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나야 할 것
같다.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소망하고 이루고 싶어한 일을 나는 이루지 못했고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삶이 숙명적으로 비극의 그림자 아래 있음을 고백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실패로 규정해야 하는 인생만큼 비참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 고흐는 그럼에도 자신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진정으로 감사했다.
“붓을 한 번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의 말년의 걸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런 비극적인 인식과 예술을 통한 삶의 긍정이 묘한 긴장과 조화로 어우러진 그림이다. 평론가에 따라 그의 자살 의지를 시사하는 그림이라는 입장과 강한 생명 의지의 표현이라는 입장이 엇갈려 나오는 것도 작품의 이런 성격 탓이 크다.
▲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들판 |
그림의 무대가 되는 밀밭은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다.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문 오베르에는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무덤도 있는데, 그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 뒤쪽으로 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옛날 한 절박했던 예술혼의 아픔과 슬픔은 모두 잊었는지 밀밭은 그저 여느 들판과 다를 바 없이 허허롭게 오가는 세월을 맞는다.
현장에 가 보면 반 고흐의 그림에서처럼 길은 네 갈래로 갈린다. 하지만 한 평면 안에 세 갈래의 길이 모두 예각으로 모여 있는 반 고흐의 그림은 의도적인 왜곡이다. 직각으로 교차하는 갈래 길은 카메라의 광각 렌즈로도 반 고흐의 그림처럼 잡히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반 고흐는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세 갈래의 길을 화면에 그려 넣었다. 두 갈래의 길이 아닌, 세 갈래의 길. 삶과 죽음, 흑과 백을 가르는 ‘2’가 아니라, 삼발이 의자처럼 다양성과 조화, 존재의 완성을 지향하는 ‘3’. 그것은 반 고흐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무언가 제 3의 길을 원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늘 저편이 어두워지고 까마귀 떼가 날아오는 모습에서 불길하고 어두운 기운의 엄습을 느낄 수 있으나, 지금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밀밭은 강렬한 노란색 희망으로 용틀임친다. 기껏 까마귀 몇 마리가 곡식 좀 훔쳐먹어 보았자 꿈쩍도 하지 않을 저 광활한 밀밭. 영원한 생명으로 요동치는 황금의 바다. 어두운 하늘의 운명에 대해 강렬한 저항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 역동적인 생명의 힘을 표현한 이 무렵의 또 다른 인상적인 그림으로는 ‘나무 뿌리’가 있다. 삶을 지탱해주는 뿌리들의 힘찬 투쟁이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다. 땅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처럼 역동적인 노랑색과 고동색으로 파도친다. 뿌리들은 그 뜨거운 노랑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마음껏 빨아들이며 하늘을 향해 몸을 곧추세우고 팔을 뻗는다.
▲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캔버스에 유채, 67X56cm, 개인 소장 |
“법의학자의 오랜 경험에 비춰 반 고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하려 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슴에 총을 쏘되 심장에서 떨어진 곳에 쏴 절명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는 것은 죽음보다 자살을 기도함으로써 주위의 관심을 끄는 데 더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로 법의학자 문국진 선생의 평가처럼 반 고흐는 자살보다 자신의 자살 기도가 주변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에 더 관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것도 결국 삶을 향한, 생명을 향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소통하기를 원했다. 진정한 소통을 하기를 원했다. 진정한 소통만 이뤄진다면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도 두렵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예술에 이토록 가슴 저리게 공감하는 것은 그의 그런 소통 의지가 끝내 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고뇌”
오베르(Aubers sur Oise)는 파리에서 35km쯤 떨어져 있다. ‘반 고흐의 집(Maison de Van Gogh)’이라 불리는 라부 여인숙(Auberge Ravoux). 빈센트 반 고흐가 이 여인숙에 온 것은 1890년 5월 20일이다. 당시 오베르에는 라부 여인숙보다 못한, 혹은 그보다 나은 숙박시설이 여러 곳 있었다. 그러나 고풍스러우면서도 손질이 잘된 이 여인숙을 보고 반 고흐는 이곳에 묵기로 결정했다. 하루 방값은 3프랑50전. 식사는 그가 좋아하는 시골풍으로, 고기와 야채, 샐러드, 빵이 제공되는 조건이었다. 반 고흐는 이 건물의 3층에 묵었다. 반 고흐의 방은 아주 작다.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에도 매우 불편한 곳이다. 현재 그곳에는 작은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작고 가난한 공간을 바라보노라면 빈센트의 영혼이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창백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것만 같다. 먼지를 맞으며, 그가 그리워했던 사람들을 여전히 그리워하며….
그 비좁은 공간에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동생 테오에게 한 말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품어 안고 있었으리라.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이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흔히들 말하는 내 그림의 거친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자만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이 말 위로 “다 이루었다”고 한 십자가상의 예수의 언급이 ‘오버 랩’돼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연상인 것 같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한 화가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한 성인처럼 모든 것을 이룬 뒤 이렇게 까마귀가 나는 밀밭 위로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미술평론가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지상에 버려진 천사’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죽어서 신화가 된 미술사의 대표적인 천재 화가이다. 네덜란드 개신교 목사의 아들인 그는 화랑 직원으로 출발해 학교 교사, 선교사 등을 지냈으나 그 타고난 예술적 천재에 이끌려 결국 화가가 됐다.
▲ 반 고흐가 투숙했던 라부 여인숙 |
마우베 등의 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우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천재로 평가된다. 1886년 동생이 화상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파리로 가 베르나르, 드가, 고갱 등 인상파, 신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한 뒤 곧 아를로 내려가 독자적인 창조의 세계에 몰입했다. 고갱과의 다툼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그의 정신병적, 폭력적 스캔들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정신병이 심해져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오베르로 이주했다. 인상파, 신인상파뿐 아니라 들라크루아의 색채, 일본 판화의 색채 및 구도에 영향을 받았다. ‘가셰 박사의 초상’이 1990년 경매에서 8250만달러에 팔리는 등 오늘날 최고가 거래 화가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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