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0도의 겨울방학에도 학교에 나와 졸업작품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4학년 학생들. 4년 전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던 33명의 동기 중 10명이 고된 수업과 연습을 견디지 못해 학교를 떠났다. 연기에 대한 학생들의 열정은 혹한도 녹일 정도로 진지하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
모스크바 중심 극장광장 1번지. 클래식발레의 본산인 국립볼쇼이극장이 있는 곳이다. 볼쇼이극장은 러시아어로 ‘대극장’이라는 뜻. 그 옆으로 ‘소극장’이라는 뜻의 말리극장이 위치하고 있다. 발레와 오페라 무대인 볼쇼이극장과 연극 전용 극장인 국립말리극장은 세계 정상의 러시아 공연예술을 이끄는 쌍두마차 같은 존재다.
말리극장 앞에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로 유명한 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동상이 서 있다. 말리극장 뒤편의 유럽 고전양식으로 지어진 2층짜리 석조건물이 이 극장의 부속학교인 셰프킨학교다.
이 학교는 1943년 구소련 정부로부터 4년제 대학 인가를 받았으나 여전히 고등연극학교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학생이 250여 명밖에 안 되고 전공은 연기 하나밖에 없으며 배우를 양성하기 위한 실기 위주의 교과 과정으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 들어서자 19세기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미하일 셰프킨(1788∼1863)의 흉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1832년부터 30년 동안 이 학교에서 가르치며 학교의 기틀을 잡았다. 말리극장부속학교에서 1935년 바뀐 교명도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복도에는 이 학교에서 배출한 유명 배우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국내에 알려진 올레크 멘시코프도 이 학교 출신이다.
9월에 시작되는 1학기는 1월 초에 끝나고 3주 동안의 짧은 겨울방학 후인 2월 초에 시작되는 2학기는 6월 초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겨울방학 중인데도 학교에 나온 학생이 많았다. 학교 안에는 평소에 공연 연습을 하고 졸업 작품도 올릴 수 있는 7개의 크고 작은 무대가 있다.
4학년생인 마리야 추빌리나(22·여) 씨는 3명의 동급생과 졸업작품 연습에 한창이었다. 밖은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 창고같이 어두운 연습실은 외투를 벗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웠고 학생들은 휴식 시간마다 손을 비비며 추위를 달랬다.
러시아 중부 니주니노보고로드 출신의 추빌리나 씨는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모스크바에 와 재수 끝에 입학에 성공했다. 4년 전 100 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온 33명의 동기 중 10명이 중도에 학교를 그만뒀다.
4학년생인 한승환(韓承煥·28) 씨는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는 수업이 이어져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아침 9시까지 학교에 나오면 5, 6시간의 연기술과 무대동작 수업이 매일같이 이어진다. 거기에 수업이 끝난 후 작품 연습까지 하면 밤늦게 기숙사에 들어가고 주말에도 연습을 하기 일쑤다. 이론 과목도 대부분 연극과 관련된 것이어서 오로지 연극을 위해서만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유학생들은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연기를 배울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 학생의 반수 정도는 한국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거나 다니다가 유학을 왔다.
셰프킨의 교수법은 한때 이 학교를 다녔던 연극이론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고안한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연기법은 배우가 배역에 몰입해 극중 인물의 내면과 일치하는 연기를 보여 주도록 심리학적 분석과 연습을 하는 것이다.
1학년 때는 아예 무대에 설 기회를 주지 않는다. 연기수업 시간에 대사도 별로 없는 에튀드(연습)만을 반복한다. 가장 기초적인 것은 사물이나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훈련이다. 예를 들면 교수가 수업 시간에 들어오자마자 학생들에게 눈을 감게 한 후 자신이 맨 넥타이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다. 또 수업 시간 중에 갑자기 한 학생에게 두 사람 건너 뒷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 물어본다. 이런 훈련을 통해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는 집중력을 기를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상상력을 기르는 연습. 교실에 불이 났다거나 유명한 인물이 갑자기 들어왔을 때의 반응을 보여 주거나 빈손으로 총을 쏘거나 삽질을 하는 동작을 보여 주는 식이다.
2학년이 되면 주요 작품의 한 부분을 골라서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고 3학년 때는 단막 작품을 연습한다. 4학년이 돼야 비로소 졸업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한 편의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습한다.
이런 힘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해도 연극배우나 영화배우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셰프킨의 학생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다. 4학년생인 시묜 스페시프체프(22) 씨는 “공연을 앞두고 몸이라도 아프면 배역을 잃어버리기 일쑤”라며 “배우는 평생 긴장 속에서 자신을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직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묘한 매력 때문에 해마다 입학철인 6월 말이면 러시아뿐 아니라 각국의 젊은이들이 배우가 되기 위해 셰프킨으로 몰려든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아포닌 ‘셰프킨’ 교장 “한국학생 격년으로 15명 선발… 열정 대단”
니콜라이 아포닌(사진) 교장은 “이는 말리극장의 부속학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1990년대 초 문화부 장관을 지냈고 구소련 정부로부터 ‘인민배우’ 호칭을 받은 유리 솔로민 말리극장 예술감독이 1960년부터 국립셰프킨고등연극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포닌 교장은 1961년 이 학교 졸업 후 1968년부터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00여 명의 교수는 무대와 연극학교만을 오가며 평생을 연극과 함께 보낸 사람이다.
해마다 50∼60명밖에 신입생을 뽑지 않기 때문에 입학경쟁률은 평균 100 대 1에 이를 정도. 재수를 해서 입학하거나 다른 연극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도전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입학시험 과목은 러시아문학과 연기오디션. 국립학교라 러시아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는다.
외국 학생들은 별도로 전형을 한다. 학비는 1년에 4000달러(약 386만 원)가량. 한국 학생들은 2년마다 15명가량을 뽑아 별도의 ‘카레이스카야 그루파(한국인 그룹)’를 만든다. 올해가 한국 학생을 뽑는 해다.
외국인 학생들은 러시아어 교육 위주의 예비학부 1년을 포함해 5년 동안 공부해야 하지만 러시아어가 가능한 경우는 바로 1학년에 입학할 수도 있다. 현재 이스라엘과 일본 미국 등에서 유학생들이 와 있고 유럽에 마스터클래스를 열기도 한다.
아포닌 교장은 “한국 학생들은 열정이 대단하고 성실하다”고 칭찬했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10>佛예술화장학교 크리스티앙 쇼보
한 여학생이 동료 여학생을 모델로 교사의 조언을 들으며 분장 실습을 하고 있다. 분장을 마치면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찍은 사진은 모아서 졸업 때 사진첩을 만들어 제출해야 한다. 파리=송평인 기자 |
파리 시내 라파예트 백화점 뒤쪽으로 가면 ‘예술화장학교-크리스티앙 쇼보’가 나타난다.
지난달 13일은 이 학교에서 ‘리브르(Livre)’라고 부르는 포트폴리오 사진첩을 위한 촬영이 있던 날. 학생들은 과정이 끝나는 6월 말 1년 동안 시시때때로 해 온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제출해야 한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실습실에는 학생들이 모델을 분장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모델도 학생들이다.
코랄리 뒤샹(21·여) 씨는 졸린 듯하면서도 섹시하게 옆을 바라보는 눈을 만들기 위해 위 속눈썹 끝에 몇 개의 인조눈썹을 붙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순간순간 떠오르는 독창적인 이미지를 메모했다 스케치로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모델에 구현하는 실습을 한다. 마크 몰레(22) 씨의 스케치는 눈 부위를 장식적으로 처리했는데 신선한 느낌의 초록색이 인상적이다. 유명 화장품 브랜드가 돼 버린 엘리자베스 아든이 1960년대 중반 선보였던 판타지 아이 메이크업(fantasy eye make-up)은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 학교는 사진 스튜디오와 전속 사진사를 두고 있다. 학생들은 사진 작업이 끝나면 슬라이드 필름과 스케치를 비교해 보면서 어떤 점이 잘됐고 어디가 잘못됐는지 교사들과 함께 강평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학생들은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 간다.
수업은 월∼금 오전 9∼12시, 오후 2∼5시에 진행된다. 화 목요일 오전에 교사의 강의가 있다. 이것도 교사가 시범을 보이거나 실습 강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루 종일 실습의 연속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예술화장은 9개월 과정. 처음 3개월은 미용화장을 배우는 단계다. 얼굴의 돌출부위(하이라이트)와 함몰부위(섀도)는 그 경계를 잘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점차적인 색상의 차이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블렌딩(blending)을 확실히 익혀야 한다. 낮과 밤의 화장은 어떻게 다르며 백인 흑인 황색인 피부의 화장은 어떻게 다른지도 배운다.
절반가량의 학생들은 1주일에 3번 오후 5∼7시에 국제화장위원회(CIDESCO) 자격증을 따기 위한 강의도 함께 듣는다. 1946년 스위스 취리히에 본부를 두고 세워진 CIDESCO는 화장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조직이다. 크리스티앙 쇼보는 프랑스에서 CIDESCO 분장사 자격시험이 치러지는 5개 학교 중 하나다. CIDESCO 과정에서는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시대별 패션을 구체적으로 공부한다. 패션을 정확히 이해해야 거기에 어울리는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또 헤어스타일 3개월 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메이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헤어스타일을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메이크업을 하다 보면 헤어스타일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수업료는 작년 9월 입학생의 경우 9개월 기본 과정이 5950유로(약 700만 원), CIDESCO 과정이 6850유로(약 800만 원), 헤어스타일 과정이 3025유로(약 350만 원)다. 재료비 등은 학생들이 따로 부담한다. 이 학교에는 한국 일본 중국인 학생도 10여 명씩 공부하고 있다. 수업은 프랑스어로 진행된다.
실습 위주의 교육이 많아 눈썰미로 대충 따라간다 하더라도 사전에 최소한 6개월 정도의 어학연수가 필요하다고 학교 측은 얘기한다.
파리=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영화-연극등 현장서 뛰는 분들이 교사의 절반”
―쇼보 씨는 어떤 사람인가.
“헤어 스타일리스트나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유명세는 패션 디자이너에 미치지는 못한다. 헤어 스타일리스트라고 하면 1960년대 능숙한 커팅 기술로 기하학적인 헤어스타일을 유행시켰던 영국의 비달 사순 정도나 기억될까. 쇼보 씨는 메이크업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몇 안 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영화고등연구소(IDHEC), 루이 루미에르 국립 사진영화학교, 파리미용과학아카데미 등에서 메이크업을 가르치다 1974년 우리 학교를 세웠다.”
―아버지 시절에 비해 어떤 점이 달라졌나.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아버지 때는 교사들이 모두 프랑스인으로만 구성돼 있어서 외국인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다. 지금은 중남미 출신의 교사도 있고 동양인 선생도 있다. 인종별로 피부의 특징이 다르고 화장하는 방법도 다르다. 또 실제 현장의 흐름과 동떨어지지 않기 위해 선생의 절반 정도는 영화 연극 분야에서 현장 작업을 하고 있는 분을 모시고 있다.”
―다른 예술화장학교들에 비해 나은 점은 무엇인가.
“최근 3∼4년 전문 예술화장학교가 많이 생겼다. 이런 학교들 역시 대부분 크리스티앙 쇼보 출신들이 설립했다는 게 우리의 자부심이다. 단 한번도 우리 학교가 그런 곳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규모면에서도 1년에 약 120명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크다.”
파리=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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