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탑의 개요

鶴山 徐 仁 2005. 12. 12. 09:28
 

탑의 어원

탑은 탑파 . 솔도파라고도 하는데, 솔도파는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의 'stupa'를, 탑파는 팔리어인 'thupa'를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모두 네모난 무덤이라는 뜻이다. 스투파의 원래의 뜻은 '신골(身骨)을 담고 토석을 쌓아올린, 불신골을 봉안하는 묘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탑의 기원

탑이 언제부터 축조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대 인도에서는 탑이라는 말에 분묘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불교 성립 이전부터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불탑으로서의 성격은 기원전 5세기 초에 석가가 열반하자 그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 졌다.

 

석가모니가 인도 북중부 쿠시나가라의 사라 쌍수 밑에서 열반하자 그의 제자들은 유해를 화장하였다. 그러자 인도의 여덟 나라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전을 일으켰다. 이때 석가모니의 제자인 도로나의 중재로 불타의 사리를 팔등분하여 여덟나라에 나누어 주고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 또는 '사리팔분'이라 한다.

 

석가가 열반한지 200년 후 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은 불사리를 안치한 8탑을 발굴하여 불사리를 다시 8만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하는 성스러운 구조물로 불교의 전파와 함께 각 나라에 널리 세워졌으나 나라마다, 시대마다 그 의미나 양식이 다르게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불탑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전해졌는데, 초기에는 고루형(高樓形)의 목탑이 발달한 중국의 영향으로 목탑이 주종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평양 청암리사지, 백제의 부여 군수리사지, 신라의 경주 황룡사지 등의 발굴을 통해 목탑의 발달이 확인 되었다. 삼국시대 말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석을 사용한 석탑이 크게 유행하면서 가히 석탑의 나라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탑의 형식

처음 인도에서 만들어진 탑은 마치 분묘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오늘날의 탑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이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일련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탑의 아랫부분부터 기단부, 가운데의 탑신부, 맨 위의 상륜부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기단부

탑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다. 기단은 구조적으로 탑신부와 상륜부를 받쳐주어 탑의 하중을 지반에 전달하고 , 탑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부각시켜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형태는 대부분 방형으로 네모난 지대석 위에 놓여 있고. 그 위로 갑석을 얹어 놓은 것이 일반적이다.

갑석과 갑석 사이에는 중석이 놓이는데, 중석에는 양 끝에 우주와 우주사이에 탱주가 부각되어 있다.

탑신부

탑의 기단부 위에 놓이는 탑의 몸체인데, 옥개석과 옥신석이 합쳐진 것이다. 탑의 층수를 헤아릴 때 탑신부의 옥개석과 옥신석의 수를 보고 3층, 5층 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복발형의 모양이었으나 차츰 탑신이 홀수로 구성되면서 중층탑으로 변하게 되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물의 지붕과 같은 형태로 주로 4단 또는 5단의 역계단식 받침으로 되어 있고 처마 끝부분에는 풍탁을 달았다.

상륜부

탑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는 장식물로 그 모양은 인도 초기 탑 형태가 소형화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인 형태는 방형의 노반에 복발과 양화를 얹고 그 위에 찰주를 세운뒤 9개의 보륜ㅇ로 장식하고, 그 위에 보개와 수연을 붙이고 맨 꼭대기에는 용차와 보주의 2단으로 된 구형을 놓았다.

 

탑의 종류

탑은 모양에 따라 전형석탑, 복발형탑, 보협인탑, 오륜탑, 4사자석탑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재료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 모전석탑, 금은탑, 청석탑 등으로 다양하게 분류된다.

목탑

나무를 사용해 만든 탑으로 우리나라 탑의 시작 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목탑은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양식으로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전해받은 고구려, 백제, 신라는 먼저 목탑을 축조 했다. 목탑은 재료의 특성상 파괴되기 쉽고 불에 타기 쉽다.

따라서 크고 작은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우리나라에는 현재 남아 있는 목탑은 적다. 다만 목탑이 세워졌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신라의 경주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보문사지, 백제의 군수리사지, 금강사지, 전북 익산 제석사지, 고구려의 평양 청암리사지, 평남 대동군 상오리사지 등이 있다.

전탑

우리나라 탑 가운데 이색적인 것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때 양지스님이 벽돌로 작은 탑 하나를 만들어 삼천불과 함께 절에 봉안했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전탑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탑의 특징은 단층기단에 옥개석의 추녀가 짧으며, 옥개석 상하에 층단을 마련하고, 옥신석에 감실을 설치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전탑은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지 못하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만 세워 졌는데, 탑을 세우기에 앞서 벽돌부터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데다 석탑에 비해 공정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모전석탑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이다. 형태상으로 보아 돌을 벽돌과 같이 잘라서 전탑모양으로 쌓은 것과 일반적인 석탑의 기본 형식을 따르면서 지붕 낙수면을 전탑과 같이 가공하여 쌓은 것이 있다.

전탑에 비해 더 많이 만들어졌지만, 전탑과 마찬가지로탑을 세우기 위해서는 벽돌 모양의 돌을 먼저 만들어야 하는 번거러움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유행할 수는 없었다.

석탑

앞선 시대에 만들어졌던 목탑 형식의 전통과 기술을 바탕으로 삼국시대 말엽인 7세기 무렵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다.

좋은 질의 화강암이 충부하게 널려 있는 우리나라의 자연 조건과 어우러져 크게 발달하였다. 목탑에 비해 비바람이나 화재에 강하고, 전탑에 비해 제작하는데 노력이 덜 들면서 영구적인 까닭에 크게 유행 하였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탑의 수는 양 1천여 기인데, 그 대부분이 바로 이 석탑이다. 시대별, 나라별로 제작의 양식과 수법이 다양하다.

청석탑

점판암이라 불리는 부른빛을 가진 특이한 석재로 만든 탑이다. 기본 형식은 일반 석탑과 같지만 재료가 얇고 작으며 약하기 때문에 모두 소규모의 탑들 뿐이다.

청석탑은 점판암이 지니는 석질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화강암과 같이 자유롭게 깍고 다듬을 수 없기 때문에 옥신은 상자와 같이 되고 옥개석은 한 장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화강암재 석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게 된다.

4사자석탑

탑의 상층 기단부 네 귀퉁이에 사자를 세우고 중앙에 승상(僧像)을 안치한 특이한 형태의 탑이다. 초층 기단과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는 일반적인 탑의 형식과 같다.

 


 
출처 : 블로그 > .. | 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