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래가 유명한 제주시의 삼양해수욕장. 제주공항에서 삼양해수욕장으로 가는 일주도로(12번)를 따라가면 ‘ 제주민속박물관’이란 표지가 나온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평범한 3층 양옥의 마당으로 이어진다. 이곳이 국내 1호 사립박물관인 제주민속박물관이다. 1964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립박물관으로 문을 연 이 곳은 제주가 고향인 진성기(71) 관장이 평생 동안 수집하고 연구해온 제주의 민속사가 숨쉬는 곳이다. 작년까지 무료였다가 올해 유료로 전환했지만 재정이 어려워 전시시설이나 운영은 ‘민속박물관’이란 멋진 이름에는 못 미치지만 가장 ‘제주적인 박물관’을 가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들러볼 만한 곳이다. 언제부터인가 제주도는 ‘골프장 천국’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6년 1월 현재 운영 중인 골프장이 16곳, 개발승인이 난 곳이 12곳, 절차가 진행 중인 곳이 7곳, 골프장 예정지로 지정된 곳이 5곳이다. 예정대로 모두 건설되면 제주도에는 골프장이 40개가 된다. 인구 55만여명에 연간 관광객 500여만명인 제주에 골프장이 40개나 된다면 ‘천국’이란 말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골프장만으로는 제주를 다 알 수 없는 법. 만일 제주도가 ‘박물관 천국’이란 사실을 안다면 제주를 제법 많이 안다고 자부해도 좋다. 제주도에는 박물관·미술관·기념관(전시관)·동식물원 등을 합쳐 45곳이 있다. 지금 제주에는 이런 각종 ‘박물관’들이 앞으로 건설될 것까지 포함해 ‘골프장’ 수보다 많다. 올해는 제주 방문의 해 올해는 정부가 지정한 ‘2006년 제주 방문의 해’. 제주도에서 3박4일간 자유롭게 관광을 할 예정이라면 하루쯤 떼어내 ‘박물관 투어’ 계획을 짜보면 어떨까. 관심분야에 따라 테마별 박물관을 들러볼 수도 있고 제주의 민속사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대부분의 박물관이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12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이다. 가장 제주도적인 것을 느끼고 싶으면 어디로 가야 할까. 국립제주박물관이나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이 아무래도 규모·시설·운영 면에서 앞서 있다. 이런 박물관 관람만으로 뭔가 아쉬운 사람에게 앞서 얘기한 ‘제주민속박물관’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또 북제주군 한경면 청수리에 있는 ‘평화박물관’은 제주도가 아닌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독특한 박물관이다. ‘세계 평화의 섬, 제주’ 등의 말을 들어본 사람은 평화박물관이란 이름만 듣고 관제(官製) 냄새가 나는 곳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평화박물관은 조그만 동산처럼 생긴 가마오름이란 곳에 있다. 물론 개인이 만든 것이다. 이 박물관은 일제 강점기에 제주도가 일본군에 의해 어떻게 점령되고 파괴됐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마오름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미로 같은 진지동굴이 복원돼 있다. 전시관에는 진지동굴을 만들 때 사용했던 일본군의 각종 도구와 자료가 관람객을 맞는다. 이를 다 본 뒤 높이 1.6~2m, 폭 1.5~3m 규모의 땅굴로 향한다. 진지동굴의 총 연장은 2㎞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관람할 수 있도록 복원된 것은 300여m다. 진지동굴 안의 회의실, 숙소, 의무실 등이 지난 역사를 고스란히 증언해주고 있다. 평화박물관 이영근 관장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 진지동굴이나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던 연세 드신 분 100여명의 증언을 채록했다”며 “제주의 아픈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정리해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은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2001년 4월에 문을 열어 2년 반 만에 입장객 100만명을 돌파한 이색적인 장소다. “중문관광단지와 테디베어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고정관념의 포로가 돼 있을 수 있다. 그림 같은 서귀포 앞바다, 야자수가 아름답게 드리운 길, 갈색이 도는 초록으로 죽 늘어선 삼나무 숲과 그 멀리 바라보이는 흰 눈을 머리에 인 한라산. 이런 곳에서 가족과 함께 산책하면서 테디베어 박물관을 찾아보고 기념사진을 찍고, 곰 인형을 하나쯤 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테디베어박물관을 떠나 오른쪽으로 은빛 바다를 보며 아름다운 제주국제컨벤션 쪽으로 차를 몰다 보면 황토색의 독특한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프리카박물관’이다. 2004년 12월 첫선을 보인 아프리카박물관은 이제 첫돌을 갓 넘긴 어린 박물관이다. 하지만 전시물을 보면 한종훈 박물관장의 아프리카에 대한 ‘내공’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서울 대학로에서 처음 문을 열었고, 제주로 그대로 옮겨온 아프리카박물관은 동양권에서 개인박물관으로는 첫손에 꼽힌다. 서아프리카 말리공화국의 젠네란 곳에 있는 이슬람 사원 ‘젠네대사원’을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 건물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바라다보이는 눈 덮인 한라산의 느낌은 황홀함 그 자체다. 1999년 6월 우리나라 최초로 남제주군 남원읍 해안에 문을 연 ‘신영영화박물관’. 한 개인의 고집과 애정과 노력을 세월로 잘 반죽하면 ‘박물관’이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설립자인 영화배우 신영균씨의 한국 영화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신영영화박물관에 들렀다가 박물관만 보고 가면 안 된다. 해안을 따라 만들어 놓은 2㎞ 남짓한 산책로가 아주 멋지다. 제주에는 독특한 박물관이 적지 않지만 올 3월쯤 ‘건강과 성 박물관’이 그 이름을 더할 예정이다. ‘건강과 성’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섹스용품 등을 전시·판매하는 일종의 ‘에로틱박물관’ 아니냐고 생각하면 과녁을 좀 빗나갔다. 성(Sex)을 다루는 곳은 맞지만, 조금 과장하면 어른을 위한 성교육장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은 건강 증진 사업을 펼치고 있는 ㈜헬스맥스란 회사에서 짓고 있다. 김완배(52) 대표는 “음지의 성을 양지의 성으로 끌어내자는 것이 우리 박물관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라며 “어른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성(性)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깨닫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콘텐츠 빈약한 곳도 상당수 제주에서 박물관을 둘러본 소감은 어떨까. 울산시 범서초등학교 정은정(29) 교사의 말을 들어보자. “가까운 교사들과 함께 제주를 찾아 하루종일 정석항공관, 초콜릿박물관, 테디베어박물관, 아프리카박물관을 돌아봤다. 관광 목적이 아니라 학생을 데리고 제주에 왔을 때 어떤 곳에 데리고 갈지 파악하러 왔다.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제주적인 박물관을 찾기가 어렵고 관람료가 비싼 편이다.” 정 교사는 “유럽 등에서는 교육을 위해 박물관을 찾는 학생과 교사에게는 입장료를 파격적으로 할인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제주의 박물관도 운영의 묘를 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교사의 말처럼 제주도가 진정한 ‘박물관 천국’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우선 상당수의 박물관이 이름값을 못할 정도로 콘텐츠가 빈약하다. 원인은 영세함이다. 또 관광객을 겨냥해 장삿속으로 무분별하게 박물관이 생기고 있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제주를 ‘박물관 천국’으로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있다. 최병식 경희대 교수(한국박물관협회 지원사업단장)는 지난해 11월 초청강연회에서 “국제적인 수준의 문화유적지가 부족한 제주가 외국인 관광객 등을 유인하려면 박물관으로 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며 제주를 ‘박물관 특구’로 지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박물관들도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제주도 내 공립·사립박물관 26곳은 지난해 6월 제주도박물관협의회(회장 한종훈)를 만들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는 한편, 정부와 제주도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지난 1월 5~6일 제주도 아프리카박물관에서는 ‘2006년 전국사립박물관·미술관 제주 워크숍’도 열렸다. 한종훈 제주도박물관협의회장은 “제주도의 박물관들을 한라산이나 천지연폭포, 만장굴 등 유명 관광지 못지 않은 관광자원으로 키울 것”이라며 “박물관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 만큼 제주 박물관에 많은 분이 따뜻한 애정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주=글·사진 임형균 자유기고가(전 조선일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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