복방(守僕房)이 있으며,
정전 남동쪽에 재실(齋室)이 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리스트에
등재돼 있다.
팔만대장경, 석굴암도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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