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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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들여다 보기] 김영란

鶴山 徐 仁 2006. 7. 9. 09:04
2004년 10월
종래의 흐름대로라면 대법관은 사법시험 12회(1970년 합격) 전후에서 나왔어야 한다. 김영란(金英蘭·48) 대법관은 1978년에 합격한 사법시험 20회 출신이다. 무려 8년 선배들을 건너뛴 파격 인사였다. 그러나 대법원 속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김 판사는 시기가 문제였지 반드시 대법관이 될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최종영 대법원장은 여성 법관 중에서 대법관이 나올 때가 됐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을 제청한 대법원장이라는 기록을 남기려는 욕심이었을까. 그는 지난해 8월에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여성인 전효숙씨를 지명했다.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은 사항이지만, 최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에 이영애 전수안 김영란씨 3명을 올렸다. 모두 여성 법관이다. 제청자문위는 법조계와 시민단체, 개인의 추천을 더 받아 그중 김영란 전수안 박시환 이홍훈씨 4명을 골라냈다. 최 대법원장은 이중에서 김영란씨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단독 제청했다.
국회에서 인준안이 압도적 다수(찬성 208표)의 찬성으로 통과된 날 남편인 강지원(55)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김 대법관과 함께 있다고 했다. 김 대법관이 “대법원에 나가지 않는 토요일에 집에서 인터뷰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오전 9시에 하자”고 제의하자 “집안이 너무 어질러져 있어 신경 쓰이는데…” 하면서도 동의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토요일 아침 분당 신도시에 있는 김 대법관 집을 찾아갔다. 강 변호사는 없었다. 그는 매일 아침 KBS 1라디오에서 ‘안녕하십니까, 강지원입니다’라는 시사프로그램을 1년 넘게 진행하고 있다.
최종영 대법원장이 단독 제청
판사들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하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해간다. 재판연구관은 대부분 판사들이 경력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할 정도로 고달프다는 자리다. 김 대법관은 2년 임기의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5년이나 했다. 이때 쌓은 실력과 성실성은 대법관이 되는 데 밑받침이 됐다. 김 대법관이 재판연구관을 할 때 최종영 대법원장은 대법관과 법원행정처장을 번갈아 하고 있었다.
-최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할 때 김 대법관이 재판연구관 시절에 올린 검토보고서를 읽어볼 기회가 자주 있었겠군요.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뵈었더니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썼던 검토보고서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고.”
-그때 실력을 인정받은 거로군요.
“우리가 재판연구관으로 갈 때는 다 실력 있는 사람들로 뽑아간다고 했죠. 동기들이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해 갈 때도 나를 안 내보내고 2년간 더 연구관 일을 시켰죠. 내가 동기들보다 1년 먼저 갔고 2년은 동기들하고 같이 있었고 2년은 동기들 떠난 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5년이죠. 동기인 김수형씨(서울고법 부장판사)와 내가 최장기록을 세웠는데 그 기록이 아직 안 깨지고 있어요.”
재판연구관에는 대법관에 전속된 연구관이 있고 공동 연구관이 있는데 김 대법관은 공동 연구관이었다. 공동 연구관에게는 새로운 판례를 만드는 어려운 과제가 배당된다.
-강병섭 전 서울중앙지법원장은 법원을 떠나면서 사법부가 바깥바람에 흔들린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는데요.
“대법원장이 시기적으로 여성 헌재재판관이나 여성 대법관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 지 오래라고 해요. 나도 신문만 봐서 잘 모르겠지만 (강병섭 원장이) 무얼 항의하는 것인지…. 인사청문회에서 역차별이 아니냐고 질문하는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청과정에 시민단체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김 대법관은 대법관 제청후보가 발표된 후 사표를 낸 이영애 전 춘천지방법원장(사시 13회)에 관한 언급은 피했다. 김 대법관의 경기여고 서울법대 선배인 이영애씨는 전효숙 헌재 재판관 임명 때도 비켜갔으니 인사권자의 마음 밖에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대답하기 난감했던 질문은 어떤 거였습니까.
“국가보안법, 친일진상규명법처럼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안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판사가 분명한 의견을 공개하면 재판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판결의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여당 쪽에 가까운 답변을 하면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돼 야당 쪽에서는 내 판결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겠죠.”
 
남편을 ‘이 사람’으로 호칭
 
-임명장을 받은 직후 기자회견에서 “남편은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시부모 부양 등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는데요. 정확하게 무슨 의미입니까.
 
“결혼 초에는 이 사람도 ‘남자는 이래야 된다’ ‘여자는 이래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더라고요.”
 
김 대법관은 남편을 ‘이 사람’이라고 호칭했다. 여성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남편을 부르는 말은 ‘애 아빠’ ‘남편’ ‘우리 그이’ ‘신랑’ ‘자기’ 등으로 다양하다. ‘이 사람’이라는 호칭을 쓰는 아내는 드문 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들과 딸을 키우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선입견에서 자유롭기는 어렵죠. 그런데 자기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니까 고치더라고요. 많이 달라졌어요. 옛날 황 위원께서 보셨을 때 하고 지금은 달라지지 않았나요.
 
옛날에 여자는 남자의 세계관 속에 들어가 사는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지요. 강 변호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죠. 나는 남자가 그런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르고 결혼했죠. 남편은 아니다 싶으니까 스스로 변하더라고요.
 
며느리로서 시부모 모시기가 힘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대가족 제도와 노인 문제도 생각하게 됐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계로 생각을 확대해나갔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남편이 ‘우리는 부모 모시는 노하우가 있지 않느냐’며 자기 부모를 모셨으니까 처가 부모도 모시자고 하더군요. 친정어머니도 건강이 안 좋거든요. 그 얘기를 친정식구들한테 했더니 참 고마워하데요.”
 
-남자들은 편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가 직접 수발을 들지 않으니까.
 
“시아버님이 치매를 6년 가까이 앓으셨거든요. 씻고 닦아드리는 일을 여자들은 힘에 부쳐 못하잖아요. 시아버님이 옛날 분치고는 키가 크셨어요. 보성전문 농구선수를 하셨대요. 남편보다 크셨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많이 했죠.”
 
응접실 벽에 2001년에 찍은 강 변호사의 어머니 이효임 여사의 미수(米壽·88세) 잔치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여사는 올 3월에 91세로 세상을 떴다. 인생의 마지막 여로(旅路)에서 2년 반 가량 자리보전을 했다.
 
“넘어지셨다가 다친 뒤로 골다공증이 겹쳐 누워지내셨죠. 시누이 집이 옆이거든요. 다치기 전에는 시누이 집까지 걸어가셨는데…. 가끔 시누이 집 가다가 길을 잃었지만 이 동네에서는 어머님을 다 아니까 괜찮았어요. 분양받아 10년 넘게 살고 있거든요.”
 
-시아버님이 치매를 앓으실 때는 어땠나요.
 
“치매라는 병을 몰라 아버님이 처음에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데 내가 ‘대체 아버님 왜 그러세요’ 하며 화도 내고 그랬어요. 안 그러던 분이 이상한 행동을 하셔서. 그 병을 잘 알았더라면 초기부터 대응을 잘했을 텐데….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시부모를 모시다 보니 노인 문제를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노인도 아이와 똑같거든요. 보호해줘야 하고 외출할 때 모시고 나가야 되죠.”
 
“점수 따지면 남편은 나보다 나은 사람”
 
최근 미국 컬럼비아대 내과의사 겸 의학사(醫學史) 교수인 바론 러너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사망을 계기로 뉴욕타임스에 ‘긴 작별을 위한 계획’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낸시 레이건은 남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후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 러너 교수는 낸시가 한걸음 더 나아가 남편의 병이 진행된 과정과 가족들의 대응을 공개했어야 한다고 썼다. 그래야 같은 병을 앓는 환자와 가족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치매에 걸리거나 거동이 힘들어지면 서구에서는 대개 요양시설에 들어가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그런 시설에 들어가면 자식들 체면이 깎인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는데요.
 
“아직 우리 부모님 세대는 시설에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요. 모셔보니까 가족의 사랑이 필요해요. 치매환자일수록 어린애하고 똑같아지니까요. 어린애가 엄마 찾고 엄마 등에 매달리듯이. 가족만이 그 양반들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딜레마예요.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죠. 우리 애들에게 내가 그렇게 되면 요양시설에 보내고 가끔 찾아온다고 약속하라고 했죠. 그랬더니 애들은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하는 거 봤으니까 우리가 모신다’고 말하지요. 부모 마음은 자식한테 짐을 주고 싶지 않은 거죠. 내가 해봤더니 가족의 사랑이 필요해요. 아기 같아져요. 내가 ‘왜 식사를 들지 않으시냐’고 조금 화내면 싫어하세요. 옆에서 노래 불러주면 좋아하시고요.
 
어머니는 마지막 한 달 정도 거의 곡기를 끊으셨어요. 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여드리면 안 삼키고 다 뱉어내시는데 아들이 주면 잡수시더라고요. 그게 가족이 돌보는 것과 요양시설의 차이지요.”
 
-마지막 단계엔 며느리도 못 알아보지 않던가요.
 
“마지막에는 며느리와 손자도 못 알아보셨어요. 그런데 당신 속으로 낳은 아들과 좋아하는 따님은 마지막까지도 느낌이 다른가 봐요. 인간이란 참 미묘해서 심층에 뭐가 있는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 필요한데 나도 충분히 못 해드렸어요.”
 
-강 변호사가 외아들입니까.
 
“4남3녀 가운데 셋째아들입니다.”
 
-셋째가 부모를 모셨군요.
 
“큰아주버님이 외교관이라 외국에 주로 근무하셨어요. 둘째아주버님도 건설회사에 근무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막내아주버니도 외국에 있었죠. 우리밖에 없어서 결혼할 때부터 모시고 살았죠. 가끔 형제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도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나도 직접 하는 게 편해요. 성격이 자기 삶을 만드는 거예요.”
 
-효부상을 받아야겠어요.
 
“절대 안 받을 거예요.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모셨어요. 자진해서 한 일이 아니고 나한테 주어진 조건이니까 그냥 견뎌낸 거지, 절대 효부 아닙니다. 내 성격이 주어진 조건이면 그냥 그 안에서 어떻게 해결해봐야지, 박차고 나와서 뒤집어엎는 건 못 해요.”
 
-‘모범생 콤플렉스가 있어서 직장과 가정에서 다 잘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인정하지 않을 때는 전력을 다해서 싸웠다’는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읽었어요. 모범생 콤플렉스라기보다는 모범생 강박증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거 같네요.
 
“남한테 야단맞는 것이 싫어 매사에 잘하려고 하지요. 자기검열이 강한 거죠. 그게 참 괴롭더라고요. 나는 최선을 다해 잘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신뢰를 안 보내줄 때 싸웠죠. 남편은 자기 기준에서 보는 거죠. 남편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게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내 자리 지키면서 내가 할 일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남편은 자기가 해달라는 것을 내가 안 해주고 고집을 부리면 처음엔 못 받아들이더라고요. 나중에는 자기도 포기했죠. 강 변호사도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 자식도 부모 틀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결과적으로 내가 이긴 거죠. 내가 더 고집이 센 건가요? 절대 내가 그의 틀에 안 들어갔거든요.”
 
-남성우월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강 변호사가 여성과 사회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게 된 것이 김 대법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내가 독자적인 인생관, 세계관, 라이프 스타일을 고집하니까 싫었겠죠. 그런데 이 사람 자체가 다른 사람의 것을 잘 받아들여요. 폭이 넓어요. 점수를 매기자면 나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평생 웃겨주겠다”
 
강 변호사가 서울지검 형사3부 검사를 할 때 김 대법관은 옆방 검사실에 시보로 근무하고 있었다.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인 강 변호사는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 공무원으로 부산에서 근무하다 다시 사법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밀수 사건이 터졌을 때 부장검사가 부산세관에 와서 수사를 지휘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단다. 18회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강 변호사의 합격기가 ‘고시계’에 실렸다. 이 글을 김 대법관이 고시공부할 때 읽었다. 7년 연상의 검사가 순진한 시보를 불러내 점심도 사주고 저녁도 사주며 ‘꼬셨다’(강 변호사의 표현).
 
-강 변호사에게 ‘김 대법관을 만나면 어떤 질문을 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꼬실 때 인상이 어땠냐고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그게 궁금했나 보네. 사람을 잘 웃겼어요. 굉장히 유머러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가 평생 나를 웃겨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결혼한 뒤 웃기는 일은 없고 하도 힘든 일만 생기길래 ‘평생 웃겨준다고 해놓고 약속을 어겼다’고 따졌어요. 웃기기는커녕 눈물만 떨구게 할 수 있냐고 한바탕 싸운 적이 있어요.”
 
‘왜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여자는 울까’의 공동 저자 앨런 피스와 바버라 피스는 ‘눈물은 아내들이 남편으로부터 뭔가 얻어내고 싶을 때 흔히 쓰는 정서적인 공갈협박(Emotional blackmail)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성들은 남편의 깊은 비밀, 취약점을 적절히 활용해 결국 공갈에 굴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눈물 떨굴 일이 자주 있었습니까.
 
“부모님 모시고 애 둘을 키우는 데 판사 일까지 많잖아요. 보따리 싸들고 와서 기록 봐야죠. 판사 일을 남편이 도와줄 수 있나요. 만날 기록을 싸들고 오는데 애들은 늦게 자요. 밤 12시에 재워놓고 그때부터 일 시작하죠. 집안에 뒤치다꺼리 할 것도 많고….”
 
-직장여성이 시부모 모시기가 보통 일은 아니죠.
 
“시부모 손님도 많이 오시고…. 제사 지내야죠. 도와줄 동서들은 다 외국 나가 있죠. 추석 때 일 도와주는 아주머니도 집에 가고 혼자서 송편이란 걸 처음 빚었어요. 송편을 쪄놓고 나니 새벽 1시가 넘더라고요. 상할까봐 송편을 시원한 데 내놓고는 밤새 잊어 그 다음날 아침에 차례 지내는데 상에 안 올렸어요. 얼마나 분한지 모르겠더라고요. 누구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일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친정에서는 녹두를 쪄서 속을 만들거든요. 나도 친정에서 배운 대로 하느라고 녹두를 쪘는데 돌을 일지 않아서 돌이 씹히는 거예요. 그래서 못 먹은 적도 있었죠. 실수가 많았어요.”
 
강지원 김영란 부부는 영호남 커플이다. 강 변호사는 아버지가 전남 완도군수로 있을 때 완도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다 상경했다. 김 대법관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6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공무원인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 오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왔다.
 
-영호남 커플로 살면서 일화는 없습니까.
 
“결혼할 때 양쪽 집안에서 약간 말씀이 있었습니다. 풍습이 다르니까 걱정했지요. 여자 입장에서 호남 쪽 사람이 더 좋은 것도 있더라고요. 시가 식구들이 모이면 시끌벅적해요. 재미있어요. 친정식구들은 무덤덤하게 앉아 있어요. 별로 문제는 없어요. 같은 남쪽이니까 음식 간도 비슷하죠.”
 
-인사청문회에서 형사부 경력이 2년밖에 안 된다고 트집을 잡았죠.
 
“사실은 더 짧아요. 형사재판은 수원지법 항소부에서 6개월밖에 못 했어요. 그러나 내가 연수원 교수로 있을 때는 형사법 강의를 했어요. 영장담당도 하고 즉결심판도 했습니다. 연구관 시절에 형사법 보고서도 썼습니다.”
 
5공 때 형사부 재판을 했던 법관들은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로부터 권력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들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데모를 한 학생들에게 국가안전기획부와 검찰이 정해준 대로 ‘정찰제’ 판결이 내려질 때였다. 김 대법관은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까.
 
“다행히 6·29선언 후에 형사재판을 했어요.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판사로 있던 사람들이 다같이 고뇌해야 할 일이죠. 나는 안 맡았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판사는 어려운 법리 풀었을 때 보람”
 
-사형 판결을 내려본 적 있습니까.
 
“형사 항소부에서는 단독사건만 다뤘습니다. 죄목이 사기 횡령 절도라서 사형 때릴 일이 없었죠. 인사청문회에서 사형을 궁극적으론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지 몰랐어요.”
 
-사형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사형은 사회를 방위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우리 형사법은 응보형(應報刑) 주의가 아닙니다. 예컨대 사형 대신에 감형이 안 되는 종신형 제도를 도입할 수도 있겠죠. 완전히 격리해서 사회방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요. 왜 총살할 때 누구 총에 맞아 죽는지 알 수 없게 여러 명이 쏘냔 말이죠. 판사들도 사형선고를 꺼리잖아요. 꺼림칙한 걸 파고들어가 사회방위 목적에 충실한지 따져보면 문제가 쉽게 풀리리라고 생각해요.”
 
-20여명을 연쇄살인한 유영철 같은 범죄자를 사형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벌해야 하죠?
 
“철저히 격리하는 거죠.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지, 후천적으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100% 그 사람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어요.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있고요. 그 사람한테 100% 책임지워서 사형시켜버린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죠.
 
사형제도의 목적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재판할 때 어떤 재판부는 사형을 용인하는데 나는 개인 신념에 따라 사형 판결을 안 한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생기는 거죠.”
 
-검사 시보할 때 사형집행을 참관하지 않았나요.
 
“지금은 사형을 집행하지 않지만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간간이 했죠. 시보할 때 참관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안 갔어요. 그것도 목숨을 뺏는 건데 굳이 참관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부검(剖檢)은 지켜봤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사형집행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양론(兩論)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내 의견일 뿐입니다.”
 
-25년 법관생활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판결은 어떤 겁니까.
 
“판사들은 어려운 법리를 풀어냈을 때 제일 보람을 느끼죠. 법조 출입기자들이 재미있는 판결이라고 집어내는 거하고는 전혀 달라요.”
 
-기자들은 아무래도 일반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재를 찾죠.
 
“법관이 무심코 한 판결을 흥미있어 하더라고요. 내가 대법관으로 제청되기 직전에 선고한 판결이 있습니다. 민법 손해배상편에 보면 손해배상을 해야 될 사람이 고의나 중과실이 아닐 경우 손해배상을 함으로써 생계유지가 어려울 때 감액(減額)해주는 조항이 있어요. 법관 직권으로는 못 하는데 피고가 감액 항변을 할 수 있죠. 실제 재판에 적용된 케이스가 없더라고요. 피고가 여러 가지 생계가 어렵다는 주장을 하길래 그런저런 사유를 들어 반 정도 감액해줬죠. 대법원에 올라가 모델 케이스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상고를 안 하더라고요.”
 
-인사청문회에서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더군요. 호주제가 우리 고유의 전통이 아니고 일제시대에 생긴 것이라죠.
 
“여러 경로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지금의 호주제는 일제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MBC에서 강의할 때 최한기 선생의 호적부를 들고 나와서 설명한 적이 있어요. 최한기 선생의 호적은 지금의 호적과는 다르더군요. 그 집에 사는 노비까지 다 기재돼 있어요. 우리나라 고유의 호적은 세금을 매기기 위한 목적이었다더군요. 지금처럼 가정을 대표하는 추상적인 호주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호주제는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상징성만 있고 생활에서 실제적 의미는 없는 거죠.”
 
“성(姓) 선택의 자유는 좀 빠르다”
 
-서양여성이나 일본여성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잖아요. 자녀들도 아버지 성을 갖고요. 우리 여성은 결혼 전이나 후나 성이 그대로지만. 여권운동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 어머니 성을 함께 따서 ‘김박’ ‘강송’ 식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농담이지만 그런 식으로 3대만 내려가면 성이 8자가 되게 생겼어요.
 
“서구나 일본에서는 성(姓) 선택의 자유가 있어요. 모계 성도 따를 수 있지만 대체로 부계 성을 따르죠. 우리가 성 선택의 자유를 주더라도 관습상 거의 부계 성을 따를 테니까 큰 혼란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대다수 국민이 거기까지 설득이 안 돼 어려운 점이 있겠죠.”
 
-김 대법관은 우리나라도 가족의 합의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갈 거 같아요. 전세계가 다 그렇게 하거든요. 호주제 폐지 흐름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외국처럼 개인 호적부를 두되 성 선택의 자유는 나중에 논의하자는 흐름이 있습니다. 둘 다 한꺼번에 하자는 견해도 있고요. 나도 성 선택의 자유까지 가는 건 좀 빠르다고 생각해요. 국민의 법감정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생물학적으로는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여성 DNA가 후손으로 죽 연결되거든요. 이번에 수로왕국의 허씨들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DNA를 추적하니까 해양민족이라고 나왔잖아요.”
 
미토콘드리아 DNA는 세포질에만 존재해 세포 핵 DNA와 달리 난자를 통해서만 유전된다.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자녀를 진짜 유대인으로 인정한다. 수천년 동안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아 ‘어머니는 가짜가 있을 수 없지만 아버지는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성 선택의 자유까지 갈 거 같아요. 우리는 유교적 전통이 많이 남아 있는 나라에 살기 때문에 국민의 법 감정을 설득하면서 가야지요.”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게 되면 남아선호 사상도 깰 수 있지 않을까요. 딸이 낳은 자녀도 친정부모의 성을 물려받을 수 있다면 아들에 집착하는 사회 분위기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나도 딸만 둘입니다. 요즈음 딸 하나 둘로 그만두고 더 안 낳는 사람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성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면 손자 손녀가 내 성을 물려받을 수 있겠네’하고 좋아하더라고요.”
 
청문회에서 나왔던 질문은 신문에 보도됐기 때문에 중복을 피했다. 다만 국가보안법은 중요한 문제이고 인사청문회 이후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 터다. 국가인권위원회, 헌법재판소, 대법원, 대통령의 견해가 각기 다르다.
 
“형법을 개정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대체입법하자는 의견도 있어요.
 
나는 국가보안을 위해 처벌해야 하는 유형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보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국가보안을 위해 처벌해야 할 유형을 정하고 나면 형법에 집어넣든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든지, 다른 특별법을 만들든지, 입법 기술상의 문제거든요. 이것이 순수한 법률가로서 나의 입장이죠.
 
형법으로 처벌하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든 판사에게는 의미가 같아요. 국가보안법 자체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간 대립과 이해 문제라고 생각해요. 헌재에서도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 이를 개정할 거냐, 대체할 거냐, 폐지할 거냐를 판단한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사회가 바뀌면 개정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매사에 너무 대립하지 말고 설득의 정치를 모색할 만큼 성숙한 사회가 됐다고 생각해요.”
 
대법원 구성엔 다양한 인사 필요
 
대통령(임기 5년)과 대법원장(6년)의 임기가 일치하지 않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과 함께 임기 초반을 보내는 구조다. 최종영 대법원장의 임기는 내년 9월까지다. 내년에는 대법관 제청권을 가진 대법원장을 비롯해 변재승 유지담 윤재식 이용우 배기원 대법관이 퇴임한다. 사법부의 구성이 지금과는 크게 달라진다.
 
-대법관이 되고 싶은 법관들이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을 의식해 진보적인 판결을 한다는 우려가 보수 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대법관 제청자문위에 시민단체 대표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는데요.
 
“대법원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지금은 사건 처리에 바쁘지만 정책법원에 대한 기대가 큰 것 같아요. 정책법원 역할을 하려면 지금처럼 호모지니어스(Homogeneous·동질의)한 구성원으로는 어렵다는 시각이 있어요. 여성인 나를 임명한 것도 정책법원으로 가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책법원으로 가자면 이른바 진보적 인사로만 구성하거나 지금처럼 커리어 시스템(Career system)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해서는 안 되죠. 다양한 사회현상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시민단체의 요구가 아니라 시대적 요구입니다. 법은 원래 보수적이어야 하잖아요. 지금보다 많이 변화하겠지만 법의 본질을 떠나 시민단체 입김에 좌우되는 구성은 안 하겠죠. 그 정도로 대법원이 양식이 없지는 않아요.”
 
-이흥복 신임 서울중앙지법원장이 취임사에서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훼손하는 세력과 횡포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겠다’고 했는데요. 양 측면이 있을 거 같아요. 사법부가 국민여론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도 없고, 시류와 여론에 영합하는 것도 곤란하고….
 
“그렇죠. 그 분은 나름대로 염려를 표현한 거죠. 아까 말했듯이 내년 내후년 대법원 구성이 달라지니까 나름대로 사법부를 아끼는 충정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사 표시를 한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배심제는 중요 사건에만 한정해야
 
-미국영화에는 배심원 재판을 소재로 한 흥미진진한 영화가 많잖아요. 시카고에서 악명 높던 갱 알 카포네 재판 때는 배심원들이 조직원들로부터 협박을 받은 기미가 보이니까 판사가 옆 법정의 배심원들과 즉각 바꿔버리더군요. 알 카포네 전기에도 나와요. 사법개혁위원회가 배심재판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미국에서도 배심재판은 전체 사건의 10%밖에 안 돼요. 그러나 국민을 사법에 참여시키는 상징적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비용이 많이 들고 번거롭고 생업에 지장을 주니까 미국도 정말 중요한 재판이 아니면 배심재판을 안 하는가 봐요. 변호사들과 함께 배심원을 선정하는 사람, 배심원의 심리를 읽는 사람까지 있어요. 배심원 선정을 전문으로 하는 여성 컨설턴트가 쓴 책이 최근 번역돼 나왔더군요.”
 
배심원 선정 컨설턴트 조-엘란 디미트리우스의 ‘사람 읽기(Reading people)’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저자는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의 발단이 됐던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의 경찰관들, 아내를 죽인 혐의를 받은 미식 축구선수 O J 심슨의 배심원 선정에 참여해 피고인의 무죄평결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사람의 특징, 옷차림,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을 파악하는 기법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필자도 인터뷰 기법 개발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숙독했다.
 
“배심원 재판에는 정말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느냐, 나한테 유리하게 해줄 사람을 선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죠. 모든 재판을 다 배심제로 하는 것은 낭비고요.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한정하는 게 좋아요. 국민에게 법치주의 교육을 시키는 의미도 있죠. 판사들도 절차를 더 신중하게 진행할 테고…. 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는 좋을 것 같아요. 사법개혁위원회에서도 긍정적으로 도입을 검토하는 거 같아요. 위헌 문제가 남아 있긴 해요. 헌법에 법관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돼 있거든요.”
 
-배심제가 유전무죄(有錢無罪)의 경향을 강화할 가능성도 있죠.
 
“미국에서도 배심재판을 반대하는 전문가들이 있죠. 다수 의견은 그래도 있는 게 낫다는 거예요. 상징적인 면이 있는 거 같아요. 있는 것하고, 없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어요.”
 
-주민 의사에 의한 판결은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사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제도라고 할 수 있겠죠.
 
“영국에도 있던 제도이지만 미국에서 발달한 이유는 서부 개척사와 관계가 있대요. 재판할 사람이 없으니까 동네 주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해 재판하는 거죠. 미국이 연방의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발달한 거죠. 억울한 왕따 희생자도 많았답니다. 미국 동부의 마녀재판은 유명하잖아요.”
 
두 딸 모두 대안학교 진학
 
김 대법관은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조배숙 의원(열린우리당)과 경기여고 서울법대 동기동창이다. 서울법대에 여학생이 적을 때라 경기여고 3총사는 늘 붙어다녔다. 사법시험은 김 대법관이 법대 4학년 때인 1978년 가장 먼저 합격했고 조 의원은 1981년, 강 전 장관은 1982년에 합격했다.
 
-강 전 장관이 솔직한 언행과 화사한 패션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갑자기 낙마했어요. 최근에 만나봤습니까.
 
“네, 대법관 된 것을 축하해준다고 해서 만났죠.”
 
-장관 물러난 것에 대해 본인은 뭐라던가요. 시중에 루머가 많아서….
 
“본인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던데요. 호남 출신 국방부 장관을 교체하면서 호남쪽을 배려하려다 보니 그만한 비중을 가진 법무부 장관을 호남에 주려고 바꾼 걸로 이해하고 있던데요. 본인은 큰 현안 없이 사퇴하게 돼 너무 즐겁다고 했어요.”
 
-검찰을 장악하지 못하고, 검찰개혁과 관련해 대통령의 의중보다는 검찰편에 섰던 것이 경질 이유가 됐다는 시각도 있어요.
 
“검찰 장악은 시대착오적인 말이죠. 강금실을 장관 시킨 것은 검찰을 장악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제대로 된 검찰을 만들려고 보낸 거지. 검찰내에서도 중간층 이하에서는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검찰이 달라질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아요.”
 
-한국의 보수적인 가치관에서 나온 말이라 여권론자들이 들으면 화내겠지만 아무튼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팔자가 세다’는 말을 옛날 어른들이 했잖아요. 이 시대에는 안 맞는 얘기죠. 어찌됐건 두 동기생은 순탄한 가정생활을 못 했는데 김 대법관은 시부모까지 모시고 무난하게 산 것 같아요.
 
“나도 순탄치만은 않았던 거죠. 농담이지만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 잘 쓰고 운동해 몸짱도 되고, 애들 교육도 잘 시키는 걸 최고로 치는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내가 출세했는지는 모르지만 애들 교육이며 여러 가지가 경쟁력이 없어서 친구들이 별로 부러워하지 않아요.”
 
김 대법관은 두 딸을 모두 대안학교(인성 특성화 학교)에 보냈다. 큰딸 민형(21)은 전남 담양 한빛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중이다. 막내딸 선형(17)은 분당의 도시형 대안학교인 이우학교에 다닌다. 아버지 강 변호사가 공동설립자다. 선형은 여름방학 동안에도 입시공부는 안 하고 영화를 찍으러 다니고 어머니 개량한복을 만드느라 바빴다.
 
강 변호사에게 이 인터뷰 며칠 전에 “왜 아이들을 모두 대안학교에 보냈느냐”고 묻자 “김 판사한테 물어봐요”라고 했다가 간단히 설명했다.
 
“우리 부부가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자유로운 학교에 보내서 개성을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분위기로 보건대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낸 데는 김 대법관의 발언권이 더 셌던 것 같다.
 
“인사청문회 위원들이 돈 많이 드는 귀족학교에 자녀를 보냈다고 생각하던데 전혀 그게 아니고요. 그야말로 대학입시를 포기하고 애를 실험적인 교육으로 내몬 거죠. 나쁘게 말하면 못할 짓을 한 엄마예요. 사회 분위기가 획일적인 교육을 강요하잖아요. 대학만 좋은 데 가면 되니까 중고교 시절은 담보로 잡히죠. 애들한테 청소년 시절을 돌려주고 싶더라고요. 고민하면서 정말 자기 길을 찾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이런 걸 다 겪어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엄마가 쇼트 커트(short cut·지름길)로 가는 요령을 가르쳐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스스로 고생도 하고, 엄마가 나를 왜 이런 학교에 보냈나 하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그게 성장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애들이 옷도 만들고 농사도 짓고 사는 거죠. 물론 공부도 하지만.
 
애들 학교 축제에 가보면 입시 때문에 압박받지 않고 몇 달 전부터 고민해 아이디어를 내 연극도 하고, 시도 쓰고, 배경음악 녹음하고, 별짓 다해서 참 재미있게 해요.”
 
-대학입시는 완전히 포기한 겁니까.
 
“스스로 가고 싶으면 가겠죠. 갈 능력 있으면 가는 거죠. 다양한 사회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는 애들도 필요하잖아요. 실패할 확률이 높죠. 쇼트 커트는 아니지만 거기서 인생을 배우는 거죠. 이상하게 애 아빠하고 나하고 그 점에서는 전폭적으로 의견이 같아요.”
 
“남편은 창의적인 사람”
 
-두 분이 이른바 ‘KS’ 출신이고 사법고시에 합격,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순탄하게 달려오다 보니 보통 사람들이 선망하는 사회적 출세를 좀 시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게 아니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방향을 좀 달리 잡은 거죠. 출세나 명예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죠. 애들이 뭘 하고 살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학습이 안 되면 경험이 안 되는 거예요. 시험에 합격하고 출세해야 행복한 건가요. 밖에다 기준을 두니까 욕망이 한이 없어요. 그러면 행복을 느낄 수 없어요.
 
나도 그렇게 살았거든요. 항상 부족해요. 그 다음 목표가 또 생기죠. 그래서 우리 애들은 성취추구적인 삶에서 벗어나 정말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강 변호사도 검사장을 거쳐 검찰 고위층으로 출세하는 코스를 스스로 마다하고 검찰에서 흔히 ‘물 먹는 자리’라고 하는 서울고등검찰청 근무를 자원해 청소년 업무를 했다. 그러다 2002년 검찰을 떠나 후배들과 법률사무소 ‘청지’를 설립해 대표로 있다.
 
-강 변호사는 행정 사법고시 양과에 합격했고 검사를 지망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젊은 시절에는 출세지향적인 성향이 남보다 강했다고 보이는데….
 
“건방진 얘기지만 능력이 없어서 물 먹은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잖아요. 나는 그게 재미있고 좋더라고요. 아주 창의적인 사람이거든요.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죠. 창의적인 사람은 창의적인 걸 하게 해야 능력발휘를 하거든요. 정해진 답이 있는 길을 가면 오히려 능력발휘를 못할 거 같더라고요. 정말로 능력발휘를 하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더 크잖아요. 남들 다 하는 검찰 엘리트 코스로 가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기대되더라고요.
 
우리 애들도 정해진 코스로 안 보내니까 애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재미있어요. 우스운 얘기지만 서울대 법대 1학년생 200여명을 모아놓고 ‘법률문장론’을 강의하면서 ‘너희들은 부모의 상상력 결핍으로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애가 뭘 할지 짐작할 수 없는 상태가 주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게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클 거라 생각해요.”
 
-강 변호사가 검찰에서 출세하는 코스를 버리고 ‘샛길’로 빠지려는, 인생관의 전환이 언제 온 겁니까.
 
“자기도 과거에는 출세지향적이었다고 말해요. 보호관찰소장하고 청소년보호위원장 하면서 변한 거 같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못 느꼈거든요. 청소년들을 만나보면서 자기가 옛날에 출세하기 위해 포기했던 일들을 생각하게 된 거죠. 청소년 시절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려고 하는 거 같아요.”
 
대학시절 꿈은 문학도
 
-강 변호사가 신문에 쓴 글은 몇 번 봤습니다. 직업적인 글쟁이보다 오히려 잘 써요.
 
“이 사람의 청소년 시절 꿈이 신문사 논설위원이었대요. 황 위원처럼.”
 
신문사 논설위원 안 한 건 잘한 일이다. 하여튼 강 변호사는 단조로운 수사, 기소 업무를 하기엔 너무 재주가 많은 것 같다. 강 변호사는 최근 청소년 음악회에서 무대에 올라 이탈리아 가곡 ‘불꺼진 창’을 불렀다.
 
“강 변호사가 고등학교 때 서울대 사대 백일장에서 장원한 글도 있어요. 글이 씩씩하더라고요. 나는 문학적인 글을 썼는데 이 사람은 지사적인 글을 썼더라고요.”
 
-인터뷰 기사에서 읽었는데 고교와 대학시절의 꿈이 법관이 아니라 문학도였다면서요. 가족의 권유로 법대를 택했지만 문학을 계속하겠다고 우기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고 했더군요.
 
“나도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거든요. 글 쓰는 뭔가를 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거죠.”
 
-판결문도 글쓰기 아닌가요.
 
“판사도 글 쓰는 직업이죠. 나도 그렇게 말합니다. 다만 글 내용이 다르죠. 판사도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 하기가 수월해요.
 
경기여고 때 성적이 좋았어요. 경기여고 선배들 중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들어간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어요. 교장선생님이 올해는 꼭 사회계열 합격자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셨죠. 나는 인문계열로 가고 싶었는데 교장선생님과 아버지께서 성적이 아까우니까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어요. 부모님 말씀을 거역 못해 일단 사회계열로 갔어요. 나중에 사회과학대와 법대 중에서 선택할 때도 갈등이 있었어요. 나는 사회학을 하고 싶었죠.
 
또 그냥 떠밀려서 법대에 갔거든요. 한동안 법률에 취미가 안 붙었어요. 너무 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나 반성하고 2학년 겨울방학 때 민법 형법 헌법 삼과를 일독하고 사법시험을 한번 보자 한 것이 그만 합격이 된 거예요. 내가 철없이 이런 말을 하고 다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늦게 붙은 사람들을 약 오르게 했어요. 1차 붙은 게 아까워 3학년 겨울방학 때 2차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넉 달 공부하고 4월에 합격했죠. 떨어지면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볼 결심이었는데 합격했어요. 아슬아슬하게 붙었어요.”
 
-천재네요.
 
“단기 집중력이 있는 것 같아요. 천재는 아니고.”
 
“떠밀려서 법대에 갔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느낀 건데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선택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김 대법관은 싫어하는 걸 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 같아요.
 
“재미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건 사실이지만 내가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소질은 있는 것 같아요. 철학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수학을 잘했어요. 어려운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어냈을 때 성취감이 큽니다. 내가 자꾸 ‘재미없다’면서도 잘 적응한 것은 나한테 법률적인 사고를 하는 소양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적성검사를 해보면 수학자 철학자 과학자로 나왔어요.”
 
-문학을 했으면 실패했을지도 모르죠.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래요. 취미로는 좋은 책 많이 읽곤 하지만. 남편이 만날 놀리는 게 인풋(input)은 많은데 아웃풋(output)은 안 된다고 해요. 남편이 골치 아픈 철학책 뭐하러 읽냐고 놀리는데 아웃풋하려면 안 읽어요. 그러자면 머리가 아프죠. 책 자체의 논리적인 흐름에 푹 빠져요. 소설도 그 책의 구성에 빠지고, 철학책도 논리를 전개해가는 과정을 즐기죠. 그러한 소질이 있기 때문에 단조로운 법관 생활을 견딘 것 같습니다.”
 
-판결문 쓰기는 재미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재미는 없어요. 그렇지만 난마같이 얽혀 있는 사건을 해결하는 쾌감이 있어요. 내가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하면서 배석판사들이 가져온 결론을 검토하다 보면 이론은 맞는데 뭔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그러며 기록을 가져오라고 해서 내가 다시 보거든요. 뭔가 합리적인 결론을 찾아낼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해줘요. 그럴 때마다 너무 기뻐요. 나한테 그런 소질이 있나 봐요. 연구관도 아마 그래서 오래 한 거 같습니다.”
 
-문학도였으니까 습작이 있겠군요.
 
“단편소설 두 편이 교지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보면 형편없겠죠. 보관하고 있지 않아요.”
 
김 대법관이 대학 1학년 때 쓴 단편소설이 ‘서울대’라는 교지(校誌)에 실렸다. 사법시험 합격한 뒤에는 서울법대에서 발행하는 ‘피데스(Fides)’라는 교지에 대학 1학년 때 썼던 소설이 실렸다. 김 대법관은 “누군가 찾아 읽어보면 우스울 것”이라며 밝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대’에 실린 소설을 보고 국문과 전광용 교수님이 부르시더라고요. 우리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꺼삐딴 리’ 같은 작품을 남기셨죠. 전 교수님이 소설을 써보라고 그러셨어요. 내가 아마 소설을 썼다면 아주 논리적이고 딱딱한 걸 썼을 거예요. 소설가 최인훈 조성기씨가 서울법대 출신인데 논리적이고 문장이 딱딱해요.”
 
소설 쓰면서 사법시험 합격
 
-감명 깊게 읽은 문학작품이 있다면….
 
“박경리씨의 ‘토지’가 좋아요. 두세 번 읽었어요. 다시 한번 읽고 싶어요. 문장이 고풍스럽고 우아해요. 한번도 뵌 적은 없어요.”
 
-강 변호사가 어느 인터뷰에서 아내 흉을 본 게 있더군요. 책을 이것저것 동시다발적으로 보는데 침대에 한 권, 소파에 한 권, 식탁에 한 권 식으로 흩어져 있다고….
 
“부엌에서 일할 때는 소프트한 소설을 읽습니다. 조용히 오래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때는 딱딱한 것을 읽죠. 여행 갈 때도 딱딱한 것을 들고 가요. 소프트한 건 그날 밤에 다 읽어치우니까. 어떤 사람은 집에 서재도 없냐고 하지만 서재에서 읽는 책이 따로 읽고 부엌에서 읽는 책이 따로 있죠. 잡지는 거실에서 TV 보면서 읽는 거고….”
 
분당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분양받아 입주했다는 복층아파트 2층을 서재로 쓴다. 부모 모시고 살기 위해 넓은 평수의 복층아파트를 분양받았던 것 같다. 법률서적을 중심으로 책이 벽면을 가득 메웠다. 김 대법관은 “아래층에서 주로 생활하다 보니까 서재에 차분히 앉아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응접실에는 음악 CD가 많았다.
 
“사무실에도 저만큼 있어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요.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안정돼요.”
 
-젊을 때는 안경을 쓰지 않았던 거 같은데….
 
“콘택트 렌즈를 꼈죠.”
 
필자가 법조담당 올챙이 기자 시절에 강 변호사는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로 일했고 김 대법관은 서울민사지법 합의부 판사로 있었다. 판·검사 커플 1호인 이들은 당시 서소문 법조타운의 화제의 인물이었다.
 
“연구관 할 때 망막염을 앓았어요. 그 뒤로 렌즈 끼기가 겁나 안경을 쓰기 시작했죠. 난시도 있어요. 책 읽을 때는 독서용 안경을 써요. 대법관들은 늘 눈의 건강을 염려하죠. 기록 보다가 나쁜 눈이 더 나빠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돼요.”
 
속기사가 둘째딸 선형이 만들었다는 한복을 보여달라고 하자 김 대법관은 장롱에서 빨간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꺼내들고 나왔다. 여자들은 관심사가 비슷하다. 딸이 동대문시장에서 천을 떠다 만든 옷이라고 했다.
 
“딸이 ‘청와대에서 대법관 임명장 받는 날 입고 가면 좋을 텐데…’라고 말해 ‘엄마가 그럴 용기까지는 없다’고 대답했어요. 너무 잘 만들었어요. 선형이는 바느질에 취미를 붙여 어른이 되면 옷수선집을 하겠대요. 벌써부터 재봉틀 사달라고 졸라요.”
 
김 대법관은 엘리베이터 앞에 배웅 나와서도 딸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필자가 “아들만 둘이라서 그런 잔재미를 모르고 산다”고 하자 그녀는 “아들은 열을 낳아도 이런 재미는 없을 거예요”하고 말했다.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자료출처 :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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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 들여다 보기] 김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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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人物 探究하기 | 2006/05/25 (목)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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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김원기(金元基·67) 국회의장은 최근 공·사석에서 “대통령 권력 또는 제1당의 총재가 임명하지 않은 최초의 국회의장”이라는 말을 즐겨 한다. 보기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여당 국회의원의 공천은 물론 총선 후 국회의장 선출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은 국회의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 몫의 부의장과 상임위원장, 사무총장(장관급), 의장비서실장(차관급)까지 사실상 임명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심지어 부의장실 비서까지 청와대가 명단을 내려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국회가 ‘통법부(通法府)’라는 놀림을 받던 시대의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은 7월17일 제헌절에 국회의장 공관을 방문해 4부 요인들과 만찬을 들며 대화를 나눴다. 대통령이 국회의장 공관을 방문한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 김 의장의 초청으로 이뤄진 이날 만찬은 노 대통령과 김 의장의 관계, 김 의장이 여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준 행사였다.
 
국회의사당 의장실에서 김 의장을 2시간 반 동안 인터뷰했다. 당초 오후 3시 반부터 시작할 예정이던 인터뷰가 20분이나 지연됐다. 김 의장이 답변자료를 검토하는 동안 김기만 공보수석이 부지런히 의장 방을 드나들었다. 보좌관에게 ‘왜 이렇게 늦어지느냐’고 묻자 웃으며 ‘지둘러’라고 대답했다. 호남 사투리로 ‘기다려’라는 뜻의 ‘지둘러’는 김 의장의 닉네임이다.
 
“17대 국회, 의회정치 시대 열 것”
 
-제헌절 의장 공관의 만찬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노 대통령이 식사 전에 기자들에게 국회의장 공관을 방문한 뜻에 대해 잠깐 말씀하시더라고요. 첫째, 의회를 존중하고 의회가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의장 공관을 방문했다더군요. 둘째, 김원기 국회의장에 대한 개인적 신뢰와 존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어요. 제헌절에 4부 요인들이 의장 공관에서 만찬을 한 것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닙니다. 17대 국회는 역대 어느 국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회가 정치의 중심에 서는 의회정치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고 기대해도 됩니다.”
 
-공·사석에서 여당이 제1당을 차지한 국회구조에서 대통령이 지명하지 않은 최초의 국회의장이라는 말을 자주 하던데요.
 
“불과 1, 2년 사이에 정치구조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개원사에서 ‘제2의 제헌국회’란 표현을 감히 썼습니다.
 
첫째, 17대 국회를 만든 4월15일 총선거가 역대 어느 선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투명했습니다. 관권 개입이 일절 없었습니다. 선진국에 비교해 조금도 손색없는 선거였습니다. 깨끗하고 돈 안 드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먼 나라의 꿈 같은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4·15 총선에서 이뤄졌어요. 얼마 전 농협중앙회장 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과거엔 농협회장선거도 돈 선거였어요. 교육감선거마저 돈 선거였으니까. 그런데 국회의원선거가 깨끗해지니까 농협회장선거도 깨끗해졌어요. 자연스럽게 변화가 온 거죠.
 
과거 여당에 공천심사위원회가 구성되고 갑론을박하는 과정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최종적으로 공천권을 장악한 것은 대통령 아니었습니까. 이번 총선에서는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공천과정에서 전국구건 지역구건 단 한 명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어요. 행사할 수 없게 시스템이 갖춰졌어요.
 
17대 원(院) 구성에서는 대통령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의원 합의하에 국회의장이 탄생했습니다. 내 권한에 속하는 사무총장 이하 국회직을 임명할 때 단 한 명도 청와대 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야당도 같이 변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대적인 흐름이 형성된 겁니다. 야당 몫인 상임위원장도 당 총재가 임명하지 않고 의원총회에서 경선을 통해 결정하지 않았습니까. 모두 불과 1, 2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통령 권력이나 당권을 가진 사람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경선 또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모든 결정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1, 2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정치에서 상상할 수 없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일부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자랑스러운 변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굳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여야간 대화의 정치가 실종된 느낌입니다. 야당 대표가 ‘유신독재의 퍼스트 레이디’라고 공격받고 있죠. 야당은 여당에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벌써부터 대선 전초전을 보는 것 같아요. 경제가 어렵다는 말을 했지만 자영업이 무너져내리고 있어요. 일자리가 없어 대졸 ‘백수’가 넘쳐납니다. 경제가 어려운데 여야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정치가 과거사에 매달리니까 국민이 피곤해하는 것 같습니다.
 
“경제가 대단히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특히 서민경제가 어렵습니다. 내수가 일어나지 않고 투자의욕이 상실돼 있습니다. 수출을 비롯 거시지표는 대체로 괜찮은 편입니다. 그러나 피부로 느끼는 경제지수는 우울할 정도입니다. 이런 마당에 지난 일을 붙들고 지나치게 소모적인 정쟁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빨리 경제를 살리고 국민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여야가 힘을 합치는 일에 국정의 무게를 둬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군사독재 시절을 그리워한다든지, 거기에 지나친 평가를 하는 데 마땅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왜 이런 병리현상이 생깁니까. 민주화운동을 하고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고 봐요. 얼마나 실망했으면 국민의 심리가 거기까지 가겠습니까. 민주화세력에 낙담한 국민이 독재를 그리워하는 거죠. 역사가 옳지 못하다고 규정지은 시대로 역류하려는 현상이 생기는 것은 민주화와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현실정치에서 그만큼 국민한테 잘못했기 때문이죠.”
 
정치는 직업이자 취미생활
 
김 의장은 ‘군사독재 시절’에 관해 말하면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길 꺼렸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박 전 대통령의 인기도가 올라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김 의장은 “당적을 떠나 여당과 야당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할 국회의장이 야당 대표와 직결되는 문제에 관해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이러한 현상이 오게 된 데 대해 집권세력이 남을 나무라기 전에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2006년 개헌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더군요. 이 시점에서 개헌 이야기를 꺼낸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개헌의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국회가 개헌 논의를 포함해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겁니다. 과거 국가적으로 중요한 결정이 국회에서 이뤄진 적이 없어요. 대통령 권력이나 당권을 장악한 카리스마적인 당 총재가 밖에서 결정을 내리면 국회에선 형식적 논의만 이뤄졌죠. 그래서 국회를 ‘통법부’라고 한 거죠. 17대 국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국회의 장으로 모여 여기서 충돌할 것은 충돌하고 소용돌이칠 것은 소용돌이쳐야죠.
 
그래야 국정이 안정됩니다. 국회에서 법으로 통과된 것도 국회가 통과시켰다고 생각지 않고 청와대에서 시켰다고 생각하니까 갈등이 청와대로 집중되는 겁니다. 나는 시민단체가 이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민단체 때문에 국회가 형식적인 절차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개헌 문제도 국회 안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봐요.
 
이원집정제, 분권형 대통령제, 내각책임제, 대통령중심제 같은 논의를 국회에서 해야죠. 그리고 지금처럼 정치권이 사생결단하는 선거여서는 안 됩니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바꾸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지금 이대로 가서는 문제가 많다는 생각은 같습니다.
 
선거용으로 써먹지 말고 국회에서 여야가 함께 논의를 해야죠. 개헌처럼 중요한 문제는 어느 당이 수로 밀어붙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각계 여론을 듣고 전문적인 의견을 수렴하고, 여야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해관계를 절충하고, 바뀐 시대상황에 맞는 제도를 연구하고 찾아내는 장이 국회 안에 마련돼야 합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다른 문제가 있으니까 2006년쯤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의장은 정계에 입문하기 전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18년 동안 했다. 마지막 직책은 조사부장. 동아일보 퇴직 사우들에 따르면 기자로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김 의장은 이 이야기를 꺼내자 솔직하게 “기자로서는 재미를 못 봤죠. 나는 정치에 더 맞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에 자신이 넘친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치는 김 의장의 직업이자 취미생활이라고 말한다.
 
“젊은 정치인들, 균형감각 가져야”
 
김 의장은 성장기에 집안 어른 두 분이 선거에 출마해 일찌감치 선거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다. 아버지는 전북 정읍시 감곡면에서 민선 면장을 지냈고 집안 어른인 김택술씨는 2선 국회의원이다. 김 의장 본인도 전주고등학교 다닐 때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전라북도 학생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어 의장에 뽑혔다. 고교 시절에 벌써 치열한 선거를 두 번이나 치러본 것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에 유학을 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직장을 잡은 것이 동아일보였다. 기자생활을 하면서도 정치의 꿈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시절 언론계에는 정계(政界)로 가는 징검다리로 기자생활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979년 언론계를 떠나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할 때도 동아일보라는 배경이 큰 힘이 됐다고 자서전 ‘믿음의 정치학’에서 회상하고 있다.
 
언론계 출신 정치원로로서 김 의장은 열린우리당에서 논의되는 언론개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청와대, 열린우리당과 언론의 관계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메이저 신문과의 관계가 불편합니다. 권력이 주도하는 언론개혁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권력과 언론의 적절한 긴장관계는 필요하지만 대립하는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까요.
 
“언론과 권력이 대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언론계 스스로 규제하고 개혁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지요.
 
언론은 정부권력에 못지않은 영향력과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반 기업하고는 다릅니다. 시대에 맞게 스스로 변화해야 합니다. 신문시장의 공정거래 질서 확립도 신문사 자율에 맡겼지만 잘된 적이 별로 없어요. 언론계도 스스로 그 점에 대해 반성해야 해요. 권력의 규제가 있기 전에 언론이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게 스스로 변화해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언론계의 변화는 언론에 맡겨야지 밖에서 나서서는 안 됩니다. 누가 일방적으로 말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권력의지만으로 언론개혁을 강행해 성공할 수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아요. 지금 열린우리당에서 하는 건 내가 알기로는 당장 어떻게 하겠다기보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과정입니다. 급격하게 당장 어떤 것을 마련하기 위한 과정은 아니라고 봐요.
 
실질적으로 국민을 이끌고 나가는 면에서 우리나라처럼 언론의 영향력이 큰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권한에 걸맞은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17대 국회에서는 열린우리당 창당과 탄핵 바람으로 초선의원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지금까지 초선 비율이 가장 높았던 때는 여소야대로 구성된 13대 국회(55.9%)였다. 1992년 14대 39.1%, 1996년 15대 46.2%, 2000년 16대 40.7%였다. 17대 국회는 초선이 63%로 국회의원 299명 중 187명이 초선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지금까지 구경하지 못한 ‘변종’이 대거 출현한 것이다.
 
17대 국회에서 최다선(6선) 원로인 그에게 초선의원들에 대한 당부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젊은 의원이나 초선의원이 늘어난 현상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변화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초선 의원뿐 아니라 모든 의원한테 하고 싶은 얘기는 정치를 좀더 긴 호흡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인기나 여론의 진폭에 매달리지 말고 모름지기 자기 축적과 내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힘쓰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튀는 의원이 많긴 하지요. 자기의 독특한 개성이나 소신을 내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조직에 참여한 이상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조직의 결정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그러나 ‘당이 결정하면 나는 따른다’는 식으로 당명(黨命)이 절대적이던 시대는 지나갔죠. 개별적인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당이 다 규제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법안통과 또는 정책결정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당 대 당으로 맞설 게 아니라 자유투표, 소신투표의 폭이 더 넓어져야지요.
 
그러나 당 총재나 당권을 장악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참여해 토론과정을 거쳐 결정된 사안에 대해선 자기 의견과 다소 다를지라도 거기에 따라야 정치가 안정을 찾을 수 있지요. 실컷 논의해 결정해놓고 자기 혼자 튀어버리면 여야간에 협상도 안 됩니다. 젊은 정치인들이 균형감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합당 말할 단계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의원이 10명인데 이라크 파병 반대 단식을 일사불란하게 하더군요. 한나라당 의원들은 갑론을박하다가도 박근혜 대표가 결정하면 따릅니다. 튀는 의원은 열린우리당에 가장 많은 것같아요.
 
“한나라당과 비교하긴 그렇고…. 민주노동당의 경우 색깔이 단색이에요. 열린우리당은 진폭이 넓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설명이 안 되지요. 열린우리당이 다양함 속에서도 중요한 국사를 결정할 때 엇박자가 나오는 걸 최소화하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지난 국회에서 통과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친일진상규명법)이 너무 약하다는 이유로 김희선 의원 등이 이번 정기국회에 개정안을 낸다고 합니다. 60~100년이 지나 역사의 평가에 맡길 일에 집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견해도 있어요.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시각도 있고….
 
“노무현 정권에서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김희선 의원 등이 민주당 때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그렇게 나쁘게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이승만 정권 때 당장의 정치적 필요와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정체성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국가의 근본이 흐트러진 측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두고두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고 여러 가지 문제를 수십년 후까지 연장시키고 있습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처벌하지 않더라도 그 문제에 대한 규명을 하자는 데 동의해요.
 
그러나 사람이 한 일을 선과 악으로 딱 가를 수는 없습니다. 공(功)과 과(過)를 같이 고려해야 합니다. 공이 많은 사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작은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실수를 지나치게 과장해 그 사람의 공까지 다 무시하는 선까지 가선 안 된다고 봅니다. 균형 있게 해야죠.”
 
-노 대통령이 목포에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현재 따로 있지만 개혁노선을 같이 가고 있다”고 말한 이후 민주당과의 합당론이 불거졌는데요. 합당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정치에는 항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합당(合黨)을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봅니다. 가능성이야 다 있는 거죠. 이 당 저 당으로부터 내가 욕 얻어먹을지 모르지만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모든 정당에 유동성이 있어요.”
 
“정대철, 자기희생 컸다”
 
-이상수 의원은 출소했지만 정대철 김영일씨 등 16대 국회의 거물들이 의왕교도소에 있는데요. 면회를 자주 간다고 들었습니다.
 
“자주 갑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다 만나지만 아무래도 자주 만난 사람은 정대철 이상수씨죠. 사실 노무현 대통령 탄생을 위해 같이 손잡고 노력하던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야당의 서청원 김영일씨도 만났어요.”
 
-정대철 의원이 요즘 수감된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면서요.
 
“그래요.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사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뭣하지만 사실 정대철씨가 선거과정에서 나하고 같이한 일이기 때문에 사정을 잘 압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우리가 정대철 선대위원장을 중심으로 이전 대통령선거에 비해, 또 이회창 후보 진영에 비해 깨끗한 선거를 치렀습니다.
 
대통령후보를 위한 당 후원회를 열어 한나라당은 100억원을 걷었어요. 그 며칠 후에 치른 소위 집권 여당의 후원회 모금액은 개인의 후원회 모금보다도 많지 않은 3억원 정도에 그쳤습니다. 지난번 대통령선거의 실상이에요.
 
정대철씨도 내가 아는 한 사재(私財)를 많이 썼어요. 처음에 컴퓨터니 뭐니 장만할 때 (대금을) 선대위원장이 전부 냈습니다. 자기희생이 컸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복통이 터질 노릇일 거예요. 나는 그 사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요. 그 사람이 모금한 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것이 아니고 정치관행대로 회계처리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것이 법의 잣대에 저촉될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범법을 한 건 아닙니다. 정대철씨는 억울한 생각이 들 테죠. 모든 것은 재판을 통해 가려져야죠. 어느 시점에선 과거를 털고 새 출발 해야 합니다.”
 
김 의장은 “노무현은 대통령이 됐고 나는 국회의장, 이해찬은 국무총리가 됐는데 정대철과 이상수는 국회의원 출마도 못하고 감옥에 있다”며 “이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비서진이 전했다. 김 의장은 이상수 전 의원 면회 때 “오갈 데 없는 차용호 보좌관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차씨를 비서관으로 채용했다.
 
김 의장은 정무수석에 사촌동생인 김생기씨를 임명해 몇몇 신문에 비판적인 기사가 실렸다. 김생기 수석은 김 의장을 25년 동안 보좌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이기택 의원 보좌관을 할 때부터 김 의장의 보좌관을 한 사람이다. 김 수석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 김 의장은 다소 격앙된 말투로 답했다.
 
“나는 그 기사를 쓴 사람이 정치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분개하고 있어요. 어떻게 그런 기사를 쓸 수 있습니까. 취재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김생기를 내가 비서실장 시키려고 했어요. 누구도 (그를) 비서실장 시키는 데 시비 걸 수 없다고 봅니다. 내가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같이했어요. 모든 것을 상의해가면서 정치를 함께해온 일급 참모예요. 친인척과 상관 없어요. 선거도 김생기 중심으로 치렀고 내가 중요 당직을 수행할 때 김생기가 모든 대외관계를 챙겼습니다. 김생기 밑에 있던 사람 중에 국회의원 된 사람 많아요. 김원기의 큰 정치를 위해 자기희생을 한 사람입니다. 내가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용을 아는 다른 기자들은 하나도 그걸 쓰지 않았어요. 몰라서 안 쓴 것이 아니고 말이 안 되는 얘기기 때문에 안 쓴 겁니다.”
 
배석한 김기만 공보수석이 보충설명을 했다.
 
“정치부 기자 5년 이상 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런데 내가 브리핑하는 자리엔 없던 초년 여기자가 기사를 덜컥 썼어요. 김생기 수석은 1947년생으로 만57세입니다. 1995년 통합민주당의 사무부총장을 했고 통추 기조실장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정무특보도 했어요. 경력을 놓고 보면 사실 비서실장 시켜도 손색이 없어요. 친인척이란 이유 때문에 역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 의장은 다시 “내가 비서실장 시키려고 하니까 본인이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화제를 잠시 기분 좋은 쪽으로 돌렸다.
 
“정치에선 믿음이 가장 중요”
 
김원기라는 이름 석자를 들으면서 13대 국회 원내총무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어느 정당도 과반수를 넘기지 못했지만 세 야당이 연합하면 과반수를 넘기는 황금분할의 구조였다. 민정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이었다. 그는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원내총무로 김윤환(민정당) 최형우(통일민주당)씨와 협상을 벌여 유신 때 없어진 국정감사를 부활시켰다. 또 5공비리 조사특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를 가동시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서 하산시켜 증언대에 세웠다.
 
-정치협상을 잘하는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영수회담을 할 때도 사전에 총무들이 각본을 합의했습니다. 도저히 합의될 수 없는 것이 합의된 게 청문회 제도입니다. 광주사태라 해서 불온시하던 것을 명칭부터 바꿔 광주민주화특위를 만들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 보낼 때도 협상을 통해서 했습니다. 집권 여당의 실세였던 정호용 이원조씨 가슴에서 의원 배지 떼고 정계 은퇴시키는 것도 여야 합의로 했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못한 것 가지고도 합의가 안 되지만, 그때는 도저히 합의될 수 없는 것들을 여야 합의로 이뤄냈습니다.
 
군사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의정사에서 여야간 대화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대화 파트너를 잘 만났습니다.
 
정치적인 절충과 합의 도출은 말싸움에 이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있는 거니까 항상 내 입장에서만 논리를 펴지 말고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입장을 바꿔 그것이 받아들여질 것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얻으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요. 내가 얻은 만큼 그쪽도 얻는 것이 있어야 당에 가서 설득을 할 수 있죠. 얻는 것도 있지만 줄 생각을 하면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신뢰가 중요합니다. 내가 ‘믿음의 정치학’이란 책을 냈는데, 정치에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어요. 당내에서도 마찬가지고 당과 당의 대화에서도 신뢰가 중요해요. 노선이 다른 정치집단간 대화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풀기 어려운 문제도 풀 수 있는데 믿지 못할 때는 쉬운 것도 풀 수가 없어요. 믿음은 평소 서로 쌓아가야 해요.”
 
김원기 협상술의 요체는 세 가지인 셈이다. 첫째, 상대방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라. 둘째, 얻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셋째, 상호 신뢰다. 김 의장은 이 셋 중에서 신뢰를 으뜸으로 친다.
 
“김윤환 총무와 문서로 합의한 적이 있습니다. 정호용 문제 등 여러 안건에 관한 구체적인 합의문서였는데 서로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나중에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전개되면서 그 약속이 일부 이행되고 일부 이행이 안 된 채 파국이 왔습니다. 평민당 내에서 그 문서에 대해 아는 사람은 김대중 총재와 나, 둘뿐이었습니다. 민정당을 대표해 김윤환, 평민당을 대표해 김원기 양자가 합의한 문서니까.
 
공안정국에서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문서를 공개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어요. 그러나 핍박을 받더라도 한번 약속한 것은 그대로 지키기로 했지요. 당하면서도 약속은 지켰어요. 한번 약속한 것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내 인생철학입니다. 사이가 좋았을 때 알게 된 비밀과 약점을 사이가 나빠졌다고 해서 악용할 사람인가 여부로 사귈 사람이냐, 사귀지 못할 사람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민정당 사람들은 내가 악용하지 않기 때문에 터놓고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내가 그쪽 내용에 대해 잘 알게 되고 판단할 수 있었어요.”
 
김 의장은 1991년 북한에 갔을 때 전금철(당시 조평통 부위원장)씨가 “김원기 선생은 협상의 명수라면서요”라고 물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1990년대 초 노 대통령과 가까워져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사부’로 불리고 대통령 정치고문도 했는데요. 노 대통령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진 건 언제입니까.
 
“1990년대 초 통합민주당 때 나는 평민당을 대표하는 입장에 있었고 노 대통령은 꼬마민주당 계였죠. 둘 다 최고위원으로서 공천심사를 하며 자주 논의했죠. 계보가 달랐는데 나중에 상호신뢰가 생겼습니다. 그때 노 대통령은 계보나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전체에 지장을 주는 일을 하지 않고 전체를 위해 자기 이익을 버려야 할 때는 선뜻 잘 버리더라고요. 보통 구태정치에 익숙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다른 계보 사람의 경쟁력이 나아보여도 고개를 푹 숙이고 계보 이익을 지키는데, 노 대통령은 객관적으로 자기가 민 사람에게서 하자가 발견되면 선선히 버리고 이쪽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도 내가 비록 평민당을 대표하는 입장이지만 계보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들이 더 합리적이고 더 옳은 것을 제시할 경우 수용해주자 내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을 겁니다. 중요한 문제에서 한번도 나하고 입장을 달리한 적이 없어요. 뿌리가 다른 데도…. 노 대통령은 엄밀히 말하면 이기택 계였죠.”
 
김 의장과 DJ의 질긴 인연은 1980년 5·18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사흘 전인 15일 열린 정읍 동학제에서 시작됐다. 초선의원 김원기는 동학제 추진위원회가 DJ에게 초청장을 보내도록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DJ가 온다는 소문이 퍼져 정읍이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다. 군부는 초청장을 들고온 DJ의 참석을 막을 수 없었다. 김 의원은 자신의 연설 차례가 오자 “여러분은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듣기 위해 여기 모였을 것입니다”라며 마이크를 DJ에게 넘기고 뒤로 물러났다. 사흘 뒤 세상이 바뀌면서 도지사와 군수가 이 일로 옷을 벗었고 70 노인이던 동학제 추진위원장은 옥살이를 했다. 이날 행사로 김 의원은 DJ와 가까워졌다.
 
DJ와의 질긴 인연
 
-통산 전적이 8전6승2패인데 1985년 신민당 돌풍을 몰고온 2·12 총선에서 첫 낙선의 고배를 들었습니다. 왜 민한당에 남아있었습니까.
 
“사실 묻혀진 이야기인데 DJ가 신민당에 대해 그렇게 동조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민한당은 표면상 유치송씨가 총재였지만 선거대책위원장 조윤형씨와 정대철 김원기 셋이 내용적으로 민한당을 장악했지요. DJ는 민한당에 대해 우호적이었어요. 신민당은 YS당이라는 인식이 있었죠. DJ가 귀국한 뒤 조윤형 정대철씨와 나 셋이 동교동에 갔더니, DJ가 ‘김상현씨가 내 대리인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내 말 듣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지금도 공개할 수 없는 얘기가 있지요. 그때는 김상현씨가 신민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민한당에 공천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읍에서는 누구를 공천하는 것이 선거에 도움이 되겠냐고 묻기도 했어요. 선거가 끝나면 동교동계는 동교동계대로 양쪽에서 합치자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신민당으로 간 사람 상당수가 처음엔 민한당에 공천신청을 했습니다.”
 
원내총무를 하며 DJ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김 의장은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 때 따라가지 않아 두 번째 패배를 맛본다. 그가 DJ와 멀어진 데는 장남 김홍일씨의 공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일이 계기가 됐다.
 
“14대 총선을 앞두고 내가 공천심사위원장을 할 때 DJ와 이희호 여사가 김홍일씨를 공천해달라고 간곡하게 말하더군요. 나도 가능하면 김홍일씨를 공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통합야당이라는 명분을 갖기 위해 꼬마민주당과 평민당이 5 대 5 지분으로 합쳐 통합민주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경상도에서 출마할 사람들이 ‘김대중 하나만 가지고 경상도에서 싸워도 당선 희망이 없는데 거기에 홍일이까지 업고 뛰라고 하면 우리보고 자살하라는 것과 똑같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통합한 걸 깨고 우리가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는 거였지요. 이해할 만하잖아요.
 
김홍일씨를 공천하면 대통령선거에서 DJ가 100만표는 손해볼 것이라는 이야기를 동교동 사람들도 했어요. 아무리 김대중 총재가 부탁하더라도 대통령선거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논리로 내가 잘랐어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했죠.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DJ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야 했는데 권노갑 의원이 같은 공천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다 보고할 것이라 생각하고 소홀히 했던 겁니다. DJ는 그렇게 간곡하게 얘기했는데 안 들어주고 1년이 지나도록 일언반구 없는 데 대해 섭섭함이 있었을 겁니다.”
 
김홍일 의원은 결국 14대에서 공천을 못 받고 15대에서 권노갑씨 지역구(목포)를 물려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3김 중에 둘은 대통령이 되고 JP는 9선에 국무총리를 두 차례나 지냈습니다. 이에 비해 고향 선배인 소석(이철승)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지요. 꼭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성공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소석이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측면이 있죠. 독재 치하에서는 거기에 선명하고 날카롭게 맞서는 것이 정치 활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데 소석은 다소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데서 힘이 반감됐다고 할 수 있겠죠.”
 
-중견 정치인이니 대권 꿈을 가져봤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정치부 기자들이 ‘언론인 출신 중에서도 대통령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하면 김 의장 얼굴이 빨개졌다던데요.
 
“대권의 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수석 최고위원도 했고 DJ가 정계에 복귀하기 전까지는 내가 당권에 도전할 준비를 했으니까요. 우리는 완전히 지역주의 3김정치로 희생된 세대입니다. 독재정권과 대립각을 세워 형성된 카리스마, 소위 민주화의 중심,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중심이 오래 지속되다보니까 우리 세대는 거기에 묻혔어요.”
 
“대권 꿈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
 
-3김의 덕을 봤지만 피해자라는 측면도 있다는 말이군요.
 
“3김의 피해자죠. 통추 대표를 할 때 대통령선거에 나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야 하는데 국회의원선거에서 패했죠. 지난번 대통령후보 경선 때는 김대중 대통령을 겪고 나서 민심의 동향으로 볼때 호남 후보가 김대중 대통령을 이어 대통령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을 했어요. 대통령을 한나라 쪽에 주지 않으려면 노무현을 후보로 내세워야 본선에서 한번 싸워볼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
 
-정치인한테는 정치자금이 필요악인데요. 8차례나 선거에 출마하면서 돈과 관련해 사고를 한 번도 안 냈고 추문도 없는 거 같습니다.
 
“나는 배후가 있는 정치자금은 철저하게 받지 않았습니다. 가령 무슨 부탁이나 조건이 있는 돈은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돈에 여유가 있어본 적이 없고 항상 허덕이지만 선거 치르고 필요할 때는 누군가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돈 없어서 할일 못 한 적은 없습니다. 나를 도와준 것은 대개 친척과 친구들입니다. 그런 인간관계에 의해서 도움을 받고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한번도 여유 있는 정치를 해본 적 없고 그저 빠듯하게 지냈지요.
 
DJ도 내가 총무를 하는 동안 모든 정치를 나하고 상의했지만 절대 돈 심부름은 안 시켰어요. 돈 심부름은 다른 사람이 했지요. 그 양반이 저 놈은 시켜봐야 별로 하려고 하지도 않고 실적을 못 올린다는 것을 파악한 거지요.”
 
“우리 세대는 3김 정치의 피해자”
 
정치인 중에는 사람을 기억하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정치에 성공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김 의장이다. 조어(造語)를 하자면 김 의장은 ‘인맹(人盲)’ ‘인치(人痴)’에 가깝다. 그가 원내총무 시절 출입기자들과 골프를 쳤을 때 일화다. 김 총무는 두 팀 중 앞팀에서 플레이를 했다. 두 팀이 목욕탕에서 섞였을 때 뒤팀 기자 한 사람을 만나자 김 총무가 인사를 했다.
 
“아, 오랜만이요. 여기서 이렇게 만날 게 아니라 우리도 언제 골프 한번 같이 합시다.”
 
이 일화를 들려주자 김 의장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당했던 언론인이 말한 것이니 틀림없는 실화다.
 
“내게 그런 점이 있어요. 인정해요. 그렇다고 해서 무시해 그런 건 아닙니다. 사람 이름을 외우는 노력을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에요.”
 
사람의 이름을 천재적으로 기억하는 정치인으로 김상현 전 의원과 이수성 전 총리가 꼽힌다. 두 사람은 공히 ‘형님’ 2만명, ‘동생’ 3만명을 두고 있다는 속설이 있다. 김상현 전 의원 경우는 만나는 사람마다 명함에 그 사람의 특징과 경력을 깨알같이 적어놓고 외운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에 그날 만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명함을 수십 장 꺼내놓고 읽는다. 이런 노력을 통해 한번 만난 사람의 이름과 특징을 정확하게 기억해 그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김 전의원 이야기가 이어지자 김 의장은 “그건 장점입니다”라고 말했다.
 
-‘지둘러’라는 닉네임은 누가 지어준 것인가요.
 
“기자들이 가십기사에서 쓰기 시작했어요. 내가 민한당 대변인을 할 때 발표를 잘 안 했어요. 아마 기자들이 갑갑했을 겁니다. 그때 민한당에는 독재권력이 작용한 결정이 많았습니다. 밖으로 진상이 알려지면 실망스런 내용이 있었어요. 참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언론인이던 김진배(전 의원)씨가 공천 달라고 찾아왔길래 국민이 진상을 알고나면 야당 찍을 사람이 없을 거라고 내가 말릴 정도였어요. 기자들은 대변인에게 자꾸 설명을 요구하는데 진상을 공개할 수도 없고 설명을 해줄 수도 없었죠. 그래서 ‘아, 이 사람들아, 지둘러 지둘러’ 하면서 자꾸 미뤘지요. 내막을 다 말할 수도 없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지둘러’가 된 거죠.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할 때 스스로 ‘우보(牛步)’라는 호를 지었어요. 뚜벅뚜벅 믿음직스럽게 걷는 자세로 인생을 살자는 뜻이죠. 그런 심리가 내재했던 거죠.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독어를 했어요. 독일어 격언에 ‘여유있게 서둘러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 말을 좋아했습니다.”
 
소걸음으로 신중하게 걸으며 실수하지 않고 정치인으로서 대성했지만 소걸음으로 기자 생활을 하다보면 특종하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보(牛步)’와 ‘지둘러’
 
김 의장은 골프 외에 다른 운동을 안 한다. 연습장에 가면 두 시간씩 땀을 흘리며 공을 친다. 10년 전쯤 골프연습장에서 5번 아이언으로만 1시간 동안 공을 치는 김 의장을 목격한 적이 있다. 특이한 연습법이다.
 
-공식 기록에 드라이버 길이가 220이라고 돼 있던데 단위가 미터입니까, 야드입니까.
 
“아, 그게 야드면 거리가 난다고 볼 수 있간디.”
 
220m는 약 241야드다. 나이를 감안하면 대단한 장타다. 핸디캡은 10. 이 정도 핸디캡을 유지하자면 남다른 노력을 해야 한다. 김 의장은 골프 연습장에서 두 시간 동안 네댓 바구니 공을 치는 것으로 체력보강을 하고 대중탕에서 냉온탕을 오가며 스트레스를 푼다.
 
-열린우리당의 차기 주자로 김근태 정동영 장관이 언론에 오르내리는데요. 그들의 정치적 장래에 대해 어떻게 전망합니까.
 
“글쎄요. 후배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구체적인 평을 하기는 어려워요. 차기 대선까지는 3년이 넘게 남았단 말이에요. 앞으로 제도가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죠. 변수가 많아요.”
 
김 의장의 저서에는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어린 시절 망태를 짊어지고 개똥을 주어오던 이야기가 나온다. 화학비료가 모자라던 시절이라 개똥을 주어 두엄을 썩히는 데 썼다. 정읍시 감곡면은 노령산맥과 호남평야가 만나는 고장이다. 감곡면의 쌀 생산량이 전북 진안군 전체보다 많았다. 그러나 김 의장이 태어난 마을은 들녘이 아니라 산 쪽에 있었다. 한 면에 대학생이 한둘이던 시절에 김 의장 5남매는 모두 아버지가 보내주는 ‘향토장학금’으로 서울에서 하숙하며 대학을 마쳤다. 아버지 김환국(88) 옹은 지금도 아들을 대신해 지역구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정정하다.
 
김 의장은 36세에 만혼(晩婚)을 했다. 김선홍 전 기아자동차 회장이 그의 동서다. 김 의장은 “그 양반 요즘 소시민으로 지낸다”고 김 전 회장의 근황을 전했다.
 
김 의장에게 “바쁘실 텐데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다”는 말을 하고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인터뷰중 가장 긴 답변이 나왔다. 너무 길어 골자를 추려 소개하자면 이렇다.
 
DJ가 국민회의 만들 때 가장 큰 고민
 
“내가 정치적으로 가장 고민한 때는 DJ가 국민회의를 만들 때였죠. 전북에서도 DJ 선호도가 가장 높은 곳이 정읍이에요. 선거를 치러보면 목포하고 똑같이 나왔어요. 나는 DJ 복귀를 찬성했지만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출마하라고 권유했습니다. DJ가 출마하면 정대철 김상현이 포기할 판이고 이기택과 붙어 7대3으로 이길 수 있다고 했죠. 그러나 DJ는 이기택씨가 깽판을 놓을 것이라 주장했어요.
 
민주당이 지자제 선거에서 압승을 했습니다. 서울시에서 조순 시장을 당선시켰고 충북에서도 자민련을 이겼어요. 지역주의를 극복한 민주당을 이유 없이 버리고 당을 만들면 호남 사람들은 따라가겠지만 쓸 만한 사람들은 안 따라간다고 했죠. 나중에 보니 내 판단이 맞지 않았어요.
 
내가 그렇게 본 건 그때 민주당 의원 중에서 90%가 당이 쪼개지는 걸 반대했기 때문이죠. 민주당 의원들이 나보고 나서서 분당(分黨)을 막으라고 했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나를 앞세워놓고 전부 항복하고 돌아서버렸습니다. 노무현 김정길씨는 DJ를 선택하면 부산에서 떨어질 줄 알면서도 야권 통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우리와 손잡았던 것 아니에요. 호남에서도 중진의원 한 명 정도는 노무현 김정길씨처럼 원칙을 지켜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호남지역 정서에는 맞지 않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내가 수석 최고위원이고 오른팔 역할을 했는데, 민주당을 깨고 새로운 당을 만들면서 나하고 일언반구 사전 상의 없이 결정한 뒤에 무조건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가족회의를 했어요. 김대중 총재를 안 따라가면 내가 국회의원 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따라가기도 어렵게 돼 있는데 국회의원 한번 안할 각오하고 소신대로 할 생각이라 했더니 가족 전원이 찬성했어요. 아버지도 사내자식이 소신대로 하라고 격려했어요.
 
여론조사를 해보니 당선 가능성이 없어요.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내가 DJ와 당을 달리했을 때 그래도 김원기를 찍겠다는 사람은 30%도 안 됐어요. 전국구로 나오라거나 서울로 지역구를 바꾸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것이 100% 확실하지만 호남에 가서 십자가를 짊으로써 지역주의에 쏠리는 민심에 반성의 계기를 만들자고 맘먹고 출마했던 것입니다.”
 
-노 대통령의 현재 국정수행에 대해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주시겠습니까.
 
“객관적인 입장에 있지 않아 점수를 줄 시험관으로서의 자격이 없어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우니까 채점을 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김 의장을 3년 넘게 보좌했다는 송주하 보좌관은 “지금까지 한 언론 인터뷰 중 가장 긴 인터뷰”라고 말했다.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자료출처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