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想像나래 마당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鶴山 徐 仁 2006. 6. 25. 14:32

1.육탄 십용사

2.육탄 십용사 충용탑

3.

4.육탄 십용사 위패

5.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

6.자유의 다리

7.평화통일을 기원하며

8.

9.평화의 종각

10.영국군 참전 기념비

11. 38 선
한국전쟁은 북한 공산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을 기습 남침 함으로써 일어 났습니다.
수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내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습니다.
민간인 사상자; 99만여명
국군 사상자 ; 98만여명 (사망 147039명)
유엔군사상자 ; 15만여명 (사망 35737명)

출처 : 사진가: 성연근(pointsyg). http://chosun.com/visual/photo/.등록일: 2006-06-24 23:48

 

 

 

 

[잊혀져가는 전쟁, 6ㆍ25]두 유엔군 병사의 무덤에 50년 만에 꽃을 바치다
영국에 연수 갔던 한국인 교사가 살아남은 전우의 부탁 받고 귀국해 헌화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영국군 묘역. 찾는 이 없던 두 병사의 묘지에는 2002년 여름부터 흰색 장미꽃이 놓이고 있다. 맥 병사와 클레멘츠 병사의 묘지다. 2001년까지만 해도 두 병사의 묘지는 쓸쓸했다.

▲ 클레멘츠 병사(앞쪽)와 맥 병사의 묘지.
2002년 여름부터 매년 6월 맥 병사와 클레멘츠 병사의 묘지를 찾는 사람이 있다. 울산 삼호중학교 영어과 교사 김현경씨. 2002년 여름까지 김 교사는 두 영국군 전사자의 존재를 몰랐고 알 수도 없었다. 김 교사는 그 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영국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다. 김 교사는 영국에 머물던 고등학교 시절 펜팔이었던 론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한다. 론 할아버지는 런던에서 기차로 90분 걸리는 서포크주의 작은 마을 니드함마켓에 살고 있었다.

론 할아버지는 김 교사를 반갑게 맞았고 한국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웃 마을에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하여 김 교사는 론 할아버지 집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크래스칼씨를 만나게 된다.

당시 일흔한 살의 크래스칼씨는 한국에서 온 김 교사에게 한국과 관련된 추억을 많이 얘기했다. 특히 그는 당시 영연방 전투부대 ‘더 로열 퍼실러스(The Royal Fusilers)’의 부대원으로 참여한 한국전쟁에서의 전투 경험을 털어놓았다.

크래스칼씨는 1952년 11월 강원도의 어느 산간지역에서 북한군과 교전 중 등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나이 열아홉 살. 그는 일본으로 후송되어 5개월간 치료를 받다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김 교사에게 이런 기억을 되살렸다.

“치열한 교전으로 나무가 거의 없어진 산속이었다. 몹시 추웠고 11월인데도 눈이 많이 내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 '이스트 앵글리안 데일리 타임스'의 2003년 9월 4일자 신문.
크래스칼씨는 “나는 다행히 살았지만 가장 친한 친구인 맥(D. Mack)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맥 역시 ‘더 로열 퍼실러스’의 부대원이었다. 크래스칼씨는 “맥의 묘지가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무덤이라도 찾아봐 줄 수 없겠느냐”고 김 교사에게 부탁했다. 김 교사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크래스칼씨는 김 교사가 흔쾌히 동의하자 기쁜 얼굴로 “유엔 묘지에 가면 내 친구는 아니지만 인근 동네에 살던 클레멘츠(J. Clements)씨 묘지도 한번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클레멘츠씨는 ‘더햄 경보병대(The Durham Light Infantry)’ 소속이었다. 론 할아버지는 “만일 클레멘츠의 묘지를 찾게 되면 그의 동생들도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웃 마을에는 클레멘츠의 동생이 두 명 살고 있었다.

김 교사는 한 달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주말을 이용해 부산 대연동의 유엔공원을 찾아갔다. 김 교사는 이때 말로만 들었던 부산 유엔공원을 처음 방문했다. 김 교사는 유엔공원 직원에게 맥과 클레멘츠의 이름을 대며 “묘지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쉽게 두 영국병사의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

마침 두 영국병사의 묘지는 서로 이웃해 있었다. 그는 준비해간 장미꽃을 맥과 클레멘츠의 묘지 앞에 놓고 기도를 했다. “19살의 나이로 이름 모를 나라에 와서 죽는다는 말 한마디 못 남기고 안타깝게 전사한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더군다나 지난 50년 동안 두 사람의 묘지에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왔습니다.”

▲ 2002년 8월의 크래스칼씨. 그는 "1952년 일본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대 마크를 수놓았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두 사람의 묘지 사진을 여러 장 찍어 크래스칼씨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이메일로도 보낼 수 있었지만 연로한 크래스칼씨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아 우편으로 부쳤다. 얼마 후 크래스칼씨로부터 답장이 왔다. 크래스칼씨는 “친구의 묘지를 보니 미안했던 마음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크래스칼씨는 “클레멘츠의 묘지 사진은 그의 동생들에게 전해줬다”고 덧붙였다. 얼마가 지나 김 교사는 클레멘츠씨의 여동생에게서 감사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났을 무렵, 김 교사는 크래스칼씨로부터 우편물을 받았다. 크래스칼씨는 간단한 편지와 함께 신문기사를 하나 동봉했다. 지역신문 ‘이스트 앵글리안 데일리 타임스(East Anglian Daily Times)’ 2003년 9월 4일자였다. 톱 기사의 제목은 ‘가족들, 마침내 죽은 형의 무덤을 보다’였다. 이 신문사의 존 하워드 기자가 클레멘츠씨의 사연을 전해 듣고 기사화한 것이다. 기사는 동생 피터 클레멘츠(당시 68세)의 인터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형의 전사 소식만 들었는데 50년 만에 형의 마지막 안식처를 보게 되어 너무 기쁘다. 형이 갑자기 한국전쟁에 자원했고 한국에서 19살 생일이 막 지났을 때 총에 맞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충격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형의 무덤을 보다니 기쁨의 눈물이 끊이질 않는다.”

▲ 클레멘츠 병사 묘지 앞의 김현경 교사.
신문기사는 여동생 머린 버클(당시 60세)의 말도 인용해 실었다. “내가 열두 살 때 오빠가 전사했다. ‘오빠를 빼앗아간 곳’이라는 기억 때문에 한국을 늘 음울하고 끔찍한 곳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빠의 묘지가 아름다운 꽃과 함께 잘 보살펴지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우리 가족 누구도 그의 무덤을 보지 못했는데 그녀(김 교사)가 한 일에 대해 정말 감사하다. 그녀는 그 전쟁을 잘 모를 것이나 우리를 위해 그녀가 한 일은 정말 아름다웠다.”

김 교사는 “단지 크래스칼씨와 한 약속을 지킨 것뿐인데 클레멘츠의 유가족을 감동시키고 지역 언론에 크게 보도돼 화제를 불러일으킬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앞으로도 매년 현충일에 두 분의 무덤에 꽃을 놓아드리고 유가족에게 사진을 보내겠다”고 말한다. 김 교사는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모든 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이 땅에 평화통일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도 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유엔 16개국 참전용사의 전사자는 4만895명. 이를 국가별로 보면 미국 3만6492명, 영국 1177명, 터키 1005명, 캐나다 516명, 호주 346명의 순이다. 미국은 전사자의 유해를 모두 본국으로 환송해 워싱턴의 한국전쟁 묘지에 봉안했다. 현재 부산 유엔공원에는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등의 전사자 묘지가 있다. 영국군 전사자 1177명 중 885기가 모셔져 있다.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