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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 30년 가까이 나의 인생은 시련과 싸워온 삶”이라고 회고했다. 첫 난관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찾아왔다.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소년 김경환은 대학에 너무 가고 싶었지만 예비군 중대장인 아버지와 행상을 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대학에 보낼 형편이 되지 못했다. 번민의 나날을
보내던 사춘기 청소년 김경환은 끝내 아버지 돈 1만원을 훔쳐 쥐고 대구로 무작정 가출했다. 이때부터 10대 청소년은 세상의 거친 풍파에
내던져졌다.
“먹고 살아야 했어요. 화물차 조수, 봉제공장 재봉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지요. 그런데 제대로 못 먹은 탓인지 한 2년 지나니까 몸이
쇠약해졌어요. 너무 힘들어서 편지지를 사 가지고 고향 집 아버님께 편지를 썼어요. 그때 어찌나 눈물이 흐르던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긴 편지를 받아본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애처로움 넘치는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아들은 그길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속죄라도 하듯 열심히 공부했고 군에 입대했다. 전역을 얼마 앞두고 신문에 난 경주호텔학교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했다가 합격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리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도 계란을 손에 쥐고 야채 돌려 깎는 연습을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1997년부터 프라자호텔 근무를 시작한
뒤에도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아’ 하루 4시간씩 자면서 전문대학을 다녔다. 전문대 졸업 후에는 방송통신대학에 편입학해 학사학위를,
부산롯데호텔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석사학위까지 땄다.
그는 “늦은 만큼 남보다 두 배 세 배 땀 흘렸고 그때의 작은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 같다”면서 “요즘에도 실 감는
공장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님만 보면 느슨해졌던 마음이 어느새 다져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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